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게 설계된 벤처창업자 복수의결권 제도

벤처기업법 개정안 시행령 21일 입법예고

100억 이상 투자유치·지분 30%이하 하락 때 허용

IPO·투자유치 때 더 유용한데 창업초기에 초점 둬

무능한 창업자 의결권 남용가능성 고려 안해

2023-08-21     장박원 에디터

벤처기업 창업자의 복수의결권을 허용하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 개정안) 시행령’이 21일 입법예고 됐다. 핵심 내용은 벤처기업이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려면 창업 후 100억 원 이상 투자받아야 하고 마지막에 받은 투자는 50억 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주주의 친인척 등 특수관계인 투자는 합산되지 않는다.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벤처기업은 그 사실을 주주에게 알리고 발행 상황을 1개월 내 중소기업벤처부에 보고해야 한다. 관련 규정을 위반하면 행정절차 기본법에 따라 중소벤처기업부가 직권으로 조사하고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시행령은 10월 2일까지 42일간 입법예고 되고 오는 11월 7일부터 법 시행에 들어간다.

 

스타트업 지원센터인 마포구 프론트원에서 지난 6월 8일 열린 복수의결권 안착을 위한 벤처기업계 민당정 현장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에서는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국회 산자중기위 간사인 한무경 의원, 정부에서는 중소벤처기업부 이영 장관이 참석했다. 2023.6.8. 연합뉴스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상법상 1주 1의결권에 대한 특례를 부여하는 것이라 오랫동안 논란이 됐다. 벤처기업 창업자는 하나의 주식에 2~10개의 의결권이 부여된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게 법안의 골자다. 여기서 창업자는 자본금을 출자해 법인을 설립한 발기인으로 지분을 30% 이상 소유한 최대 주주를 말한다. 벤처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투자 유치로 창업자 지분이 30% 이하로 하락하거나 최대 주주 지위를 상실할 상황에서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최대 주주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만큼 엄격한 발행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려면 발행주식 총수 4분의 3의 동의가 필요한 ‘가중된 특별결의’가 필요하다. 복수의결권 주식은 10년 존속 기한이 지나면 보통주로 전환된다. 창업자가 이사직을 상실하거나 상속과 양도할 때, 기업이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편입되면 즉시 보통주로 전환된다. 편법 경영권 승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다. 이외에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비상장 벤처기업이 상장되면 기존에 설정돼 있던 존속 기한과 상장된 날부터 3년 중 짧은 기간으로 존속 기한이 바뀐다. 이사 보수와 책임 감면, 감사나 감사위원 선임 및 해임, 자본금 감소 결의, 이익 배당, 해산 결의 등 주주권익이나 창업자의 사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안건은 복수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벤처 업계는 오래전부터 복수의결권 도입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벤처기업이 성장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한데 투자유치로 창업자 지분이 희석되면 경영권을 잃을 수 있고 기업의 영속성이 깨질 수 있다는 이유를 꼽았다. 그러면서 벤처 창업자의 기업가정신을 꺾지 않으려면 복수의결권 도입이 절실하다는 논리로 정치권을 설득했다.

벤처기업법 개정안 논의는 2020년 21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총선 공약으로 ‘벤처 4대 강국 실현’을 발표했는데 그 안에는 창업자의 제한적 복수의결권 도입 방안이 포함됐다. 그해 10월 중소벤처기업부는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유사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도 많았다.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2021년 12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과했다. 그 이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부의됐고 1년 5개월간 계류돼 있다가 지난 4월 26일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자료 : 경제개혁연대

정부와 정치권, 재계는 벤처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겼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주주 평등의 원칙을 위배할 뿐 아니라 창업자의 지배권 강화와 편법 경영권 승계 등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우려를 반영해 개정안에는 복수의결권 오남용을 막을 여러 규정을 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법 시행 이후 실제로 복수의결권 발행 기업이 많지 않으면 재계와 벤처 업계는 추가 규제 완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개혁연대는 “복수의결권 주식이 보통주로 강제 전환돼 지배권을 잃을 창업자들은 일몰조항 삭제를 위해 결사적으로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로비할 것이 예견된다”며 “한국의 정치경제 환경을 고려했을 때 현재 개정안의 안전장치들이 추풍낙엽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참여연대는 “대주주 지배력 공고화와 소수 주주와 투자자의 권리 침해로 이어지면 오히려 벤처기업 투자유치를 방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권오인 경제정책국장은 “비상장 벤처기업은 지금도 주주 간 계약 등을 통해 경영권 보호가 가능하다”며 “법 시행 후 시간이 흐르면 복수의결권 일몰조항 삭제를 요청해 발행 요건을 무력화시키려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복수의결권 발행 요건이 현실과 괴리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복수의결권은 창업 초기가 아니라 회사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기업공개(IPO)와 투자유치 등으로 창업자 지분이 희석될 때 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창업 초기에 맞춰 설계돼 있다. 이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 허용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벤처기업 창업자가 모두 기업가정신이 투철하고 유능한 경영자는 아니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복수의결권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는 미국도 무능한 창업자가 복수의결권을 남용해 기업을 위기에 빠뜨린 사례가 적지 않다. 그렇게 되면 투자자와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소액주주 단체들이 복수의결권 도입을 반대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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