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하게…KBS 밥그릇을 차겠다니

2008년 정권의 KBS 장악 수법, 2023년에 재탕

2023-06-11     강기석 칼럼

(본 칼럼은 필자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미국의 한 정치 컨설턴트가 쓴 책에서 “정권 잡았을 때 정권의 성격에 안 맞는다고 조직이나 기관을 없앨 필요는 없다. 그 꼭대기에 정권과 코드가 맞고 충성할 인물을 앉히면 된다”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난다. 탁견이다. 아무리 조직 운영에 관한 법이나 규칙, 관례가 있더라도 조직이라는 것이 인사권을 틀어쥔 우두머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마련 아닌가. 더구나 기왕에 있는 조직을 없애느라고 헛심 쓸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정권 탄생에 도움을 준 사람의 자리도 하나 챙기는 셈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쉽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바꾸고 싶은 자리가 임기가 보장된 자리인데다 그 잔여임기가 한참 남은 경우가 그렇고, 그래서 아주 없애버리면 딱 좋겠는데 그 조직이나 기관이 쉽게 없애버릴 수도 없는 아주 중요한 곳인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이럴 때 현직을 쫓아내기 위한 여러 수법이 정권에 의해 동원되기 마련인데, 감사를 통해 재임시 저질렀음직한 여러 비리 캐내기가 기본이다. 특히 법인카드의 부적절한 사용 여부를 샅샅이 찾아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법인카드로 노래방 가기, 퇴폐 이발소나 안마소 이용하기, 근무시간에 골프 치기, 가족들과 외식하기, 개인 물건 구매하기 등등. 억대 연봉을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 치사하게 법인카드를 그런 데 쓰겠는가, 믿어지지 않겠지만 의외로 걸리는 경우가 많다.

독립 기관에 대한 정권의 뻔한 공격

공무원 출신 기관장들은 그런 비리가 없어도 바뀐 정권으로부터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사인이 오면 군말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특정 기관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함께, 그 기관의 장으로서의 책무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인물인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 인물들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협에 따르는 불안이나 공포보다도 사명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국민권익위원회 전현희 위원장이나 방송통신위원회 한상혁 위원장이 그런 경우다. 더구나 이 두 위원장에게서는 개인 비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전현희 위원장의 경우 출결 상황까지 샅샅이 뒤졌다는데도 그렇다.

개인 비리를 털다가 여의치 않을 경우 조직 자체에 대한 위협에 착수하게 된다. 내가 비교적 그 속사정을 잘 아는 언론진흥재단의 경우, 정부가 광고대행권을 빼앗겠다고 위협하면 노조 등 내부 구성원들이 앞장서 이사장 퇴출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국힘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가 예산 지원을 끊어 교통방송(TBS)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딱 그런 경우다. 지금 KBS에 대한 공격이 바로 그런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정연주 사장을 쫓아낼 때는 굳이 이렇게 KBS 수신료를 들어 위협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 정권 역시 2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권력기관을 총동원했다. 6월부터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것과 별도로 현 정권 측 4명, 전 노무현 정권 측 7명으로 된 이사회 구성을 바꾸는 작업이 진행됐다.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다. 먼저 이사장을 갈아치웠다. 이때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개인적으로 대학 동기인 이사장 사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겁박의 수단으로 꺼내 흔들었다는 이야기가 언론계에 광범위하게 퍼졌었다.

 

이은수 KBS 이사(왼쪽부터), 김종민 이사, 이석래 이사, 권순범 이사가 8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영진과 이사진의 동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2023.6.8. 연합뉴스

2008년 KBS 장악 위해 권력기관 총동원, 2023년에 재탕

이후 전 정부 측 A이사가 총선 출마한다고 사퇴했고, B이사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는 학교에서 해임돼 자동으로 KBS 이사직에서도 해임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추후 B이사 해고무효 소송에서 승소) 이렇게 4대7로 집권당에 불리했던 KBS 이사회는 거꾸로 7대4, 이명박 정권이 원했던 대로 바뀌었다. 그제서야 감사원은 부실 경영, 인사 전횡 등을 이유로 KBS 이사회에 정연주 사장의 해임제청을 요구했고, 이사회는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여 해임제청을 결의했다. 이명박은 8월 11일 해임제청을 받아들여 정 사장을 해임했다.

15년 전의 사건을 텍스트 삼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과정을 들여다보니 윤석열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KBS 수신료 징수 방법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KBS (야당 측) 이사들과 김의철 사장에 대한 개별적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는 증거다. 동시에 이 공격이 김의철 사장의 자진 사퇴 여부와 관계없이 현 이사회 해체, 나아가 KBS 전 직원의 굴복까지 노리는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 이사회가 그대로 경영진 추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계속하는 한 김 사장 후임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 들어설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에 큰 칼을 뽑아 들었으니 KBS 노조 등 사내 저항세력까지 철저히 길들이고 싶을 것이 분명하다.

정권 측에서는 수신료 분리징수를 추진하는 것은 국민 대부분이 수신료 합동징수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하는 일마다 국민의 뜻에 반해 한사코 국민의 이익을 배반하는 일만 하는 정권이 감히 할 말이 아니다. 분리징수 추진 방침이 국민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신료 합동징수를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합동징수 자체가 KBS 9시 ‘땡전뉴스’(9시 뉴스가 시작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하는 뉴스)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의 수신료 거부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 후에도 KBS가 심각한 불공정 행태를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시청료 거부 운동’이 벌어졌고, 사실 예나 지금이나 KBS가 완전히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거의 없으므로 시청료를 아까워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김의철 KBS 사장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아트홀에서 수신료 분리 징수 권고와 관련한 KBS의 입장과 대응 방안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6.8. 연합뉴스

노조-사장-이사회, 언론 자유 위해 단결해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윤 정권의 KBS에 대한 공격은, 수신료 분리징수를 KBS 공정성 회복을 위한 도구로 쓰려는 시민들의 뜻과 정반대로 KBS를 완전히 장악해 그 공정성을 훼손하려는 무기로 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의철 사장이 자신의 거취를 수신료 징수 방법 문제와 결부시킨 행위는 그 의도와 상관없이 대단히 부적절한 것으로 비친다. 그의 승부수가, 마치 법무장관이란 자리가 자기 개인 것인 양 ‘판돈’으로 건 한동훈처럼, 자기 개인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자리를 걸고, 공영방송 KBS의 독립과 공정성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KBS 구성원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소영웅주의적 행보로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KBS 시청료가 분리징수하는 것으로 바뀐다면 KBS는 경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궤멸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절대로 윤 정권이 분리징수를 강행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무리 남김없이 포악성을 드러내는 정권일지라도 KBS는 한 정권 차원에서 손바닥 뒤집듯 없앨 수도, 새로 만들 수도 없는 기관이다. KBS는 윤석열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없애지 못한다. 굴복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사회-사장-노조의 단결이 관건인데 자리와 월급에 대한 불안감을 몰아내고 대신 언론자유와 방송 공정성에 대한 굳은 의지가 그 단결의 시멘트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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