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朝暴)' 조선일보라는 폭력
'○폭' 시리즈로 무차별 공세 펴 박멸 근절 시도
주폭 건폭 좌폭 명명으로 낙인-표적 효과 노려
'건폭' 시리즈 성공 자찬?
'건설현장의 불법에 대한 정부의 엄정대응이 건설현장을 바꾸었다'는 조선일보의 지난 3일자 1면 머릿기사는 "정부의 강력한 단속 이후 불법행위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았다"면서 건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른바 건설노조의 불법행위를 ‘건폭(建暴)’이라고 규정하며 건폭과의 전쟁을 먼저 꺼낸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지만 이를 더욱 증폭시키면서 함께 전쟁을 이끌어온 이 신문의 자화자찬에서 잔뜩 고무된 표정이 읽힌다.
'건폭'만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부문에 대해 ‘폭(暴)’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이 신문으로선 이 '승리'로써 자신들의 '○폭' 시리즈의 위력과 효과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을 듯하다.
조선일보의 '○폭과의 전쟁'의 전과(戰果)의 전력은 지난 2012년 5월 31일부터 두 달 넘게 전개한 ‘주폭(酒暴) 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취임하면서 '주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에 맞춘 이 기획의 주창자는 경찰 책임자였지만 연일 지면을 3~5개씩 털어가며 [술에 너그러운 문화, 범죄 키우는 한국]이라는 타이틀로 ‘음주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내보낸 조선일보야말로 주폭 전쟁의 실질적인 사령부이자 주력부대였다.
표적을 정하면 이를 ‘○폭’이라고 명명하고, 그에 대해 집요하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는 이 신문의 특기는 건폭에 이어 다른 곳으로도 뻗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탈원전 재생에너지를 주장하는 이들이며, 시민단체이며,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를 반대하는 목소리이다. 이들에 대해 ‘○폭'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건폭과 같은 규정을 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들을 각각 공격하기도 하지만 한묶음으로 포괄해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바로 '좌폭', 즉 좌파라는 폭력집단이다. ‘좌폭’이라는 명명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건폭에 이은 새로운 ‘○폭'과의 전쟁, 더욱 더 크고 광범위한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폭’이라는 명명을 하는 것은 대단한 낙인과 표적 효과가 있다. 그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단죄효과를 가지며, 때로는 그같은 규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해 과녁으로 삼는 것이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뭔가를 폭력집단 내지 폭력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그만큼 매우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폭’이라는 표적화는 명명 대상을 개선이나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박멸과 근절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이라는 명명의 폭력성
그 같은 신중함이 없다면 ‘○폭’이라는 명명을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폭력적이다. 반폭력이라는 이름의 더 큰 폭력이 된다.
조선일보가 애용하는 이 같은 명명이 필요한 집단들이 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행태의 폭력성이나 사회에 상당한 해악을 미치는 집단으로 대표적인 곳이 2곳이 있다. 그중 하나에 대해서는 이미 그 명명이 일반화돼 통용되고 있다. '조직폭력배'라고 불리는 집단이 그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한때 치안을 불안케 하고 적잖게 기승하던 이 집단은 지금은 그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었다. 반면 다른 하나의 집단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나 그 완강한 기승에서나 오히려 조직폭력에 비해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그 영향의 파급력이나 범위에서 더욱 크지만 정작 ‘○폭’이라는 명명이 이뤄지 않고 있다. 전자의 집단이 조직폭력의 조폭(組暴)으로 불리는 것처럼 후자 역시 '조폭'으로 부를 수 있다. 바로 조폭(朝暴), 즉 조선일보라는 폭력이다. 조선일보가 애용하는 명명법은 그 자신에 대해 쓰여야 한다.
첫째, 이 신문은 사시(社是)와도 같이 내세우는 것이 ‘할 말을 하는 신문’인데, 문제는 그 자신은 할 말을 하면서 타인의 말을 막고 짓누른다는 점에서 폭력이다. 언론자유는 다른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라고 하지만 자신은 거의 무한정한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다른 이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언론자유의 독점은 대화의 거부에 다름아니다. 대화가 대화다우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만 자신만 말하고 상대방에는 다만 듣고 따르라는 것은 대화가 아닌 폭력일 뿐이다.
둘째, 폭력 집단이 휘두르는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인 구타와 폭행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 말과 글로써 상해를 입히고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그 말 그대로 해당되는 경우다. 이성과 합리에 입각한 말과 글로써 반이성과 불합리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과 글로 이성과 상식을 공격할 때 그 펜은 그 자신이 칼 이상의 칼이 되며, 흉기가 된다.
셋째,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력은 반성과 거리가 멀다. 동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상반되는 것이다. 이 신문은 건설노조 탄압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분신한 양회동 건설노조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사실 확인 없이 ‘자살방조 의혹’을 제기했다가 오보인 것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사과문은 사과로써 오히려 제2의 폭행을 가하고 있다. 필적 감정에 대한 사과일 뿐 ‘분신방조 의혹’ 보도 자체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91년에 주도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재연에 실패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자신이야말로 '언론폭력'
‘○폭’을 근절하고 말살하려는 태도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에 스스로 소멸하거나 무조건 항복할 것을 강요한다. ‘보수는 진영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이 신문 6일자의 김대중 칼럼은 이 신문의 주필로서 오랫동안 한국 언론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쳐온 인물의 입을 통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좌파가 뽑히지 않는 상황"에서 윤 정권에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라는 폭력'이 더욱 폭력적인 것은 '○폭’이라는 낙인이 대체로 약자에 대해 가해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조선이 겨냥하는 집단은 건설노조의 경우에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듯이 강자나 권력이 아니라 약자에 속하는 이들이거나 평범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주폭' 시리즈에서 일상의 피로와 애환을 풀려 술을 즐기는 평범한 시민이나 회식 뒤 술에 취한 직장인들을 '주폭'으로 몰아붙이던 행태는 한 달 300만 원의 생존 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고 단결행동에 나선 화물노동자나 건설노동자들을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폭력배'로 단정하는 보도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자신보다 강한 힘에 대해서는 타협적이고 순응하며 고분고분하다. 그 점에서는 자신보다 더 센 '주먹' 더 큰 권력 앞에서만 고개를 숙이는 조폭(組暴)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반면 조직폭력과의 큰 차이도 있다. 조직의 거대함이나 체계적인 면에서부터 비교가 안 된다. 그 규모에서부터 어느 한 구역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그 구역으로 관할하고 있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자신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들의 행위가 적법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조폭(組暴)이 그같은 탈법 불법을 몰래 숨어서 하려고 하는 데 반해 조폭(朝暴)은 숨어서 하기는커녕 정의와 합리의 총화인 듯 당당히, 그것도 시민들의 위에서 지시와 훈계를 하듯 나선다. 조폭(組暴)보다 더욱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3월 창간 103주년을 맞아 이 신문 사장의 기념사는 “조선일보가 103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1등 언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 선배들이 치열하게 지켜온 저널리즘의 원칙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와 정치권력에 맞서 정론직필과 불편부당의 저널리즘 원칙을 확고하게 지켜왔다"는 이 신문의 그 말이야말로 적잖은 수의 사람들에게는 폭력의 말, 폭언으로 비쳤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날마다 가해지는 '조폭(朝暴)', 조선일보라는 폭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