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싫다는데 '장시간 노동' 미련 못 버린 정부
특정 직종과 업종 ‘주 60시간 근무’ 추진
3월 69시간제 된서리 뒤 또 ‘답정너’ 설문조사
대다수 국민 “주 52시간제 안착 집중할 때”
현재 한국인 근로시간 OECD 국가 중 5위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결과와 후속 정책 방향을 13일 공개했다. 업종과 직종의 특성에 맞춰 연장 근로 도입 여부를 결정하되 최종 방안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추후 확정한다는 게 골자다.
정부는 설문 결과에 따라 제조업과 생산직 등 특정 분야부터 주 60시간 이내 한도로 연장 근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근로시간 유연화를 빌미로 장시간 노동하는 근로시간 개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지난 3월 '주 69시간 근무제'를 내놓았다가 된서리를 맞은 데다 내년 총선이 5개월도 남지 않아 여론이 좋지 않은 근로시간 개편을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도 "일방적인 노동시간 개편 추진은 어렵다"고 했다.
이번 설문조사와 후속 정책이 구체적인 내용 없이 막연히 방향만 제시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도 정책 결정을 위해 5억 원 넘는 예산을 들여 수 개월간 설문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8월 근로자 3839명, 사업주 976명, 일반 국민 1215명 등 총 6030명을 대상으로 근로시간과 관련해 대면 설문조사를 했다.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가 연장근로 단위를 현행 주 단위에서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하는 데 동의했다. 바쁠 때 더 일하고 바쁘지 않을 때 덜 근무하되 연장 근로시간을 주 평균 12시간 이하로 하자는 것이다.
연장 근로 확대가 꼭 필요한 업종이나 직종에 적용하자는 질문에는 근로자 43.0%, 사업주 47.5%, 국민 54.4%로 동의율이 더 올라갔다. 연장근로 단위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업종으로는 제조업, 직종으로는 설치와 장비, 생산직이 가장 많이 거론됐다. 근무 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로 문항을 만들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 한도를 ‘주 60시간 이내’, ‘64시간 이내’, ‘64시간 초과’ 중 택하게 한 문항에서는 근로자 75.3%, 사업주 74.7%가 60시간 이내를 선택했다. 반면 최대 근무 시간 상한이 64시간을 초과해야 한다는 응답은 근로자의 0.5%, 사업주의 0.7%에 그쳤다. 지난 3월 정부가 내놓은 주 최대 69시간제 개편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다시 한번 보여준 결과다.
정부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노사정 대화를 통해 세부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특정 직종과 업종에 우선 근로시간 월 단위로 조정해 주 60시간 이내로 연장 근로를 허용하는 안을 검토하되 장시간 근로와 노동자 건강권 등 안전장치를 두겠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한국노총이 13일 대통령실 요청에 응해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다시 참여하기로 했으나 장시간 노동의 빌미가 될 수 있는 근로 시간 개편이 정부 뜻대로 추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주 최대 근무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근로시간을 개편했을 때 나타날 부작용은 현행 포괄임금제와 탄력근로제의 악용 사례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포괄임금제는 근로 형태나 업무 성격상 추가 근무수당을 정확히 집계하기 힘든 상황에서 노사 합의에 따라 수당을 급여에 미리 포함해 지급하는 제도다. 탄력근로제는 특정 기간의 근무시간을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있는 제도인데 단위 기간의 평균 근로시간은 주 52시간 이내로 맞춰야 한다.
문제는 이들 제도가 현장에서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을 하고도 수당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고용노동부는 13일 근로시간 개편 방향과 함께 올해 1~8월 포괄임금 오남용 의심 사업장에 대한 감독 결과도 발표했다. 총 87개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 결과 64곳이 포괄임금을 이유로 총 26억3000만 원 상당의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근로시간 연장 한도를 위반한 사업장도 52곳에 달했다.
한국은 주 52시간제 실시 이후 평균 노동시간이 줄고 있으나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긴 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 근로자 중 주업과 부업을 합친 주당 실근로시간이 48시간이 넘는 근로자 비중은 지난해 기준 17.5%였다. 같은 기간 유럽연합(EU) 국가는 주 49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 비율이 7.3%에 불과했다. 프랑스가 10.2%, 이탈리아 9.4%, 벨기에 9.3%, 스웨덴 7.5%, 독일 6.0% 등이다.
일본(15%)과 미국(14%), 호주(12%), 영국(11%) 등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다른 국가들도 장시간 근로 비율이 낮았다.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으로 범위를 확대해도 한국의 근로 시간은 짧지 않다. 국제노동기구(ILO) 웹사이트의 근로 시간 통계에 따르면 주당 49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자 비율에서 한국은 전체 약 150개 국가 중 70위권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901시간으로 38개 회원국 5위에 올랐다. OECD 회원국 평균은 1752시간이었다. 한국노총은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개편에 대해 “주 52시간제가 현장에 잘 정착하고 있고 일부 업종에 애로사항이 있으면 바로잡아 전반적으로 주 52시간제를 안착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지, 애로사항이 있다고 장시간 근로의 길을 터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