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선택 요구 안 해"…미, '사우디 국익 외교' 용인
사우디 "중국협력 커질 것"…'안보 미국, 경제 중국'
미 '굴욕적' 중동 복귀…"냉엄한 지정학적 현실 수용"
윤 정부, 과도한 대미, 대일 밀착…한‧중 충돌 우려
김기현 "중국 공산당 한국지부장인가"…연일 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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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와 협박에서 회유와 타협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접근법이 바뀌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지난주 사흘간(6~8일) 사우디를 찾았다. 카운터파트인 파이살 빈 파르한 외교장관은 물론,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도 만나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를 '손 한번 보겠다'고 별러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전통적 맹방이지만 지금 두 나라 관계는 최악에 가깝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 10월의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이다. 배후로 지목된 빈 살만 왕세자를 향해 바이든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지난해 7월 사우디를 방문했다. 러시아 제재 차원에서 유가 하락을 겨냥한 원유증산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빈 살만은 차갑게 대했다. 게다가 바이든이 귀국한 뒤 원유 감산으로 답했다. 바이든은 '후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결과적으로 '빈 말'이 됐다.
미국, 사우디 접근법 바꿔…협박에서 타협으로
보기에 따라선 두 사안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중국 문제가 미국-사우디 관계의 '화두'다.
양국은 꽤 오래전부터 소원하게 지냈다. 버락 오바마 시절 셰일가스 혁명으로 중동 석유의 중요성이 떨어지자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고 급부상하는 중국을 저지하고자 인도·태평양으로 지정학적 전략의 중심을 옮겼다. 문제는 그 전략적 공백을 중국이 파고든 대목이다.
작년 12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우디 국빈 방문이 신호탄이었다. 사우디는 시 주석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고 그린 수소·태양광·건설·정보통신·클라우드‧의료‧교통 등 미래산업 분야에서 38조 원 규모의 34개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관점에선 상황은 더 심각하다. 사우디-중국의 '밀월'이 경제‧통상 분야에 국한된 게 아니어서다. 지난 3월 10일 베이징에서 중국의 중재로 이슬람 수니파의 수장인 사우디와 시아파 수장인 이란이 오랜 적대 관계를 끝내고 국교 정상화에 합의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우디-이란 발 '화해 기류'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중동의 세력 구도에 지각변동을 촉발했다. 한 달 남짓 후인 4월 12일에 카타르와 바레인, 시리아와 튀니지가 각각 관계 정상화를 발표했고, 사우디와 시리아가 단교 12년 만에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5월 7일에는 2011년 아랍의 봄 때 잔혹 행위를 저질러 퇴출됐던 시리아가 아랍연맹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예멘 내전도 종식 수순을 밟고 있고, 사우디-이란 주도의 걸프 지역 합동해군동맹 구축 계획도 이란이 공개했다. 대부분의 흐름이 중동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링컨 "누구에게도 미국과 중국 선택 요구 안 해"
블링컨의 사우디 방문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중동 복귀'를 위해 먼저 한발 물러서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내걸고 '국익 우선' 외교를 펼쳐온 사우디에 제대로 줄을 서라고 누차 경고도 위협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미국이 중동에서 떠난 것도 중국 때문이고, 다시 중동으로 복귀를 시도하는 것도 중국 때문이다. 선수(先手)를 중국에 빼앗긴 채 뒤따라다니면서 중국 막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블링컨과 빈 파르한의 8일 공동기자회견은 사우디 국익 우선 외교의 진가를 보여줬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블링컨 장관은 "우리는 누구에게도 미국과 중국 중에서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곤 "미국은 여전히 역내 대다수 국가가 선택할 넘버원(No.1)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미국이 한국 등 동맹국은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줄서기'를 압박했던 것과는 기조가 많이 달라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미 의회 국정연설을 포함해 그동안 여러 차례 "미국에 반대해 베팅하는 것은 결코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경고해왔기 때문이다.
사우디 "중국 협력 커질 것"…'안보 미국, 경제 중국'
결과적으로 사우디는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해 다시 미국의 관심을 유도하고, 그러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계속 심화시켜 나가도 된다는 미국의 '동의'를 얻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블링컨이 보는 자리에서 빈 파르한은 할 말을 다 했다. 그는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 파트너다. 그래서 자연스레 중국과 많은 상호작용과 교집합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역내와 그 너머에서 커질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양국) 협력은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제적 이익이 예상되니 중국과 계속 친하게 지내겠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빈 파르한은 "우리는 여전히 미국과 튼튼한 안보 파트너십을 가지고 있다. 그 안보 파트너십은 거의 날마다 새롭게 바뀐다"라면서 '안미경중'(安美經中)을 언급했다.
그는 "나는 그런 (미중 간) 제로섬 게임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다각적인 파트너십들과 다각적 관계들을 해나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우디는 블링컨 장관이 떠난 다음 날인 9일 중국과 대규모 경협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리야드에서 11일 개막된 아랍‧중국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 첫날 100억 달러(약 13조 원) 규모의 투자 합의가 이뤄졌다. 대부분의 투자 계약이 사우디와 중국 간 경협 프로젝트들이다.
'굴욕적' 중동 복귀…"냉엄한 지정학적 현실 수용"
미국의 '굴욕적' 중동 복귀 결정에 대해, NYT는 "지난 몇 달간 바이든과 최측근 보좌진은 전지구에 걸쳐 중‧러와 경쟁할 경우 (지역) 강국들을 소외시킬 여유가 없다는 냉엄한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마침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고 내부 사정에 밝은 이들을 인용해 전했다.
또한 바이든이 인권을 기치로 '민주주의와 독재'로 진영을 나눠 외교를 펼쳐왔으면서도 사정이 다급하다는 이유로 인권 문제로 강하게 비난해온 사우디와 관계 개선에 나선 것도 명분 없는 행동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빈 살만 왕세자는 미‧중 패권 경쟁과 세계 에너지 시장들, 중동 안보 등이 뒤얽힌 복합적 상황에서 영리하게 사우디의 포지션을 지렛대로 활용하고, 특히 러시아의 침공 이후,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의 맥락에서 미국이 요구한 이분법적 선택을 거부해왔다고 신문은 평가했다.
NYT에 따르면, 사우디에 대한 미국의 희망 사항은 △ 중국·러시아와 일정 거리 유지 △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균형 △ 러시아와 우크라 간의 균형 △테러리스트 그룹과의 전쟁 △ 미국제 무기 구입 등이다.
반면, 사우디는 △ 주로 이란 저지를 위한 미국의 안전보장 및 강화된 군사협력 △ 북대서양조약 제5조에 명시된 '집단방위'와 같은 상호방위공약 △ 우라늄 농축과 민수용 핵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미국의 지원 등을 제시했다고 한다.
윤 정부, 과도한 대미, 대일 밀착…중국에 '적대적'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윤석열 정부가 보여온 외교 행보는 '국익 최우선'의 사우디와는 정반대다. 작년 5월 출범 직후부터 '가치 외교'를 내걸고 한편으론 과도한 대미, 대일 밀착,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탈중국‧반중국의 행보를 보여왔다.
최근엔 아예 적대적인 단계까지 왔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8일 성북구 대사 관저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초청해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중국 패배에 베팅하면 후회할 것'이란 취지로 윤 정부의 과도한 대미 편승을 경고한 것을 두고 닷새가 지나도록 여전히 한‧중 간, 여‧야 간 논쟁이 격렬하다.
특히 국정을 책임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싱 대사의 발언 중 '도를 넘은 부분'에 대해선 명확히 비판하되, 그를 통해 중국 당국이 한‧중 관계와 관련해 진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따져 보고 갈등 해소와 관계 복원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하는 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고 있다.
되레 김기현 당 대표가 앞장서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중국"이라거나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겨냥해 "중국 공산당 한국지부장인가?"라고 극언을 퍼붓는 등 정략적으로 몰아가는 시대착오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김기현, 이재명에 "중국 공산당 한국지부장?"…연일 극언
그동안 침묵하던 윤 대통령도 13일 직접 나섰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싱하이밍 대사의 태도를 보면 외교관으로서 상호 존중이나 우호 증진의 태도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싱 대사의 부적절한 처신에 우리 국민이 불쾌해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실은 싱 대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태가 벌어진 이후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싱 대사의 발언과 관련해 "중국의 입장과 우려를 소개하는 것은 그 직무 범위 안에 있다"고 말한 뒤 "현재 중한관계는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중국 왕 대변인의 답변은 시진핑 주석의 의중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는데다, 중국은 '핵심 이익'으로 여기는 대만 문제 등에 대한 윤 대통령의 잇단 개입 발언 등이 한‧중 갈등을 촉발한 주 원인이란 인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윤 정부의 인식과는 판이하다. 쉽사리 봉합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갈등 단계를 지나 본격적 충돌 국면으로 진입하지 않을까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