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면 그리운 사람…요즘 같은 때 더욱 생각 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 봉하마을 추도식 엄수
정세균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김진표 "선거제, 정치개혁 유업 이룰 것"
이재명 "민주주의 퇴행에 그리움 커져"
한덕수, 시민들에게 "내려와" 야유받아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5월이 오면 그렇죠. 5월이 오면 나도 모르게…14년이 지난 지금도…눈물부터 나서…지금은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늘 눈물과 희망이 교차한다고 할까요. 저는 늘 그분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가 울다가 웃다가 그런…."(손병순, 정년퇴임 버스기사)
"그분이 저한테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을 주셨거든요, (자존감이) 되게 낮아져 있을 때. 생활 속에서 그런 걸 느낄 때 많이 생각이 나요."(정성혜, 보육교사)
"노무현 대통령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 세상이 바뀐 게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생각이 날 때가 제일 많은 거 같아요."(이종우, 대학교수)
"이럴 때 우리나라에 큰 어른 한 분쯤 계셔주면서 국민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될 거 같은데, 그분이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 큰 거 같습니다."(유상진, 경찰관)
"요즘 같은 때 계속 생각이나는 거 같아요. 가장 그립고. 대통령 할아버지였으면 안 그랬을 텐데."(최윤아, 대학생)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이 시민 18명에게 물어본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그리운 순간'에 대한 답변 중 일부다.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생태문화공원 특설무대에서 엄수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도식에는 전국에서 모인 시민 7000여 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의 뜻을 기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 후퇴 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민들이 그리는 '노무현 정신'과 더욱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날 추도식에는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 , 딸 노정연 씨, 사위 곽상언 씨 등 유족을 비롯해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김진표 국회의장이 참석했다. 문 전 대통령 내외는 지난해 퇴임 직후 13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추도식에 참석해 유족과 함께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재명 대표, 박광온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와 국회의원들이 참석했으며, 노무현재단 정세균 현 이사장과 한명숙·이해찬·이병완·유시민 전 이사장, 재단 임원진인 도종환·이재정·전해철 의원과 정영애 전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자리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참여정부 인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 대표로 김홍걸 의원도 참석했다.
국민의힘에서는 김기현 대표, 구자근 비서실장, 윤희석 대변인이, 정의당에서는 이정미 대표, 강은미 원내대표, 심상정 의원 등이, 진보당에서는 윤희숙 상임대표 등이 참석했으며, 정부에서는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참석했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김대기 비서실장과 이 수석이 참석했으나, 올해는 이 수석만 보냈다. 지자체에서는 김동연 경기도지사, 강기정 광주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 김영록 전남도지사, 김관영 전북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올해 추도식 주제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로 정해졌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집필한 저서 <진보의 미래>에서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인간이 소망하는 희망의 등불은 쉽게 꺼지지 않으며, 이상은 더디지만 그것이 역사에 실현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쓴 구절에서 따왔다.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추도식 주제에 대해 "많은 국민들께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시는 요즘 중요한 건 민주주의를 향한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대통령님의 말씀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며 "노 대통령께서는 일찍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책임 있는 자세로 평생을 사셨다. 80년대 깨어 있는 시민과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몸바쳤다. 국민 통합을 위해 지역주의에 온몸으로 맞섰다. 원칙과 상식이 승리하는 세상을 위해 특권과 기득권, 기회주의적 권력과 당당히 싸웠다"고 했다.
이어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결단을 하기도 했다.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를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며 "대통령 노무현은 특정 진영과 정파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우리가 대통령님의 뜻을 이어 이상이라는 것은 더디지만 결국 실현된다는 믿음으로, 깨어있는 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겠다"며 "굽이쳐 흐를지언정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 새로운 노무현이 되어 사람사는 세상, 원칙과 상식이 승리하는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말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추도사에서 "대통령님은 사람 사는 세상과 정치개혁을 갈망하셨다. 여의도 높은 담벼락 안에 있던 우리 정치를 평범한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그렇게 사랑방 정치, 제왕 정치의 막을 내리고 시민이 중심이 되는 새 정치시대의 문을 여셨다"며 "대통령님이 있었기에 우리 정치가 세계 보편의 선진 민주주의로 진입할 수 있었다. 대통령님과 함께 경제 번영과 교육개혁, 정치개혁을 위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요즘 저는, 대통령님께서 남기신 정치개혁의 유업을 떠올리는 날이 많다"며 "대통령님께서는 지역주의 극복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으셨다. 지역구도를 깨는 선거법만 동의해주면 권력의 절반, 내각구성 권한까지 넘기겠다고 하셨다. 서로 발목잡기에 몰두하는 낡은 정치를 끝내기 위해 진영을 초월한 대연합의 정치를 구상하기도 하셨다. 우리 정치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메어온다"고 했다.
그는 "저는 2004년, 탄핵의 광풍이 몰아치던 무렵, 대통령님을 지키고, 힘을 드려야 한다는 심정으로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이제 저도 정치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저는 대통령님이 남긴 정치개혁의 유업을 완수하는 것이 제가 풀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선거를 앞둔 여야가 목전의 유불리를 고심하다 이번에도 정치개혁에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권력의 절반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꼭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대통령님의 간절한 그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했다.
참여정부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추도사에서 "지난해 가을 저 앞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묘역공사가 14년 만에 완공됐음을 노무현 대통령님께 보고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다"며 "지금 여러분이 앉은 생태공원부터 주변 식재, 나무, 여민관을 비롯한 부속건물 건립 모두 10년간 정성스럽게 계획되고 검토되고 시공되어 오늘의 노무현 대통령 묘역이 조성됐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큰 박수로 격려했다.
유 전 청장은 "묘역공사에 우리나라 최고가는 전문가들이 수없이 봉하마을에 내려와 논의했던 그 헌신적 봉사와 예술가들의 흔쾌한 기증, 그리고 국민 성금으로 이뤄졌다"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께 보고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노고에 값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새겨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문구를 언급하며 "오늘 우리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는 노무현 대통령 말을 새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어 감사하다"고 했다.
팝페라 가수 한가영 씨는 추모 공연에서 가수 윤종신 씨가 작곡한 '마음에 산다'를 불렀다.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랫말을 담고 있다. 참석자들은 한 씨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닦기도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참여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 총리는 윤석열 정부의 초대 총리를 지내고 있다. 시민들은 한 총리가 추도사를 하는 내내 "꺼져라" "내려와" 등 고성을 지르며 한 총리에게 야유를 보냈다.
한 총리는 추도사에서 "'동북아 시대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한 차원 높은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시던 대통령님 말씀처럼, 얼어붙었던 한일 관계에 불을 지피며,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굴욕, 굴종외교로 비판을 받고 있는 현 정부의 대일 외교가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라고 막말성 강변을 한 것이다.
한 총리는 시민들의 야유를 받으면서도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노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그 말씀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했다.
추도식이 끝난 뒤에는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서 참배가 이뤄졌다. 권양숙 여사와 노건호 씨 , 노정연 씨, 곽상언 씨 등 유족과 정세균 이사장의 헌화와 분향에 이어 문재인 전 대통령, 김정숙 여사, 김진표 국회의장, 한덕수 국무총리, 이진복 정무수석, 이재명 대표을 비롯한 각 정당 대표와 지도부 등이 참배를 한 뒤 시민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한편 이날 추도식에 앞서 권양숙 여사는 문 전 대통령 부부와 이재명 대표, 한명숙·정세균·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김진표 국회의장 등과 함께 육개장으로 오찬을 했다. 문 전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 10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서 만난 뒤 13일 만에 재회했다. 권 여사는 이 대표에게 무궁화에 한반도 지도 및 독도를 표현한 도자기 접시와 <일본 군부의 독도 침탈사> <진보의 미래> 등 책 두 권을 선물했다.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에 따르면 도자기 접시는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4월 독도 문제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 발표 이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등 각국 정상에게 선물한 것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특별 담화는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맞서 정면 대응으로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군부의 독도 침탈사>는 노 전 대통령이 특별 담화 내용을 구상하면서 참고했던 책으로, 참모들에게 나눠주면서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진보의 미래>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직접 쓴 미완성 원고와 참모진 및 학자들에게 구술한 내용으로 이뤄졌다. 이 대표는 권 여사에게 선물을 받고 "그 의미를 잘 새기겠다"고 답했다고 한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표는 추도식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셨던 노 대통령께서 우리 곁을 떠난지도 벌써 14년이 됐다. 민주주의가 다시 퇴행하고 노 대통령이 꿈꾸셨던 역사의 진보도 잠시 멈췄거나 또 과거로 일시 후퇴하는 것 같다.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는 역사에 대한 노 대통령의 말씀과 믿음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며 "민주주의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민주주의의 발전,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다. 지금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 속에 노 대통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큰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노 대통령께서 꿈꾸셨던 사람사는 세상,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향해서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조직된 힘으로 뚜벅뚜벅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겠다. 용기를 내겠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함께하신 여러분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국민들께서 바로 그 힘"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