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비극 속에 커지는 인종주의 위험성
아랍인·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증오범죄의 증가
팔레스타인 생명은 이스라엘보다 덜 중요하다?
인종·국경에 따른 인권과 국제법 선택적 적용
'이스라엘 비판 = 반유대주의' 낙인과 마녀사냥
학살 외면하고 군사적 성과 칭송하는 조선일보
문제는 유대인 아닌 이스라엘과 아파르트헤이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과 파괴가 벌써 한 달을 넘어서고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지난 한 달 동안 이스라엘군은 매일 180명씩 총 55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아동을 죽였다. 사망한 숫자뿐 아니라 파괴된 건물과 잔해 밑에 실종된 아동과 굶주림과 각종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는 아동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욱 커진다.
가자지구는 지금 식량뿐 아니라 무엇보다 물이 고갈되면서 시민들이 폭격이 아니더라도 산 채로 말려 죽어가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대통령 헤르초크는 “가자 주민들은 다른 정권 하에서 좋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막힌 말인가? 가자지구가 석기시대로 돌아가고 주민들은 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폭격과 대학살 속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인종주의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백인 우월주의와 아랍인,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인종주의이다. 이런 인종주의의 가장 극단적 사례는 3주 전에 시카고에서 한 백인 집주인이 “모든 무슬림은 죽어야”한다면서 세입자의 자녀인 팔레스타인 6세 소년을 무려 26번 칼로 찔러서 죽인 경우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형태가 아니어도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는 서구 선진국이나 그 주변부 나라들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본값이어서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보이지 않게 계속 작동하고 있다. 3주 만에 벌써 가자지구에서 4000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이 죽었지만, 서방 정부와 언론이 그것을 외면하거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은 인종주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미국, 유럽, 이스라엘에서 테러 등으로 시민과 아이들이 죽었을 때 이들이 보여 온 커다란 슬픔이나 분노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아랍인, 무슬림, 유색인의 생명은 같은 값어치를 가지지 않는다는 속마음의 드러냄이다. 생명의 죽음에도 얼마만큼 슬퍼하고 분노할지 서로 다른 등급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랍국가 중 하나인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아랍 세계가 듣고 있는 메시지는 크고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인의 생명은 이스라엘인의 생명보다 덜 중요하다. 국제법의 적용은 선택 사항이다. 인권은 국경, 인종, 종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방 정부와 언론들은 이스라엘의 폭격과 학살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문제였다는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라고 낙인찍어서 입을 막고 억누르려는 태도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영국 노동당의 좌파 지도자 제레미 코빈이 그런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돼 왔다. 코빈은 현재 영국 주류 정치뿐 아니라 노동당에서도 추방당한 처지에 있다.
코빈은 급진적 좌파로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과 점령을 비판했을 뿐인데, 영국의 권력자들은 그것에 '반유대주의'라는 낙인을 찍고 누명을 씌워서 고립시키고 마녀사냥 했다. 그런 권력자들이야말로 영국의 브렉시트 과정에서 소수인종과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 선동을 부추겨 왔다는 점에서 더 기막힌 적반하장의 공격의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도 팔레스타인계 이민자 후손인 라시다 탈리브 하원의원이 미국 의회에서 징계를 당했다. 이스라엘의 폭격과 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던 탈리브가 집회에서 외친 ‘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구호가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억지 혐의가 이유였다.
라시드 탈리브는 “저는 의회에서 일하는 유일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며, 그 어느 때보다 저의 관점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제게는 다르지 않게 들립니다. 왜 여러분에게 다르게 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며 항변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명백히 작동하는 인종주의는 국내에서도 <조선일보>의 보도와 지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이기는 전쟁이 더러운 평화보다 낫다”고 하면서 지난 한 달 동안 명백히 이스라엘의 편에서 지금 상황을 보도해 왔다.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대학살을 외면하고, 이스라엘군의 야만적 전쟁범죄를 덮어주면서, 반대로 이스라엘군의 군사적 성과를 함께 기뻐하고 칭송하는 태도가 이토록 노골적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장면이 사진 조작이었고, 폭격으로 사망한 소녀가 알고 보니 인형이었다는 식의 기사를 통해서 모든 게 하마스의 사기극이라는 식의 인상을 주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져와 진실을 덮는 것은 ‘탈진실 시대’의 대표적인 가짜뉴스 수법이다.
결국 여기서도 확인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의 생명은 이스라엘의 생명보다 덜 중요하고, 국제법의 적용도 선택적이고, 인권은 국경과 인종에 따라 다르다는 인종주의적 시각이다. 이것은 최근까지 <조선일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폭격을 맹비난하던 것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결국 <조선일보>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과 평화가 아니라 희생자가 어느 편이냐와 한미동맹이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일부 진보 언론이 이번 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하마스의 편에 서 있다”고 공격했다. 서방의 정부나 언론이 이스라엘의 폭격에 반대하며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운동을 ‘하마스 편’이나 ‘반유대주의’라고 매도하는 수법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서 봐야 할 것은 실제로 진보진영 일부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목소리들이 작게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교활한 유대인들이 유대 금융자본과 로비를 통해 미국과 세계를 조종한다'는 식의 접근을 택한다. 아무리 그 심정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인종주의적으로 들리는 게 사실이고 옳은 태도가 아닌데,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런 태도는 '심지어 좌파조차도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며 시온주의 우파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한다. 둘째, '반유대주의'를 빌미로 좌파를 탄압하고 억압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근거를 제공해 준다. 바로 코빈이 이런 희생양이 된 경우이고, 지금 미국은 이스라엘의 대학살을 지지하면서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도, 이스라엘이 지금 저러는 것도 유대인의 인종적 특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적 이윤과 제국주의적 패권이 그것을 필요로 했다. 그것이 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 만들었고, 어느 시기에는 팔레스타인 억압의 가해자로 만든 것이다.
폭격과 학살이 유대인들의 인종적 특성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미국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도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유대인을 문제삼는 접근은 이런 이들에게 용기가 아니라 상처를 줄 뿐이다.
실제로 요즘, 박노자 교수의 SNS에 댓글을 달아서 ‘시오니스트’라고 거친 표현으로 비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노자 교수가 하마스의 정치적 방향과 전술을 비판한 것을 문제 삼는데, 이것은 전형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지=하마스 지지’라는 우파 지배자들의 태도의 뒤집힌 버전이다. 이것의 자매품이 ‘이스라엘 비판=반유대주의’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의 문제는 유대인이라는 민족, 인종, 종교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 홀로코스트 이후에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해졌기에 진보좌파는 반유대주의의 일부나 흔적이라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화살은 언제나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를 추구하는 이스라엘 국가와 지배자들, 그들을 돕는 강대국이라는 정확한 과녁을 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