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국제정세관서 비롯된 한반도 전쟁 위기

2023-08-03     조성렬의 전략노트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한반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기념식이 부산과 평양에서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위령탑에 헌화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중국 당정대표단, 러시아 군사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국·후원국들이 둘로 나뉘어 행사를 가짐으로써 서로 세를 과시하려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70년이 되었건만, 전쟁을 법적으로 종식하는 평화협정 논의는 중단된 채 오히려 대립구도가 선명하게 되었다. 북한은 정면돌파전을 선언하며 핵·미사일 개발 등 신형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고, 한국도 역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으며 현무 시리즈를 비롯해 각종 최신무기를 선보이며 군비경쟁에 나서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심각성에 대해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7월 20일 일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는 세계에서 항상 높은 즉응태세를 유지해야 하는 곳 중 하나이며, 상황에 따라 며칠 안에 전쟁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되어버렸다고 경고했다. 한·미와 북한은 상대 탓으로 책임을 돌린 채 무한 군비경쟁의 안보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현재와 같은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국제정세관과 대응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남북한 지도부는 현 국제정세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면서 '힘에 의한 평화'라는 논리로 대결 구도를 심화시키며 군비경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일체의 대화가 중단된 채 정전체제가 공고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6·25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씨가 27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 방문,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유엔군 위령탑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2023.7.27. 연합뉴스

북한에서 정전기념일은 '전승절'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이 전승절 70주년 기념공연을 러시아 군사대표단(왼쪽), 중국 당-정부 대표단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2023.7.27.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남북한, 현 국제구도를 신냉전으로 잘못 인식

김정은 위원장은 202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핵무기 개발과 보유를 확대하고, 자력갱생을 통해 체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중국·러시아와 전략 전술적 협력을 강화해 유엔 경제제재와 국제적 고립을 정면돌파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대북 정책도 신냉전이라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新亞細亞> 2021년 여름)이라는 글에서 “미·중 신냉전은 안보·경제 전반에 걸친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어느 진영에 가담할 것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이념과 가치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밝혀 신냉전 인식을 전제로 진영외교를 정당화했다. 윤석열 정부가 굴욕외교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사를 덮고 한·일,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려는 것도 이런 국제정세관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남북한의 신냉전 인식은 현 국제정세를 과장한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미국은 현 국제정세를 '미·중 전략경쟁'으로 파악하며 친서방진영 국가들의 세를 결집해 '다극화' 저지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6월 28일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미 외교협회(CFR) 연설에서 "미·중 경쟁에 종결점(finish line)은 없다… 장기적인 경쟁이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최근 미국이 탈동조화(De-coupling) 대신에 탈리스크화(De-risking)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러시아도 신냉전이라는 정세인식을 배제하면서 '다극화'를 촉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금년 3월 21일 중·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다극체제가 형성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밝혔고, 푸틴 대통령은 북한에 보낸 '전승절 70주년' 축하문(7.27.)에서 "(러·북) 양국의 연대성은…다극화되고 정의로운 세계질서 확립을 저해하는 서방집단에 맞서 나가는 공동의 이해"라며 현 국제구도가 다극화로 나가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남북한은 판을 주도하는 강대국들의 인식과 달리 신냉전으로 상황을 과장해 놓고 과도한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닉슨 독트린과 미군의 베트남 철수, 중국의 유엔 가입으로 냉전구도가 해체 조짐을 보이자, 국제적 냉전을 구실로 적대적 공존을 이어왔던 남북한 독재정권이 체제 위기를 내세워 1972년 '유신헌법'과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해 정권 연장에 활용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힘에 의한 평화'는 오히려 평화에 역행

남북한은 신냉전을 구실로 '힘에 의한 평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유, 남도 북도 “힘에 의한 평화”…정전 70년 ‘멀어진 평화’) 북한은 일찍이 '평화는 총대로 지켜야 한다'면서 선군노선, 핵 보유로 미국의 북침 전쟁을 억제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김여정 부부장은 7.17 담화에서 "현재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방도는 힘의 지위에서, 충분한 실력 행사로 그들의 강권과 전횡을 억제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같은 논리이다.

윤석열 정부 역시 '힘에 의한 평화'를 내걸며 김정은 정권을 답습하고 있다. 전쟁 재발의 근본원인인 불안정한 정전체제에 대한 극복 노력은 물론 정치적 화해, 군사적 신뢰, 경제적 교역, 사회문화적 교류 등 다방면에 걸친 민족공동체 (재)형성을 통한 실질적인 평화구축을 외면하고 있다.

현 정부는 '평화' 개념을 '힘에 의한 전쟁억제'로 협소하게 인식하면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평화의 제도화' 노력을 방기하고 있다. 역대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서 가운데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했고, 박근혜 정부는 조건부 평화체제의 추진 입장을 밝혔다. 그나마 이명박 정부는 평화체제 대신에 신평화구조를 언급하기라도 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아예 평화체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커다란 국력 격차를 보이고 있는 남북한의 상황으로 볼 때, 북한의 '힘에 의한 평화' 논리는 다분히 수세적이다. 이에 비해 윤석열 정부의 논리는 흡수통일을 겨냥한 공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미 주류학계는 레이건 행정부의 '힘에 의한 평화' 정책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소련이 미국과 군비경쟁하면서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 체제붕괴를 가속화시켰다고 보았다. 국내 일부 전문가들이 남북한의 군비경쟁이 북한의 국력을 급속히 소진시켜 김정은 정권의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브랜즈(H. Brands), 가디스(J.L. Gaddis) 등 미 학계의 최신 연구는 냉전 종식의 원인을 달리 보고 있다.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에 군축을 제의했고 당시 내부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대외환경의 긴장 완화를 원했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호응하면서 미·소 군축회담이 열렸다. 이처럼 소련체제의 붕괴 직전에는 군비경쟁이 아니라 군축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고르바초프의 급격한 개혁 정책을 둘러싼 내부갈등이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의 원인이라고 재평가하고 있다.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5년 만에 방중한 토니 블링컨 장관(왼쪽)이 19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악수하고 있다. 2023.06.19. AFP 연합뉴스

과장된 위협 인식, 과도한 대응이 위기 불러 

윤석열 정부 고위당국자는 국제구도를 신냉전으로 인식하면서 진영을 가르는 기준으로 이념과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윤 정부가 생각하는 이념과 가치는 무엇인가? ‘윤석열 정부의 국가안보전략’(6.7)은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이 시장경제와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이를 영문으로 ‘liberal democracy’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liberal democracy’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정치에서 보수가치로 인식되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영문표기가 The Liberal Democratic Party라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과 미국, 일본, 유럽연합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가치(universal values)는 독재를 배제하되 자유와 평등을 포괄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free democracy, freedom & democracy)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제4조가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가 바로 보편가치인 자유로운 민주주의이다. 헌법에서 굳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liberal democracy’(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협소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국제정세를 신냉전으로 보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 가치외교(value-based diplomacy)를 내걸면서 보편가치가 아닌 보수정당 가치의 공유를 내세우는 것은 국가와 정당의 차이점을 혼동한 잘못된 처사다. 보편가치를 토대로 한 헌법정신과 규범을 왜곡하면서까지 보수정당식 가치의 공유를 진영외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을 낳는다. 과장된 위협인식(신냉전)과 과도한 대응(힘에 의한 평화, 진영외교)이 오히려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국제정세를 직시하고 한국외교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놓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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