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실리 모두 잃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통합
EU 승인받기 위해 알짜노선·사업 포기
국내 항공 자산과 산업 가치 훼손 뻔해
“한진그룹 총수 경영권 방어 수단 전락”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 매각은 배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합병(기업결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유럽연합(EU) 경쟁 당국의 문턱을 넘기 위해 주요 장거리 노선의 슬롯(이착륙 허용 횟수)을 포기하고 아시아나항공의 알짜 사업인 화물 부문까지 매각해야 할 처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지난 2020년 11월 합병 결정을 발표하며 두 항공사의 통합으로 아시아나항공의 부실 문제가 해결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형 항공사가 탄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합병 과정에서 수익성이 높은 노선을 내주고 코로나19 팬데믹 때 효자 노릇을 했던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까지 매각하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을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 노조와 전임 사장 등 회사 안팎에서 화물사업 매각을 전제로 한 합병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 이사회는 오는 30일 회의에서 이 사안을 다룰 낼 예정인데 화물사업 분리 매각 결정이 나오면 노조는 이사진을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할 것이라고 한다. 아시아나항공 전임 사장들도 이사들에게 화물사업 매각 건의 부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화물사업 매각이 아시아나항공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국내 항공 산업에 손실을 입히고 국부 유출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항공은 이달 말까지 EU 경쟁 당국이 요구한 독점 해소 방안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바르셀로나, 로마, 파리 등 유럽 주요 노선의 슬롯을 반납하고 화물사업을 분리 매각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매각을 승인해야 한다. 대한항공 대주주인 한진그룹 조원태 회장은 “무엇을 포기하든 합병을 성사시키겠다”고 했다. 산업은행도 “합병이 무산되면 추가 자금 지원은 없다”며 아시아나항공 이사진을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다 보니 아시아나항공 이사회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 예단하기 어렵다. 매각 결정이 나면 이사진이 배임 논란에 휩싸일 것이고 매각 건이 부결되면 EU로부터 합병을 승인받지 못할 확률이 높아진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이 딜레마에 빠진 것은 산업은행의 안이한 판단에서 비롯됐다. EU와 미국, 일본 등 주요국 경쟁 당국의 승인 절차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특히 EU의 합병심사를 통과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됐다. EU는 지난해 초 선박 시장 독점 문제를 제기하며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을 무산시켰다. 지난 2021년에는 캐나다 1위와 3위 항공사인 에어캐나다와 에어트랜젯의 합병을 불허했다.
산업은행과 대한항공은 각각의 필요성 때문에 무리하게 통합을 추진한 측면도 있다. 산업은행은 부실이 쌓이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을 빨리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대한항공을 끌어들였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경영권 분쟁에 빠진 조원태 회장의 백기사를 자청했다.
당시 산업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2조5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한 뒤 아시아나항공 신주와 영구채 인수에 각각 1조5000억 원과 3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산업은행은 대한항공 지주사인 한진칼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5000억 원, 교환사채에 3000억 원을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매우 특이한 방식의 통합 절차다. 아시아나항공 같은 부실기업을 다른 기업에 매각하는 방법은 대략 두 가지다. 몸집을 줄이는 구조조정으로 경영을 정상화해서 기업 가치를 올린 뒤 매각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산업은행이 애초 계획했던 것처럼 HDC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에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했다면 이런 방식이 됐을 것이다.
또 하나는 부실한 상태 그대로 매각하는 것이다. 채권단은 손쉽게 채권을 회수할 수 있으나 매수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대한항공은 구조조정이 전혀 안 된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로 했다. 그 배경에는 대한항공 대주주인 한진칼의 경영권 분쟁이 있었다. 조원태 회장은 당시 한진칼의 우호 지분이 41.2%였고 분쟁 상대인 사모펀드 KCGI와 반도건설 등으로 구성된 3자 주주연합은 45.2%(신주인수권제외)로 우위에 있었다.
산업은행이 5000억 원을 투자해 한진칼 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하면 지분을 10.7% 보유하게 되면서 한진칼의 지분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 즉 3자 연합은 한진칼의 신주발행으로 지분율이 40.4%로 낮아지고 산업은행 지분을 조 회장의 우호 지분으로 분류하면 조 회장 측 지분은 47.5%까지 상승한다. 조 회장은 국내 항공시장에서 대한항공의 독점력을 강화하고 경영권 분쟁도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실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산업은행이 두 항공사의 통합 방식을 발표했을 때 대기업 총수에게 특혜를 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산업은행은 한진칼과 대한항공 경영진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한진칼에 대한 투자 조건으로 조 회장의 한진칼 지분을 담보로 받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시너지 효과가 진정한 통합 명분이라고 강조했다. 중복 노선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고 항공 시간을 다양화하면 국내 항공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화물사업이 통합되면 인천국제공항 환적 화물 운송을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고 외형이 커지면서 화물 원가 인하 효과로 수출 기업의 물류비용이 절감될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알짜노선을 반납하고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을 매각하면 이 말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대한항공 경영진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합병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총수의 경영권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합병이 무산돼 산업은행이 한진칼 지분을 처분하면 조 회장은 다시 경영권 위협을 받을 수 있다. 통합 작업을 진두지휘한 산업은행도 합병 무산에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알짜 사업을 매각하고 주요 항공 노선을 포기하면서까지 산업은행과 대한항공이 의기투합해 합병을 밀어붙이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아시아나 화물사업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1년 매출이 3조 원을 넘었다. 빈사 상태였던 여객 사업 부문을 상쇄했다. 지금은 다시 매출이 줄었으나 사업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게 바람직하다. 지금이라도 산업은행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