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주권 상실한 유럽"…대미 종속·경제피해 부각
"내일 가스 공급 가능…워싱턴 보스 허락 않을 것"
"유럽, 제재 동참해 경쟁력 약화…알면서 발등 찍어"
유럽번영 요인, 값싼 러시아 에너지·중국 시장 지목
우크라 영토 거친 가스 수송과 수수료 지불 재확인
"상당수의 유럽 지도자들은 유럽이 주권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경제 엔진인 독일에서 지도급 정치인들은 독일이 1945년 이후 완전한 의미에서 주권국가는 아니었다고 반복해서 강조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의 주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지난 5일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발다이 국제 토론클럽' 회의에서였다.
그는 연설과 뒤이은 장시간의 문답 과정에서 작심한 듯 유럽의 주권 상실과 대미 종속 이슈를 대러시아 제재 동참에 따른 유럽의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며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여기엔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견고한 반러시아 서구동맹을 균열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작년 2월 자신의 '불법 침공'으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20개월 가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서구 진영이 석유·가스 수출금지 등 강고한 대러시아 제재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 경제는 성장하고 유럽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면서 그 주요 원인으로 '주권'을 소환했다.
유럽번영 요인, 값싼 러시아 에너지·중국 시장 지목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유럽의 번영을 가능하게 만든 요소들은 많다. 첨단기술, 근면하고 숙련된 노동계급, 뛰어난 인재들이 당연히 큰 역할을 했지만,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 공급과 거대한 중국 시장 진출 또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 유럽 경제의 침체 요인 중 하나로 푸틴은 제재에 동참하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을 끊고 미국 업체들로부터 30%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것을 꼽았다.
푸틴은 "주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유럽은 자신들의 '군주' 뒤에 줄 서고 그의 정책에 따라 러시아 제재 정책으로 전환했다"며 "유럽은 이런 정책이 자신에게 해가 될 걸 알면서도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푸틴은 "그들은 공급자의 수를 줄이고 몇몇 공급자로부터 훨씬 비싸게 사고 있는 반면, 우리는 다른 나라에 할인해서 팔고 있다"며 높은 에너지 가격을 지불하는 유럽의 상대적 경쟁력 약화를 지적했다.
그는 "유럽 경제의 경쟁력이 추락한 데 반해, 아시아를 포함해 다른 나라들은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 주요 경쟁자인 미국의 경쟁력이 급등했다"면서 "주권의 일부를 상실한 탓에 유럽은 자기 의지로 제 발등을 찍는 결정들을 해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유럽, 제재 동참해 경쟁력 약화…알면서 발등 찍어"
작년 9월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송하는 노르트스트림2 폭발과 관련해 그는 "누가 혜택 봤는지를 보면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다"면서 "유럽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는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여기에 이해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푸틴에 따르면, 노르트스트림2 라인 중 하나는 건재하고 유럽에 275억 ㎥의 가스 제공 능력이 있다. 따라서 독일 정부의 결정만 있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스 공급이 가능하다는 그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해치면서도 '워싱턴의 보스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설에서도 푸틴은 미국 주도의 '블록(진영)'이 구성하는 개별국가엔 "의무로 짜인 새장"(a cage of obligations)이라고 표현하고 "블록은 개별국가의 권리를 제한하고 자기식으로 발전할 자유를 제약한다"고 말했다.
청중과의 문답에서는 "주권은 다차원적 개념이며, 군사와 안보적 이슈일 뿐 아니라 경제 등 다른 분야와도 관련된 이슈"라고 덧붙였다.
푸틴, 미국엔 적대·유럽엔 온건…동맹 균열 시도
그의 발다이 발언을 살펴보면, 미국에는 철저히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미국이 2014년 쿠데타를 지원해 우크라이나 위기를 유발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에 비해 유럽을 향해선 비판을 자제하고 비교적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 '대미 종속'을 거론해 유럽의 자존심을 건드림으로써 서구동맹의 균열을 유도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러시아와 유럽은 "기독교 문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언제든 관계 개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푸틴은 "우리는 창문이든, 대문이든 어떤 것도 닫지 않는다. 유럽이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유럽에 다가가지도 않는다. 유럽이 원한다면, 함께 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치열하게 교전 중이지만 우크라이나 영토를 통한 가스 수송과 통과 수수료 지불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했다. 푸틴은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거쳐 고객들에게 가스를 보내고, 그 통과 수수료를 우크라이나에 지불하고 있다며 "돈에선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통과 수수료를 받아 행복하다. 그러면 된 것이다"라고 했다.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 두고봐야겠지만, 푸틴은 서구의 강력한 제재에도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 3분기 예산상의 흑자가 6600억 루블(8조8000억 원)에 이르고, 이를 포함해 올해에는 예산상으로 1% 적자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노동력 부족과 5.7%에 이르는 인플레가 문제이지만, 제재 와중에도 농식품 생산과 제조업, 공급망 재구축 등의 작업이 진행 중이고 가처분 소득도 증가하고 있다는 게 그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