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수출규제 해제 뒤 총리 방한... 위기의 '윤' 구하기?
총리 방한 5년만에, ‘셔틀 외교’ 12년 만에 재개
3년여 수출규제·화이트리스트 문제 해소
한국 먼저 해제한 뒤 일본이 수용 모양새
잘못한 쪽은 늘 한국이라는 메시지 발신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총리가 다음달 7~8일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회담할 것이라고 <아사히신문>이 2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일 두 나라 정부가 서울에서의 양국 정상회담 일정을 그렇게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두 나라 정부의 여러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면서, 지난 3월 16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때 두 나라 정상이 서로 빈번하게 상대국을 방문하는 ‘셔틀 외교’를 재개하기로 합의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일본총리 5년만의 방한
셔틀 외교는 이명박 대통령이 교토를 방문해 당시 집권당이던 일본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회담했던 2011년 12월 이후 중단됐다. 그해 3월에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원전이 침수돼 수소 폭발을 일으켰고, 다음해 12월 자민당이 총선에서 이겨 아베 신조 2기 집권이 시작됐다.
기시다 총리의 방문이 실현될 경우,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은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아베 전 총리의 방한 이후 5년만이다.
윤 대통령은 5월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아 놓고 있어서, 한일 정상 간의 상호방문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수출규제 해제, 화이트리스트 복구
한편 일본 경제산업성은 28일, 2019년에 한국을 수출 절차상의 우대 조치 대상국 명단인 ‘그룹 A'(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켰던 조치를 풀고 다시 그 대상국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경제산업성은 “한국이 외환 및 외국무역법에 따른 수출 관리를 적절히 실시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한국을 수출관리령 별표 제3의 국가(화이트리스트 국가)에 추가하기 위해 수출무역관리령의 일부를 개정하는 정령안에 대한 의견 모집 절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달 16일의 한일 정상회담 뒤 한국에 대한 반도체 첨단부품·장비 수출규제를 3년여 만에 해제했다.
일본의 이런 조치는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 쪽이 양국 간의 최대 현안이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일본 쪽의 요구를 사실상 전면 수용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의 해법을 제시한데 이어,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취했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소하고, 수출 규제 대응조치로 화이트리스트에서 뺐던 일본을 다시 넣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먼저 취한 뒤에 나온 것이다.
이는 한일 정상회담 당시 한국 정부가 한국의 선제적 조치에 대해 일본 쪽도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언급했던 이른바 “성의있는 호응”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애초에 요청했던 것은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가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피해자 지원재단에 기부금을 내고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가해 기업과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한국 먼저 일본 나중
그리고 일본 정부는 관련 상응 조치도 늘 한국 쪽이 먼저 취한 뒤에야 이를 평가해서 수용, 대응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애초에 잘못한 것은 한국이며, 그런 한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했으니 일본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상응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일본 안팎에 발신하려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조치를 취하기 사흘 전인 25일에도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전날 한국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 다시 포함시키는 조치를 취한 뒤에야 “한국 쪽의 자세를 신중하게 살펴 보겠다”며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복구 문제에 대해 “책임있는 판단을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의 윤 정부 밀어주기?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모두 일본 정부가 먼저 취한 조치임에도, 이처럼 그에 대해 맞대응한 한국 쪽이 먼저 취하하고 일본이 이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이는 잘못한 쪽은 한국이라는 인상을 일본 유권자와 국제 사회에 유포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연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권 국가끼리의 호혜평등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침략과 식민 지배 때 자행한 범죄 사실 자체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보수우익 지배 세력이 한일 관계를 여전히 예전 식민 지배 시절의 주종 관계로 보는 시대착오적인 세계관과 세계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2019년 11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 협상 때도 합의사항을 동시에 발표하기로 한 사전 약속을 일본 쪽이 깨고 굳이 한국이 먼저 발표한 뒤에야 발표함으로써, 마치 한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발표해서 일본이 받아주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했다. 당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이에 크게 분개해 일본이 ‘신의 성실’ 원칙을 어겼다며 “트라이 미”(덤벼 봐)라는 말까지 하면서 일본 쪽을 비판해 화제가 됐다.
일본 정부의 이런 조치에 대해 한일 정상회담 이후 더욱 지지율이 떨어진 윤석열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그나마 서둘러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지난 3월 16일 정상 회담 뒤 일본에서는 ‘완벽한 일본의 승리’로 받아들여진 회담 결과 덕에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지만 한국에서는 그 반대로 윤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 유력 매체들에는 2015년 12월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간의 합의(12·28합의)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 뒤 사실상 파기된 것처럼, 다음 대선 때 한국 집권당의 패배로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일본이 한국 쪽에 ‘상응한 호응’을 보임으로써 윤 정부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글들이 많이 실렸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특히 한일 관계를 ‘개선’시킨 윤석열 대통령의 ‘용기와 헌신’을 칭찬하면서 ‘특별한 감사’를 거듭 표명한 것을 두고도 비슷한 해석이 나왔다.
<아사히신문> 27일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의 안전 보장이 어려움을 더해 가는 중에 북한이나 중국에 대한 대응에서 일, 미, 한 3국의 제휴 강화를 중시하고 있다. 전 징용공(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둘러싼 문제로 차갑게 식었던 일한 관계를 개선시킨 윤 씨에 대해 바이든 씨는 ‘정치적 용기와 개인적인 관여에 감사한다’며 일, 미, 한 3국 협력을 추진해 나갈 생각임을 보여주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둘러싸고 (한국) 국내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윤 씨를 밀어주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