유라시아 없는 인도·태평양, 한국외교는 어디로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순방할 때마다 외교참사 논란이 벌어지곤 한다. 조문 없는 조문외교, 바이든 대통령과의 48초 회동과 노룩 악수, 비공식 석상에서의 막말 논란, 기시다 총리 간담회의 정상회담 부풀리기 발표, G20 환영만찬 지각 등이 화제가 됐다. 외교참사의 책임을 물어 박진 외교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의정사상 7번째로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이러한 잇단 외교참사는 어쩌면 해프닝으로 치부해도 될지 모른다. 진짜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전략에 있다. 신정부는 출범 초부터 ‘무너진’ 한미동맹을 재건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당면 외교목표로 내세웠다. 한·미 동맹의 재건을 구실로 미·일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한 한·미·일 삼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일 관계 개선에 목을 매고 있다. 그 결과 한국외교에서 유라시아가 사라지고 북·중·러 삼각체제가 형성되면서 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이 요원해지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1월 11일 한·아세안 정상회담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자유·번영·평화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이틀 뒤인 13일 한·미·일 정상이 발표한 “인도-태평양 한·미·일 3국 파트너십에 대한 프놈펜 성명”이다. 이는 한국의 독자적인 남방외교가 미·일 주도의 인·태 전략에 편입되면서 변질되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보수정부나 진보정부 할 것 없이 일관되게 추진해 왔던 북방외교가 끝났음을 사실상 선언한 것으로, 우리 외교의 대전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남방외교가 변질되었다. 사드 사태 당시 대중국 수출비중이 25.1%로 중국의 무역보복에 취약했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남방외교를 본격화했다. 당시 추진한 ‘차이나+1’ 전략은 중국 이외에 아세안과 인도로 수출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아세안·인도의 수출비중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기 전인 2016년에 17.4%였으나 2021년에는 19.3%로 1.9%가 증가했다. 중국 시장의 비중도 늘어났지만 아세안·인도 시장의 증가률이 더 크게 늘어나 ‘차이나+1’ 전략을 통해 어느 정도 수출시장 다변화의 성과를 거두었다.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10개국과 인도가 대중 무역의존도가 높고 미·중 사이에서 안보협력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컸기 때문에 경제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인·태지역이 세계인구의 65%, GDP의 60%, 전 세계 해상운송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만큼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혀, 아세안·인도와의 경제협력보다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에 방점을 둠으로써 한국판 인·태 전략은 미·일이 추진해 왔던 안보 이슈를 전면에 떠올렸다.
북방전략 없이 우왕좌왕
다음으로, 30년간 지속되어 온 북방외교가 실종됐다. 북방외교는 좁게는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를 대상으로 하고, 넓게는 중국도 포함하는 대륙전략이다. 유라시아를 겨냥한 우리의 대륙전략은 보수정부에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서 시작해 이명박 정부의 신아시아 협력외교,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구상으로 이어졌고, 진보정부에서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중심국가(Hub State) 구상,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으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현 정부는 이렇다 할 북방외교 전략을 제시하지 않았다. 미·일 주도의 해양전략에 편승하다 보니 북방외교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대만을 들렀다가 서울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만나지 않고서 리잔수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만나는 바람에 신정부 출범 이후 대중 무역적자가 계속되자 중국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또한 푸틴 대통령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있다”고 경고하자, 이를 의식했는지 11월 17일 우크라이나가 발의한 대 러시아 인권결의안에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등 78개 자유민주국가의 찬성과 달리 한국은 기권했다. 이는 북방외교의 실종이 초래한 외교적 굴욕인 것이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전략적 비전’(2012)에서 미국이 쇠퇴할 경우 지정학적 위기에 처할지 모를 나라로 한국, 대만 등 8개 국가를 지목했다. 이 가운데 조지아(2008)와 아프가니스탄(2001~2021)은 이미 전쟁을 치렀고 우크라이나는 2014년 크림반도를 빼앗긴 데 이어 금년 2월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한국은 주한미군 등 미국의 안보자산 제공으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 왔지만, 미국이 쇠퇴해 힘의 공백이 생길 경우 커다란 안보위기를 겪을 수 있다.
브레진스키는 지정학적 위기에 처한 한국에 놓여 있는 선택지로 중국의 지역패권을 인정하고 안전을 보장받거나, 가치와 위협인식을 공유한 일본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두 가지 방안을 들었다. 현재 윤석열 정부의 한국판 인·태 전략은 중국의 지역패권 장악을 저지하거나 대비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으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중 대립의 격화 속에서 전통적인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좋던 세월은 끝나가고 있지만, 국제교역이나 북한 비핵화와 같은 분야에서 여전히 중국과의 협력과 도움이 필요하다.
중국의 지역패권을 저지하거나 늦추기 위해 굳건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 한·일 협력을 다방면으로 확대해나갈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장기적인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단·중기적인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단견이다. 중국의 지역패권 장악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장기 리스크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장기적인 리스크 관리와 단·중기적인 국가이익 추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북방외교를 부활하고 자주적인 남방외교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외교전략을 재설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