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관계 왜 여기까지…윤석열 정부에 일차적 책임

윤, 북‧러 군사협력 "한국에 직접적‧실존적 위협"

윤, 유엔연설서 중국 비판 없어…북‧러 분리 시도

러시아 "한국 안보에 실질 위협은 한미 군사 활동"

2023-09-22     이유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상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4일 보도했다. 2023.9.14. 연합뉴스

"러시아와 북한 간의 군사협력에 관한 주장은 근거 없는 추측이다." "미국과 한국 언론에 의해 증폭되는 해당 주제에 대한 추측성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19일 외교부의 초치를 받은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가 "북한과의 군사협력 움직임을 즉각 중단하라"는 장호진 외교 1차관의 요구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러시아 대사관은 밝혔다.

그러면서 쿨릭 대사는 "러시아는 우호적 이웃이자 오랜 파트너인 북한과의 상호 유익한 관계 발전과 관련되는 것을 포함해 맡은 바 모든 국제의무를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장 1차관은 쿨릭 대사를 불러 북한과의 군사협력 움직임에 항의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한 상임이사국이자 국제 비확산 체제 창설을 주도한 당사국 중 하나인 러시아가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진행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13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무기 거래 등 군사협력 합의가 있었는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항의와 경고에 나선 것은 외교 관례상 매우 이례적이다. 윤석열 정부가 설마설마했던 북‧러 밀착과 군사협력 가능성에 잔뜩 긴장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제78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23. 09. 20 [UPI=연합뉴스]

윤, 북‧러 군사협력 "한국에 직접적‧실존적 위협"

이런 기류는 윤 대통령의 20일 뉴욕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증폭됐다. 여기서 윤 대통령은 "북한이 러시아에 재래식 무기를 지원하는 대가로 대량살상무기(WMD) 능력 강화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얻게 된다면"이라고 말해 북‧러 간 '위험한 거래' 가능성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도발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과 동맹, 우방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 그는 "대한민국 평화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실존적인 위협일 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 평화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러시아를 겨냥해선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 다른 주권 국가를 무력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고, 무기와 군수품을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정권으로부터 지원받는 현실은 자기 모순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한과의 군사협력에 일정한 선을 긋고 있는 데다가 추진하더라도 '국제적 의무'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15일 "군사기술 협력 분야를 포함한 어떤 분야의 협정도 서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거래 합의'를 전제로 한 윤 대통령의 발언은 너무 단정적이고 앞서 나간 셈이다.

장호진 1차관은 한술 더 떴다. 그는 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WMD 등 러시아의 대북 군사협력 물증이 확인될 경우 "안보리 결의가 현재 작동하지 않지만, 미국이나 일본, EU(유럽연합) 등 서방 진영 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나라들과 제재 공조를 할 수도 있고 당연히 독자 제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가능성에 대해서는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윤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 대해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21일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논평에서  "우리는 이를 미국 주도의 서방 집단이 벌이는 공격적인 대러시아 하이브리드 전쟁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도발적이고 대결적인 성명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안드레이 보리소비치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가 지난 21일 서울 정동 주한러시아 대사관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4.21. 김진호 에디터

러 "한국 안보에 실질 위협은 한미 군사활동"

러시아 측은 현 한반도 위기의 원인에 대한 윤 정부의 진단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한반도는 물론 대한민국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은 무력으로 북한을 억압하겠다는 목표로 한반도에서 한미 양국이 벌이는 맹렬하고 불균등한 군사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한국 측에 상기시키고자 한다"라고 말해 북한보다 한‧미에 화살을 돌렸다.

따져봐야 할 것은 자초지종이다. 1990년 수교 이후 30여 년 한때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던 북한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한국에 공을 들였던 러시아의 태도가 왜 지금처럼 한국에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돌변했으냐 하는 부분이다. 어느 쪽이 이런 상황을 촉발했느냐다.

뒤얽힌 역사를 고려해도 가장 큰 잘못은 주권 국가를 불법 침공한 러시아에 있다.

그러나, 한‧러 관계로 범위를 좁혀 보면 윤 정부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제사회의 대러 규탄 및 제재 움직임과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에 불가피하게 가담해도, '남의 나라 일'인 만큼 일정한 거리를 뒀어야 했는데 되려 발 벗고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윤 정부는 작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와 구호물자 등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군사 분야 지원에 동참했다. 다음 달 러시아 은행 거래 중지와 57개 수출 통제 품목 고시에 이어, 지난 2월에는 741개 품목을 추가했다. 이에 러시아는 한국을 일본, EU 회원국과 함께 '비우호국 명단'에 올렸다.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키이우 성 소피아 성당 앞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서로 팔을 마주잡고 있다. 2023.7.16. 대통령실 연합뉴스

한‧러 관계 왜 여기까지…윤 정부에 일차적 책임

한‧러 관계의 파열음이 본격적으로 터진 것은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지원 목적으로 155mm 포탄 50만 발을 미국에 대여하면서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발다이 클럽 회의 연설을 통해 '무기·탄약 지원 시 한·러 관계 파탄'을 한국에 경고한 바 있다.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4월 24일 윤 대통령은 로이터 인터뷰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조건부' 군사 지원 의사를 밝혀 양국 관계의 긴장을 한껏 끌어 올렸다. 러시아의 △ 대규모 민간인 공격 △ 대량 학살 △ 심각한 전쟁법 위반 등을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시사한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분쟁 개입" "적대행위"라고 거세게 반발하면서 한국이 실제 행동에 옮길 경우 대북 무기 지원까지 경고했다. 최근 북‧러 밀착은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후에도 윤 대통령은 추가로 우크라이나에 지뢰 제거 장비와 긴급 후송 차량 등 비살상 군사 장비를 지원했다. 특히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액에 맞먹는 최소 25.5억 달러(약 3조4000억 원)의 재정을 2025년 이후까지 초특혜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결정적 사건 중 하나는 윤 대통령이 휴전 중인 분단국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지난 7월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교전 중인 우크라이나를 직접 찾은 일이다. 그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후 "생즉사 사즉생"을 외치며 함께 싸워나가자고 '기염'을 토했다. 일련의 사례들을 보면, 북‧러 밀착에 따른 한반도 안보 위기는 윤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18일 지중해 섬나라 몰타에서 회동하고 있다. 2023 09. 18. [신화=연합뉴스]

윤, 유엔연설서 중국 비판 없어…북‧러 분리 시도

이번 윤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중 눈에 띄는 대목은 '중국'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향후 북‧러 간 '위험한 거래'가 현실화할 때에 대비해 중국을 그들과 분리해 놓겠다는 판단에서다. 중국을 설득해 북‧러의 군사협력을 견제토록 하는 한편, 실행에 옮겼을 때 북·러를 고립시키려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년 5월 집권 이후 '가치 이념 외교'를 내걸고 반중국 전선의 행동대장을 자임했던 윤 대통령은 최근 들어 미국의 대중 기류가 변화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중국에 화해의 손짓을 하고 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재개를 위해 오는 26일 서울에서 3국 고위급회의(SOM)를 개최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중 양국 간 고위급 접촉면도 확대해 나간다는 게 윤 정부의 구상이다. 그 일환으로 이날 해임안이 가결된 한덕수 국무총리를 23일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정부 대표 자격으로 파견한다.

중국은 한국이 내미는 손을 굳이 내치지는 않고 있다. 말이 아니라 윤 정부의 향후 행동을 지켜보겠다는 게 중국의 기본적인 태도다.

중국 당국을 대변하는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20일 자 사설에서 한‧중‧일 3자 협의와 관련해 "일본과 한국은 어렵게 마련된 '재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북‧러를 떼어놓으려는 윤 정부의 시도가 성공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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