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먼저 바뀌어야 할 건 한국 아니라 일본

‘제3자 변제’ 일본 우익 주류세력의 승리

이를 지지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선의’

윤 정부 지지도 우익 승리 굳히기

일본이 바뀌어야 한일관계도 바뀐다

2023-05-14     한승동 에디터
정의당 이정미 대표(왼쪽 두번째)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일외교 현안에 관한 정의당-일본 사회민주당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핫토리 료이치 일본 사회민주당 간사장. 2023.5.12.연합뉴스

3월 16일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12년 만에 두 나라 정상들의 ‘셔틀 외교’가 부활한 뒤,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호접란’ 화분 3개가 도쿄 아자부의 주일 한국대사관 현관에 나란히 놓였다. 이런 선물은 이례적인 것이어서, 대사관 직원이 수소문 끝에 화분을 보낸 이가 대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초로의 일본인 여성이라는 걸 알아냈다.

주일 한국대사관 현관에 놓인 호접란 화분

대사관은 이런 사실을 인스타그램에 ‘어느 봄날의 선물’이라는 제목을 달아 화분 사진과 함께 올렸다. 거기에 아마도 화분을 보낸 이의 말이겠지만, “호접란의 꽃말은 행복이 날아 온다” “화분에 심으면 오래간다”는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덧붙인 모양이다.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하코다 데츠야씨가 이 신문 논설위원들이 번갈아가며 쓰는 고정 칼럼 ‘죠하큐’(序破急)에 쓴 글(‘오무라이스에 나라를 팔았다? “어느 나라 ××인가” 비판의 안타까움’, 5월 12일)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코다 위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로 오래 대립해 온 한일외교가 “윤 씨(윤석열 대통령)의 대담한 결단으로 바닥을 쳤다”면서, 그 직후부터 뒤늦은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한 기운이 넘쳐나면서 쌍방이 관민 불문하고 대화와 교류를 활발히 재개하고 있다며, 2023년은 “한일관계사에서 특필할 만한 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쪽 호접란의 미담과는 반대로 한국쪽 윤 대통령은 여전히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며, 한국 국내정치 대립구도 속에서 반대세력이 대통령을 공격할 때 그 창끝은 자연스레 대일정책을 향한다고 지적한다.

“어느나라 대통령이야?”

그러면서 한일 두 정상이 회담 뒤 1차 만찬을 끝내고 이례적으로 2차까지 가서 오무라이스를 함께 먹은 이야기를 하면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때다 싶게 “오무라이스 한 그릇과 국가의 자존심을 맞바꿨다” “일본의 종이 되는 길을 택했다”는 등의 공세를 가하며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하고 언성을 높였다는 얘기를 썼다. 그는 “어느 나라…”라는 이 비판은 한일관계에 늘 따라붙는 말이라면서, 한국에서 일본 편을 드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하면 용서없이 퍼부어지는 말인데, 이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라며 이런 얘기를 했다.

이른바 ‘우(익)’의 상징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도 한국과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뒤 “그러고도 일본의 총리냐”라는 말을 듣고 괴로웠다는 얘기를 주변사람들에게 흘린 적이 있다. 최근에 출간된 회고록에서도 보수파로부터 “한국에게 돈을 주다니, 아베는 제정신인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2015년 12월 28일의 위안부 합의(12·28합의)와 그때 일본이 화해재단에 ‘위로금’으로 10억 엔(약 100억 원)을 기탁한 일을 두고 일본 내 보수파들로부터 우익인 아베조차 그런 비판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른바 일본 ‘우경화’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간 것인지를 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윤 씨’가 지난해 당선된 뒤 일본에 보낸 사실상의 ‘특사단’을 면회했을 때도 ‘아베 씨’는 그런 쓴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한국쪽의 양보를 촉구하는 발언이었겠지만, 지금 윤 씨에게 쏟아지는 반발은 아베 씨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고 하코다 위원은 썼다.

그는 이처럼 오늘날 한일 두 나라의 아이덴티티가 격렬하게 맞부딪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진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려는 시도를 하면 그 내용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발치에서부터 올라오는 반발을 피할 수 없는 고약한 구도가 돼 버렸다고 한탄했다.

 

카와시마 슈이치 후쿠시마 어민(전 민속학회장), 유용해 가파도 어촌계장, 정의당 이정미 대표, 배진교 신임 원내대표 등 참석자들이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무단투기 저지를 위한 한-일 연대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3.5.9. 연합뉴스

“어느 나라 신문기자야?”

그리고 “어느 나라…”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코다 위원 자신의 글에 대해서도 그런 질책이 줄창 쏟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논설위원실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 받은 메시지들은 빼지 않고 읽고 듣고 해 왔는데, 그 중에서 “어느 나라 신문이냐”는 비판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 한일 양국이 직면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아울러서 보노라면 안타까움과 딜레마를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발표된 인구통계까지 거론하면서 한일 모두 반세기 뒤에는 30%나 인구가 줄어든다는데, 늙고 줄어든 두 나라가 그래도 티격태격 싸우며 살아갈 거냐며 이런 말로 글을 맺었다.

“과거와 미래를 꼼꼼히 살피면서 지금을 살아간다. 그런 것을 문득 생각하면서 이쯤에서 붓을 내려 놓으려 한다.”

그 뒤에 (전 논설위원 하코다 데츠야=국제사설 담당, 현 국제보도부)라는 ‘바이 라인’이 붙은 걸로 봐선, 이 글이 하코다 기자가 논설위원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쓴 글인 듯하다.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고 아사히신문 한국지국장도 지낸 국제부 베테랑 기자이자 한국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지닌 '한국통'인 그가 다시 국제부로 복귀하면서 한일관계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선의'로 쓴 글이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호접란 화분을 보낸 초로의 일본인 여성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칼럼에 ‘오무라이스에 나라를 팔았다? “어느 나라 ××인가” 비판의 안타까움’이라는 제목을 붙인 <아사히> 편집자의 의도가 윤 대통령에게 그런 비판을 쏟아 놓고 있는 한국 야당을 비판하려는 것인지, 윤 대통령이 그런 험한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 정치사정이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려 놓을지도 모를 정도로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일본쪽을 비판하려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후자쪽일 것이다.

이런 정도의 글조차 “어느 나라 신문기자냐”는 힐난을 들어야 한다면 편집자가 제목 달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지일관 압박, 한국을 제대로 다루는 법

일본 전문가로 정보화 컨설팅기업 이코퍼레이션닷 제이피의 대표이자 메이지대학 겸임교수 및 일본 총무성 전자정부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염종순씨가 최근 유튜브에서 한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제3자 변제’에 이르는 윤석열 대통령의 전례없는 대일접근정책 변화를 일본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보수우익 주류세력은 ‘아베 정권 이래 강경자세로 일관되게 한국을 압박했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일본 현지에서 오래 샐활하면서 정부쪽 고위관리들과도 자주 접촉하는 그의 말대로라면, 집권 자민당을 비롯한 일본 주류세력은 과거사 등을 둘러싼 한일관계 문제를 일본이 바라는 대로 풀어가는 최선의 길은 협상이나 타협과 같은 전통적 방법이 아니라 초지일관 한국쪽을 압박하며 일본쪽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는 걸 이번 윤석열 정부의 획기적인 대일정책 전환을 통해 확인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한일관계가 돼 가는 듯하다가 계속 파탄이 난 것은 일본이 한국에게 너무 관대해 계속 한국의 말도 안 되는 ‘응석’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일본 우익들은 이번 일로 자신들이 옳았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끝까지 밀어붙였더니 이런 놀라운 성과가 나왔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일본정부의 대한정책도 자민당 집권이 계속되는 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이달 5~7일의 기시다 총리 방한에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도 염 교수가 한 얘기와 대체로 부합한다. 기시다 정부는 계속 밀어붙이면서 후쿠시마 사고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 등 여러 현안들에서 이것저것 챙겨 가면서도 한국정부 요구는 제대로 들어준 게 없다. 일본이 제시한 조건대로 구성하게 될 정부 시찰단 파견으로 득을 보는 것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쪽이다.

하코다 위원이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이 걱정해야 할 것은, 일본 외무성 관리들도 “한국정부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라, 깜짝 놀랐다”는 파격적인 ‘양보’로 한국 내 입지가 더욱 좁아진 윤석열 정부가 계속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어떻게 도울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 구하기’라는 얘기까지 들었던 기시다 총리의 서울 방문은 승자의 안도와 여유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주일 한국대사관 현관에 호접란 화분을 가져다 놓은 초로의 일본인 여성이나 하코다 위원의 ‘선의’조차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카와시마 슈이치 후쿠시마 어민(전 민속학회장)이 9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무단투기 저지를 위한 한-일 어민 연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5.9. 연합뉴스

윤 정권을 구하라

하코다 위원은 윤 대통령이 도쿄 한일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가해자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인 한국이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이른바 ‘제3자 대위 변제’방식을 통고한 지 이틀 뒤인 3월 18일에 쓴 글(‘윤석열식의 대일 ‘햇볕정책’을 정치결착. 지속에는 일본의 대응도 불가결‘)에서는 일본정부가 서둘러 ‘성의있는’ 대응을 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일본정부도 협의에는 성실히 응했으나, 윤 씨의 결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이대로 한국 쪽에만 계속 부담을 지우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에도 득책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에는 늘 ‘정권교체’와 ‘사법’이라는 두 가지 큰 리스크가 존재할 수 있다면서, 그 때문에 양국의 비대칭적인 해결책이 이제부터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며, 그는 일본쪽이 정치결착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문제에 대해 일본정부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모처럼의 정치결착이 무산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윤 정권의 임기는 아직 4년 남짓 남아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양호한 관계를 고정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원점으로 되돌릴지, 그것은 당연히 일본쪽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도 달렸다.”

일본이 바뀌어야 한일관계도 바뀐다

하코다 위원은 지금의 한일관계가 윤석열 정부 등장 이후 바뀐 흐름 그대로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간간이 비판하다가 종종 “당신은 어느나라 기자야?”라는 힐난까지 들었던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이 얻어낸 이번 ‘승리’를 그대로 현실로 고착시켜 가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일본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윤석열 정권이 바꿔 놓은 지금의 한국정부 정책을 ‘수호’하기 위해서지 일본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면 너무 가혹한가.

하지만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극도로 우경화된 일본의 현실을 바꿔, 한국 시민들과 손을 잡고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한일관계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짚고 갈 필요가 있다. 그런 바탕 위에서는 진정한 한일간 시민연대가 불가능하다.

주일 한국대사관 현관에 호접란 화분들을 두고 간 초로의 일본여성의 한일 간의 아름다운 화해와 융합을 바라는 ‘선의’ 역시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만으로 바뀔 것은 거의 없으며, 종종 그 선의는 ‘악의’를 숨겨 주는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일본이 바뀌어야 한일관계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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