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 속에 있는 존재자

[형이상학 강의 ⑤]

2023-12-18     김상봉의 성찰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1. 존재의 자기거리에 대하여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존재를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존재의 자기거리를 해명하는 것입니다. 자기 거리란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떨어져 있다는 것은 공간적 비유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차이와 다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거리란 자기가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같은 사태를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자기가 자기 아닌 것과 같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는 자기와 같은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것은 마치 A≠A나, A=~A가 모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그런 근원적 모순 속에 있습니다. 존재의 자기거리는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의 근원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기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전 강의에서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 이를테면, 있음과 있는 것, 그리고 있음과 ~임, 하나와 여럿, 이런 것들이 존재 일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자기거리의 양상들입니다.

형이상학이 과학과 달리 존재에 대한 탐구, 곧 존재론이라면, 존재가 다른 무엇보다 자기 거리 속에서 나타나므로, 이제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은 존재의 모순적 자기거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존재자의 구체적 존재 양상을 그 긍정적 규정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라면, 철학, 그 가운데서도 형이상학은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 일반의 있음을 탐구하되 그 있음이 보여주는 자기거리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없음 속에 있음

그런데 이전 강의에서 우리가 존재의 자기거리를 말하면서 어쩌면 다른 모든 자기거리의 양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일 수도 있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없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의 공속입니다. 있음은 언제나 ‘없음 속에서 있음’입니다. 있음과 없음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존을 허락지 않는 반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있음과 없음은 모순적으로 대립하고 반대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있지 않다는 말과 같지요. 어떤 것이 있다면서 동시에 그것이 없다고 말한다거나, 아니면 어떤 것이 분명히 없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처럼 있음과 없음은 분명히 서로 반대되는 것이요, 그런 한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조금 전에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있음이 없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없음 속에 있다. 또는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창밖에 보이는 한 송이 장미꽃을 생각해 봅시다. 꽃은 있습니다. 그런데 꽃이 있다는 것은 그 꽃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지속하는 것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은 순간으로만 있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이란 시간의 단면인데, 그렇게 시간을 단면으로 자르는 순간, 그 단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적 존재는 사실 존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떡집 기계에서 가래떡이 이어져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그렇게 이어져 나오는 가래떡이 시간 속에서 지속하는 존재자라고 생각합시다. 떡은 이어져 있는 한에서 떡입니다. 그리고 가래떡이 계속 기계에서 나오는 것은 시간의 이어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순간은 시간의 단면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순간적 존재를 붙잡으려 한다면, 가래떡을 예리한 칼로 끊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순간적 존재를 붙잡기 위해 가래떡을 자르면 떡은 끊어지겠지만, 끊어진 자리, 즉 떡의 단면 그 자체는 이제 떡이 아닙니다. 떡의 단면은 떡이 아니라 떡의 경계 또는 떡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칼로 끊어낸 떡의 단면은 떡이 아니라 떡과 떡 아닌 것, 또는 떡의 있음과 떡의 없음이 만나는 경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떡의 단면이 아니라, 입에 넣을 수 있는 떡 자체를 얻으려면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떡의 양쪽을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 떡은 두 개의 단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면 사이에 이어진 떡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의미에서 한 순간이란 떡이 아닙니다. 반드시 한쪽 단면과 다른쪽 단면을 가진 떡이 진짜 떡인 것처럼, 한 순간과 다른 순간 사이에 머무르는 떡만이 정말로 존재하는, 먹을 수 있는 떡인 것입니다.

있음이 머무름인 한에서, 있음은 그 자체로서 시간적입니다. 모든 ‘있는 것’은 시간 속에서 머무르는 한에서, 머무르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와 시간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합니다. 그리고 시간은 있음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의 본질적 계기입니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라진다는 것 더 쉽게 말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머무르는 것인데, 시간 속에서 머무르는 것은 동시에 사라진다는 것을,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 있음이란 시간 속에서 없어짐과 뗄 수 없이 공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모순된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바로 그 모순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한 30분쯤 전에 이 강의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30분 전에 저 문으로 들어오던 내가 지금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선생님은 있잖아요!’라고 여러분은 대답할 수 있겠지요. 맞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제가 30분 전에 저 문으로 들어오던 그 제가 맞습니까? 30분 전의 내가 여전히 지금 여기 있는 건가요? 제가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철학하는 사람들은 역시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더라도 저는 이 물음을 계속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할지라도, 한 번쯤은 괴테의 파우스트가 마지막에 외쳤듯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순간이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다 해서 시간이 옛날 시골 버스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주던가요? 시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갈 길을 갑니다. 그런데 시간은 혼자 가지 않습니다. 시간은, 마치 버스가 손님을 태우고 달리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같이 태우고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타고 떠난 손님들은 다시는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고, 떠난 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없음의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지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30분 전의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여전히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다시 묻거니와, 30분이 아니라 30년 전의 나는 어떻습니까? 과연 30년 전의 김상봉이 지금 여러분들 앞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처음 태어나 엄마 품에 안겨 있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여러분이 지금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할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씩 좁혀봅시다. 30년 전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3시간 전의 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3분 전의 나도 3초 전의 나도 더는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1초 전의 나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무한히 미분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순간으로서의 지금이라는 관념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간적인 지금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말해야겠지요. 내가 있는 것은 무한한 순간의 지속으로 있는 것이므로, 순간의 내가 없다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므로, 내가 있다면, 내가 있는 모든 순간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적인 지금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 순간적인 지금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붙잡아 보세요. 무엇이 잡힙니까? 지금 이 순간이라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지금 이 순간을 붙잡으려 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잡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은 이미 과거가 되어 더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금은 말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에서 모든 지금은 지금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과거는 더는 있지 않고 다가올 미래는 아직 있지 않은 것이므로 만약 지금 이 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와 이 세계가 어떤 의미로든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 가운데 오직 지금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 순간, 그 순간이란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지금을 붙잡는 순간, 그 지금 이 순간은 더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과거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 지금을 붙잡는 순간 지금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있음인 동시에 없음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는 생겨나는 동시에 사라짐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존재할 뿐인데, 그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없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없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있음은 머무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에만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있는 것은 반드시 지금부터 일정한 시간의 간격 속에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모든 시간이 순간의 이어짐이라면, 그리고 순간이 있음과 없음의 공속이라면, 머무름이란 끊임없이 있음이 없음으로 사라지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즉 머무름이란 새로운 있음의 생겨남이면서, 동시에 있음의 없어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사라지기 때문에, 또한 머무르는 것입니다. 생겨남이란 있음의 생겨남이요, 사라짐이란 없어짐입니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어짐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이제 우리는 있음은 없음을 통하여 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반대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자기부정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있음이 자기의 반대인 없음을 통해 있음이 되는 것을 가리켜 존재의 자기부정성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3. 있음과 없음 그리고 마음

형이상학이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묻는 것이 바로 이 자기부정성의 의미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인데, 있음과 없음이 그렇게 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없음은 있지 않음입니다. 있음의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음은 있지 않음과 공속합니다. 다시 말해 있음은 결코 순수한 있음으로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있음은 언제나 없음과 함께, 없음 속에서 있음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속에서는, 있음이 있지 않음을 통해 있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있지 않음 또는 없음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있음도 있음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있음의 자기부정성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형이상학의 영원한 물음입니다.

서양 형이상학의 초창기에는, 존재의 이런 자기부정성을 아예 부정해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강경하고도 단호하게 있음은 어떤 경우에도 없음과 뒤섞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있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또 생각해야 하노라. 왜냐하면 있음은 있고 무(無)는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라고 그대에게 명하노라. 나는 먼저 그대를 이 탐구의 길에서, 그런 다음, 무지한 중생들이 머리가 둘인 것처럼 망상하는 저것으로부터 그대를 [떼어놓으려 하노라].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무력함이 방황하는 정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에. 그들은 귀멀고 눈멀어 방황하노라. 당혹감 속에서 분별력 없는 무리처럼. 그들에게는 생겨나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이 같은 것이기도 하고 또 같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고 여겨지고, 모든 것의 길이 반전의 길이 되어버리노라.” [파르메니데스, 「단편, 6」]

여기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만이 있고 무는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지한 중생들은 마치 머리가 둘인 것처럼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는다는군요. 그런 까닭에 그들은 생겨나는 것과 있지 않는 것을 같은 것이면서 또 같은 것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물의 길이 반전의 길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전이란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반전이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오직 있는 것만이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또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가리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에 대해 “그것은 전체로서 한결같은 것이다”(πᾶν ἐστιν ὁμοῖον)라고 말합니다. [파르메니데스, 단편 8] 한결같다는 말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존재가 존재 아닌 것, 즉 비존재와 섞여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동일한 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있음을 전체로 표상할 때, 우리는 있음을 공간적으로는 무한히 펼쳐진 동질적인 크기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무한히 지속하는 동일한 연속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있음은 공간적으로는 분할 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별할 수 있는 지속으로 표상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하는 존재는 같은 전체라도 여럿으로 분할하거나 구분할 수 있는 전체가 아니고, 순수한 단순성 속에서 분할 불가능한 하나로서 파악되는 전체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분할할 수 없이 “통째로” [같은 단편]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단편] 이 말은 그것의 지체들이 따로 있고 그것들이 모여 이룬 전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체가 곧 전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공간적으로 표상하자면 존재는 “분할 불가능”하고 [같은 단편] 시간적으로 표상하자면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을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같은 단편] 이는 과거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만약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인정한다면, 결국 비존재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를 뒤섞지 않으려면, 과거도 미래도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직 현재만이 존재입니다.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구별하거나 분할할 수 없는 단순한 하나가 바로 존재입니다. 이런 사정을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요, 하나이며, 총괄된 것으로서 지금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같은 단편]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존재의 근원적 현상과는 명백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라 오직 지금 동시에 있다는 것부터가 시간의 흐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無)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존재의 개념은 나중에 신적인 절대 존재의 선구적 암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없음 속에서 존재하지만, 신은 그런 없음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있음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수 존재의 개념은 그리스 철학에서는 암시에 그쳤지만, 그리스도교가 등장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파르메니데스의 순수한 존재의 개념은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 픽사베이

파르메니데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또 다른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있음이 동시에 없음이며, 생겨남이 사라짐이라는 존재의 자기부정성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 속에서 무의 심연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를 강물의 흐름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49a]

그는 같은 말을 간단히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단편, 91]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있음이 없음과 공속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헤라클레이토스는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있음은 있지 않음입니다. 있음은 영원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흐르는 강물의 어떤 지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강물은 같은 강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우리가 같은 강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같은 강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강물은 같은 강물이 아니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가 존재의 자기부정성을 명료하게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재와 무의 공속을 파르메니데스처럼 치명적 모순으로 보거나,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없음 없는 순수한 있음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지 않고, 도리어 언제나 없음 속에 있는 있음이라는 존재의 그런 자기거리와 자기부정성을 존재의 근원적 진리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물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함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A인 동시에 ~A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 젊은이와 늙은이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반대로 돌리면 저것이 되고 저것을 반대로 돌리면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88]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와 비슷한 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를테면 “원주 위에서는 시작과 끝이 같이 있다”거나, [단편, 103]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은 하나의 길이다”[단편, 60] 같은 말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있음과 없음 가운데서 있음만을 택하여 그것을 순수성 속에서 고찰하지 않고 있음과 없음을 존재의 원현상으로 같이 포괄할 때, 우리는 있음과 없음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서 자기 속에 포괄하는 제3의 지평을 반드시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있음과 없음이라는,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두 가지 사태가 같은 곳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모순을 감당할 수 있고, 반대되는 것을 스스로 품을 수 있는 장소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명백히 모순적인 술어를 자기 속에 동시에 껴안을 수 있는 바탕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전승된 단편을 통해 유추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정신이 바로 그런 기체 또는 주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은 낮 밤, 겨울 여름, 전쟁 평화, 포만 기아, 모든 반대자들, 그는 정신.” [단편, 67]

있음과 없음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절대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신을 가리켜 낮 밤이고, 겨울 여름이며, 포만 기아이고, 통틀어 모든 반대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이 무엇이기에, 모든 반대자들이, 다른 무엇보다 있음과 없음이 그에게서 하나로 합일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이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은 또 무엇이기에 정신 속에서 있음과 없음이 그리고 모든 반대자들이 하나로 귀일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물음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문제되는 반대자들의 공속이 존재의 시간성과 뗄 수 없이 결부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존재가 있음으로 정립되는 순간 없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존재의 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모든 반대자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주체라면, 정신은 또한 시간적 존재를 지탱하는 기체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있지 않은 미래와 더는 있지 않은 과거가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4. 존재와 시간

이것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현한 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시간이 무엇인지 물으면서, 시간에 관해 느끼는 당혹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저희가 입에 올리는 것치고 시간보다도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희가 시간을 얘기할 적에는 물론 알아듣고, 딴 사람이 얘기하는 도중에 그 말을 들을 적에도 저희는 알아듣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무엇입니까? 만약 아무도 저한테 묻지 않으면 저는 압니다. 그런데 만일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들면 저는 모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고백록』, 11권, 14.17]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이 물음을 금세 알아듣고, 그 날짜를 말할 것입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묻는다면, 그런 것도 우리는 잘 알아듣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는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묻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시간의 규정들인데, 그 모든 시간 규정을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저희가 입에 올리는 것치고 시간보다도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시간’, 그 시간 자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아무도 그런 것을 묻지 않을 때는 내가 시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누군가 시간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갑자기 시간이 무엇인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당혹해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에 관해 무엇이 알 수 없다는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갑니다.

“단지 이것만은 제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습니다. 만일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면 과거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아무것도 닥쳐오지 않는다면 미래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두 시간,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존재합니까?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현재가 만일 항상 현재로 있고 과거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입니다. 현재가 시간으로 존재하려면 과거로 옮겨가야 하고, 과거로 옮겨감으로써 시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현재가 존재한다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바로 거기에 있는 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진실로 우리가, 오직 그것이 있지 않음을 지향한다는 이유에서만,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고백록』, 11권, 14.17]

시간은 흐르는 한에서 시간입니다. 만약 시간이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일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을 우리는 과거 시간이라고 부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간이 흐르는 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시간의 계기들 또는 부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저 두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려 더는 있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역시 아직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만이 있고, 미래도 과거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바로 지금이라고 불렀던 그 현재는 또 어떻게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정말로 있다고 말하려면 현재가 현재에서 그대로 머물러 과거로 옮겨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로 지나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현재라면, 그것은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아니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한 부분인 한에서, 그것은 과거로 나아감으로써만 시간적 현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로 옮겨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현재가 없음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 외에 다른 말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또 어떻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오직 그것이 있지 않음을 지향한다는 이유에서만,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진실로 과거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데, 하지만 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시간의 한계와도 같아서 그 순간만으로는 어떤 존재도 담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존재하기 위해서는 머물러야 합니다. 시간 속에서 존재가 어떤 머무름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 순간 속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결합의 주체일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오직 정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과거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셋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시간이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을 못봅니다.,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입니다.” [『고백록』, 11권, 20.26]

시간은 지금 이 순간으로만 현상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양방향으로 열린 지평입니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는 오직 현재와 결합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현재와 결합된 시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보니, 시간은 끝없이 왔다 사라지는 점의 연속이 아니고 어떤 거리나 깊이로 생각되는군요. 그 거리의 중심에는 현재가 있겠지요. 그리고 흐르는 시간은 현재와 일정한 거리 속에서 이어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시간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끊임없이 흘러 사라져가는 시간은 어디서 어떻게 현재와 관계 맺는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흐르는 시간을 관계 속에서 서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생각 자체가 대상과의 거리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란 과거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생각하는 나는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과거를 생각하든, 현재를 생각하든, 미래를 생각하든, 그 모든 대상은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될 것입니다. 내가 과거를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과거에 대한 기억일 것이고, 현재를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현재에 대한 주시일 것이며,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미래에 대한 기대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모든 시점이 현재와 관계 맺는 것을 우리는 영혼에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한에서 비존재를 향해 흐르는 시간은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서 현재와 관계 맺음으로써 현재적인 것, 곧 존재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소멸해가는 모든 것들이 정신에 의해 지탱됨으로써 어떤 머무르는 존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이 존재하고, 나의 예상 속에서 내일 해가 뜨는 것입니다. 만약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같이 생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시간 자체가 현재적 순간으로만 존재할 것인데, 현재적 순간 또는 찰나라고 하는 것은 머무르는 시간이 아니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시간이 흐르면서 동시에 머무를 때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 그 자체는 머무르지 않는 흐름입니다. 그렇게 무를 향해 가차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주는 것이 정신입니다. 그리하여 존재는 시간을 따라 흐르면서도 정신 속에서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는 있음과 생각의 공속을 봅니다.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있음이 생각 속에서만 머물러 있음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시간에 관해 던진 질문과 성찰은 그 아름다운 형식과 심오한 내용이 모두 후세의 전범이 될 만한 것이었으므로 여기서 먼저 소개하기는 하였으나, 오직 정신에 의해서만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감각 및 생각이라는 의식현상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책, 『영혼론』의 마지막 권에서 사유 활동이 과거와 미래에 관계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을 생각할 때, 이미 시간이라는 것이 같이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되는 시간이란 점과도 같은 순간이 아니라 마치 직선처럼 이어진 머무름입니다. 예를 들어 ‘클레온은 백인이다’라는 진술 속에는 ‘클레온은 백인이었다’는 것과 ‘클레온은 백인일 것이다’는 것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클레온은 백인이다라’는 진술은 절대적인 순간만을 지시하는 것이 되어버릴 것인데, 절대적인 순간이란 머무르지 않는 것이고, 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클레온은 백인이다’라는 말도 아무런 존재 사태도 지시하지 않는 공허한 진술이 되고 말겠지요. 그렇지 않으려면 ‘클레온은 백인이다’라는 말 속에 ‘클레온은 백인이었다’는 과거 존재와 ‘클레온은 백인일 것이다’라는 미래 존재가 같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클레온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하나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클레온이라는 한 사람의 존재도 분리할 수 없는 단일체로서 온전히 정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결코 하나로 모일 수 없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하나의 통일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경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자는 바로 정신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430b5] 시간이든, 그 속에서 머무르는 존재자든지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머무름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통일체는 부분들의 결합이라는 의미에서는 관념적으로 분해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분리 불가능한 하나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신체는 얼마든지 물리적으로 산산 조각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산산 조각나 버린 나의 신체는 더는 한 생명체로서의 나는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런 사정은 시간적 지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일정한 시간 간격 동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단절 속에 있다면 시간 속에서 지속하고 존재하는 나도 하나의 나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요. 내가 일정한 시간 간격 속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머무르는 시간 그 자체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흐르는 시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는 정신이 바로 그 통일의 원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5. 의식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는 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있음이 ‘없음 속에 있음’인지를 살펴보고, 여러 철학자들이 있음과 없음이 생각 속에서 하나로 통일된다고 보았다는 것을 소개했습니다만, 생각의 활동이 무엇이기에 있음과 없음을 자기 속에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지는 사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생각이 있음과 없음을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자기 속에서 통일한다면, 생각은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제3의 지평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기 속에서 하나로 통일하는 만큼, 생각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지평이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생각이 무엇이기에 흐르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쉽게 해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한번 스스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생각이 무엇이기에 흐르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일까요?”라고 물을 때, 그 물음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을 이루는 한 음절 한 음절이 제 입에서 흘러나올 때도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음절이 다른 음절로 나아가면서 앞의 음절은 없음의 심연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무-엇-이-기-에-흐-르-는-시-간-을-초-월-할-수-있-는-것-일-까-요”라고 내가 말할 때, 낱낱의 음절들이 아무런 내적 결합 없이 토막 나서 흐르는 시간 속에 차례로 무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이란 첫 음절이 ‘각’이란 둘째 음절 그리고 ‘이’라는 셋째 음절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차례로 생겼다가 없어질 뿐이라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이 전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생각이 무엇이기에 흐르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일까요?”라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물을 때도 시간은 흐르고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앞의 음절은 뒤의 음절에 떠밀려 속절없이 무의 심연으로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말과 생각의 한 단위 단위가 그렇게 말해지거나 생각되는 동시에 무의 심연으로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 음절 하나 하나는 그냥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라지면서 보존됩니다. 그리하여 “생-각-이-무-엇-이-기-에-흐-르-는-시-간-을-초-월-할-수-있-는-것-일-까-요”라는 음절들은 외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속절없이 떠밀려 사라지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시간 속에서 흘러간 음절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즉 “생-각-이-무-엇-이-기-에”라는 말에서, 내가 “이-기-에”라는 뒷부분을 말할 때는, 이미 “생-각-이”라는 앞부분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서 그것은 머물러 있습니다. 저 발화 전체의 마지막 부분 “것-일-까-요”를 말할 때는 앞에서 말했던 모든 음절들은 허무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 시간 속에서는 이미 사라진 모든 음절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는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입 밖에 낸 음절들이 “생-각-이-무-엇-이-기-에-흐-르-는-시-간-을-초-월-할-수-있-는-것-일-까-요”라고 토막 나서 시간 속에 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무엇이기에 흐르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일까요?”라고 이어져 하나의 의미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그런 의미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하나로 이어주고 그 속에서 의미를 보존하는 중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과정을 반추하면서, 어떻게 생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마음 속에서 그 시간의 흐름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머무르도록 결합하는지,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어떻게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또는 생각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서 일어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말한 음절이 시간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말과 생각이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렇게 사라지는 말들의 흐름 속에서 어떤 결합되고 통일된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냥 흘러가버린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 않고 머무르는 하나의 중심이 있기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이어지는 낱낱의 관념들이 그냥 등장했다 사라지지 않고, 붙잡히고 서로 결합되어 어떤 통일된 의미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자아’라고, 또는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의 흐름은 매 순간 달라지지만, 나는 언제나 나로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머무르는 ‘나’는 아무 내용이 없는 공허한 장소입니다. 그 텅 빈 장소에서 온갖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같고 다름을 식별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텅 빈 장소인 나를 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나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설명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동일한 자로서 머무르는 ‘나’를 부정한다면, 시간 속에 흐르는 의식 현상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내가 아니라면 내 마음 속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서로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그럴 경우 우리가 이 사람, 저 사람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인격적 주체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같은 모습의 신체라도 그 속의 마음은 매 순간 달라지는데, 그 달라짐 속에서 자기동일성 속에 머무르는 자아가 없다면, 이 사람 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격적 존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이란 더도 덜도 아니고, ‘나’라는 의식으로 일어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에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는 ‘나’의 의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관찰되는 주체일 뿐 관찰되는 대상으로 자신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흄(D. Hume)은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허망한 말입니다. 공간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허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이 없다면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고 말듯이, ‘나’라는 것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해서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 속에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할 마음의 장소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나 생각의 흐름 자체가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겠지요.

칸트는 모든 의식 내용을 하나의 통일된 의식으로 귀일시키는 이런 ‘나’의 자기의식을 가리켜 근원적 통각(appercep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있음이 이것 저것이라고 지시할 수 있는 ‘있는 것’이 아니듯이, ‘나’의 자기의식 역시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 아닙니다. 있음이 있는 것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지만 있는 것을 동시에 초월하듯이, 나의 자기의식 역시 이것 저것에 대한 대상의식과 더불어 발생하겠지만, 그런 대상의식의 근저에 놓여 있는 근원적 의식인 것입니다.

6. 시간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는 존재자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흐름이 ‘나’라는 자기동일적 의식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그 근원적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나’란 것이 어떻게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져가는 마음 속 모든 생각의 흐름을 서로 결합시키고 통일시켜, 시간을 초월해서 머무르는 일정한 의미체로서의 관념이나 인식으로 맺히게 해주는지, 그런 것들을 우리는 여기서 더 물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형이상학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이 강의에서는, 그 대신 나의 근원적 자기의식이 모든 대상적 의식의 흐름을 통일하는 근거가 되듯이, 사물 그 자체에서도 그런 근원적 통일의 근원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다른 물음을 물어볼 수 있겠습니다. 즉 나의 자기의식이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져가는 마음 속 모든 생각의 흐름을 서로 결합시키고 통일시켜 일정한 의미를 지닌 관념과 인식으로 맺히게 해주듯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무의 심연으로 사라져 가는 사물의 있음을 붙잡아 하나의 지속하는 사물로서 머무르게 하는 어떤 힘이 각각의 사물들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물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대상적 사물이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사물로서 머무르지 않는다면, 사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란 시간 속에서 끝없이 토막 나, 우리는 개별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세계 전체에 대해서도 결코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일정한 인식이나 경험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동일한 사물로서 머무르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선 사람처럼,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시간이 안개구름처럼 흐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상 인식도, 세계 경험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각각의 사물에 대해서도 이것과 저것을 구별할 수 있고, 전체 세계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통일된 경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도대체 시간 그 자체로만 보자면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소멸의 나락으로 떨어져 갈 뿐인 세계가 어떻게 부분적 사물에서나 전체 세계에서 어떤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상상력을 돕기 위해, 이 질문 속에서 시간과 사물과 생각의 관계가 물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말해두고 넘어가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지평이라면,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도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속에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각 사물의 동일성과 연속성의 근거가 무엇인지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근대 독일의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츠(G. W. Leibniz)는 이 문제에 관해 아예 사물과 시간의 관계를 역전시켜 사물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물 속에서 흐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이프니츠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사물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동일한 사물로서 머무를 수 있는지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존재 자체는 시간의 외부에 있고, 도리어 시간이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사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할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사물 자체가 시간의 흐름 외부에 존재한다면, 그것이 이데아처럼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고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삼각형의 개념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므로 시간을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생겨나고 소멸하는 사물이 시간 외부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시, 삼각형의 개념 속에는 그 개념이 언제 생기고 언제 없어질 것인지, 시작과 끝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사물들의 경우에는 그 개념 자체 속에 언제 생겨나고 어떤 변화과정을 거쳐 언제 소멸하는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여 그것이 시간 속에서 보여주는 생성과 변화와 소멸의 과정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원래 그 사물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이 외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삼각형의 개념 속에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지만, 세종대왕의 개념 속에 그가 언제 태어나고 어떤 일을 겪고 언제 사망할 것인지가 어떻게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으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망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B. Spinoza)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듯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영원 전부터 신적 정신 속에서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논리적 근거와 귀결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태종임금이 태어나서 죽고, 세종임금이 태어나서 죽는 것도 영원 전부터 모두 필연적인 인과성 속에서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예정에 의해 영원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나,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과 법칙에 의해 철저히 결정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세상만사가 절대적 정신의 눈으로 보자면 영원 전부터 필연적인 로고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일이 근거와 귀결의 논리적 관계 속에서 결정되어 있다면, 근거가 되는 것이 시간의 지평에서 먼저 출현하고 결과가 되는 것이 나중에 출현할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시간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다만 논리적으로 먼저인 것과 나중의 것이라는 순서에 따라 시간적으로 펼쳐질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태종임금와 세종대왕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왜 무시간적인 논리적 선후 관계로 머물지 않고 시간적인 선후 관계로 펼쳐지는 것일까요? 삼각형의 본질과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도 논리적인 함축의 관계에 있지만, 그것이 시간적인 선후 관계 속에서 뒤따르는 사건들로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종 임금과 세종대왕의 관계도 삼각형의 본질과 그 내각의 합처럼 무시간적인 논리적 선후 관계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의 머리 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한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사변이 부질없다 생각하여, 시간이 아예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주관적 형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존재 그 자체는 시간 외부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흐르는 대상은 우리의 감각에 지각된 대상이겠지요. 그렇다면 지각된 대상이 그냥 시간이라는 형식 속에서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고 그냥 무차별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이것 저것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특정한 대상으로 지각되고, 더 나아가 그 대상들 사이의 합법칙적인 관계가 인식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칸트는 우리의 마음이 시간 속에서 지각된 감각의 흐름 속에서 그렇게 흘러가는 감각 표상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대상의 표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들은 마음의 근원적 작용에 의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그냥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대상으로 맺어진다는 것이지요.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마음의 표상(representation)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표상이란 마음이 생각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없다면 표상도 사라지고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법칙과 질서는 마음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칸트의 세계관은 서양 역사에서 인간의 자부심과 긍지가 가장 드높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답게, 인간의 정신을 모든 존재의 으뜸으로 드높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 앞에서 바보같은 질문을 하자면, 시간이 마음이 대상을 감각하는 형식이라면,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는 과연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시간과 공간이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는 형식이라면 인간이 아직 존재하기 전에는 세계는 공간 속에 있지도 않고 시간 속에서 지속하지도 않았다는 말일까요? 칸트는 이런 바보같은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이런 대답 없는 물음은 그만 던져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존재의 자기거리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있음과 없음의 공속을 주제 삼아,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머무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머무른다는 것은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자는 또한 그런 없어짐 속에서도 동일한 그 존재자로서 머무릅니다. 그렇다면 존재자가 끊임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없어져 갈 때, 그 소멸의 흐름에서 동일한 사물로서 또는 동일한 대상으로서 머무르는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고 동일한 사물이 한편으로는 소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한 사물로서 머무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대표적인 대답을 몇 가지 살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 아니라는 것은 제가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천 년 철학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신비는 여전히 깊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 건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도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디고

    쉴 곳 없고

         고뇌하는 인간들

            눈먼 채 시간에서

                  시간으로 떨어져내리도다.

                     마치  물줄기  절벽에서

                        절벽으로 내동댕이쳐져

                            해를 거듭하며 미지의 세계로 떨어져 내리듯이”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의 운명의 노래」 중에서

                      [장영태 옮김, 『횔덜린 시전집』, 1권, 책세상,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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