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사망자 명단 공개 거부가 원죄다
이름을 모르는데 어떻게 유가족 동의를 받아오라는 건가
난데없는 유가족 동의 논쟁
이태원 참사 16일이 지나도록 정부가 공개를 거부해온 사망자 명단을 시민언론 민들레가 입수해서 지난 14일 보도했다. 외국인 23명을 포함한 155명의 명단이었다. 사진, 연령, 주소, 직업 등 개인정보 없이 이름만 공개했을 뿐이지만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적, 법적 비난의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국힘당 정진석 비대위원장와 주호영 원내대표가 포문을 열었고 한덕수 국무총리와 한동훈 법무장관이 거들었다. 이태원 참사를 반정부투쟁에 활용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방어하려는 정략적 동기가 숨어 있다는 정치적 비난과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은데다 2차 가해를 부를 수 있어 반인권적이고 명단 유출 과정의 불법성이 의심된다는 법적 비난이 줄을 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보성향의 전국언론노조와 민변, 민주언론시민연합도 유족 동의가 없어서 잘못이라는 비판대열에 합세했다. 윤석열 정부의 명단 비공개 방침을 비판하며 명단 공개를 촉구해온 민주당도 유족의 동의 없는 명단 공개는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놨다.
사망자 명단 없이 숫자로만 종결짓는 방식에 동의하는가?
이 정도면 유가족의 동의 유무가 사망자 명단 공개의 적법ㆍ타당성 판단의 유일한 잣대라는 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성립한 셈이고 향후 중대한 선례가 되기 때문에 재난 시 정부의 수습책무 및 언론의 보도책임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 국민들이 향후 사고나 참사 발생 시 사망자의 숫자만 알고 사망자의 이름도 모르는 채로 참사를 수습하고 공식 종결하는 방식을 찬성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앞으로도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고 추모할 때 영정과 위패가 없이 국화꽃에 분향을 하는 방식에 동의하는지, 시간이 지나 추모비를 세울 때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도 없는 '무명' 추모비를 세우는 것에 찬성하는지 물어야 한다. 또한 향후 행안부나 경찰이 갖고 있는 참사 사망자 명단에 대해서는 언론기관 등 제3자가 정보공개 청구를 못하도록 정보공개법을 손질할 용의가 있는지도 물어야한다.
유가족 동의, 절대기준일까?
일반적인 경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주변에 널리 알려야 할지 말지는 유가족이 결정하는 것이 맞다. 유가족 동의가 일견 맞는 듯 여겨지는 이유다. 그러나 공식기구를 통한 공개적 진상규명과 책임추궁 과정을 거쳐야 하는 사회적 참사는 공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유족 동의 유무가 명단 공개의 정당성 여부를 결정짓는 유일 잣대가 될 수 없다. 정당성 판단은 알권리와 개인정보보호, 2차 가해 방지 등 다양한 법익을 균형 있게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내려야 맞지 유가족 동의 여부라는 하나의 기준을 절대화해서 기계적으로 내릴 수 없다.
각자에게 그에게 합당한 것을 주기 위해 고도의 분별을 지향하는 법리의 속성상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인 양 주장되는 법리는 일단 사이비 법리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예외 없는 원칙 없고 극단의 법은 극단의 불법에 다름 아니라는 법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알권리와 망자의 프라이버시권이 충돌할 때 일률적으로 맞는 묘법은 없다. 위에서 추모비 건립이나 정보공개 신청 때 난처해지는 점으로 문제를 예시했지만 사망자 명단 공개의 정당성 여부를 정황과 시점 등을 고려하지 않고 유족 동의 여부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망자 명단의 공적 차원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 명단은 사회적 참사에 따른 인적 희생 범주와 사회적 애도와 추모 대상을 확정짓는 데 필수적인 공적 정보라는 점이다. 개인적 애도를 넘어 사회적 애도의 본질을 가지게 된 사건에서 애도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공적 이익에 부합한다. 이와 같이 희생자 개개인을 넘어 희생자 명단 자체가 갖는 공적 차원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희생자 명단은 공적인 참사 수습 과정의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 공개는 유가족 동의 여부에 구속되지 않는 공적 의무라고 봐야 맞다. 이러한 공적의무가 제대로 수행돼 희생자명단이 공개될 때 비로소, 희생자 개개인의 죽음이 개인적 불운을 넘어 사회적 애도와 추모의 대상으로 승화되고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위한 유가족간의 연대와 협력도 가능해진다.
이태원 참사 이전까지 역대 정부는 대형 참사의 공적 성격에 충실하게 희생자 명단 공개를 꾸물거린 적이 없었다. 크고 작은 안전사고로 인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사망자 확인 과정을 거쳐 지체 없이 사망자 명단을 공표해왔고 언론은 이를 받아 보도해왔다. 이태원 참사 이전에는 정부의 사망자 명단 공표에 유가족의 동의가 요구된다는 법리가 주장된 바 없었고 망인의 개인정보 보호나 유가족 동의 요건을 내세워 정부가 사망자 명단 공개를 거부한 적도 없었다. 오직 윤석열 정부만이 사망자 명단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정부의 사망자명단 공개거부다
실은 정부의 사망자 명단 공개 거부가 문제의 본질이다. 여느 때처럼 윤석열 정부가 이태원 참사의 사망자 명단을 제때 공개했더라면 시민언론 민들레가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사고나 참사 발생 시 경찰 등 책임 있는 당국이 사망자 신원을 일일이 확인해서 정확한 사망자 명단을 확정할 의무가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그렇게 사상자 명단을 확정한 후 그 명단을 공표할 의무가 있는지 여부다. 그리고 이때 반드시 유족의 동의가 필요한지 여부다. 정부가 주요사고나 참사의 사망자 신원을 확인해서 명단을 확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단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을 때 언론이 취재해서 입수한 명단을 공개할 수 있는지 여부다.
그걸 판정하는 일차적 기준은 경찰 등 공적기구가 개입해 진상규명을 하고 책임 소재를 가리는지 여부다. 개인적 애도를 넘어 사회적 애도의 대상이 되었는지 여부다. 공적 책임이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다. 공적 진상규명, 공적 책임 추궁, 공적 애도가 행해지는 공적인 사안이라면 희생자 명단을 밝히는 것이 공식 수습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이런 경우라면 특단의 사정이 없는 이상 단순한 명단 공개에 유가족 동의라는 사생활보호 법리를 적용할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태원 사망자 명단은 부정확하거나 민감한 개인정보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사망자 명단만 공개해도 사망자나 유가족이 다양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사망자 명단은 무엇보다 정확해야 한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 취급받는 변고가 일어난다. 정확한 사망자명단은 경찰이나 책임 있는 기관이 아니면 작성할 수 없는 것인데 시민언론 민들레가 입수한 명단도 정확성에 이의가 제기된 바는 없다.
이번 사망자 명단 공개로 망인이나 유가족이 2차 가해를 당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번 사망자 명단은 이름만 있을 뿐 성별, 연령, 주소, 직업 등 상세한 개인정보를 조금도 담고 있지 않다. 특정 정당의 당원 명부나 노동조합의 조합원 명부, 개인의 병력 정보나 치료 정보처럼 민감한 정보도, 쓸데없는 상상을 일으키며 망자나 유가족의 명예나 평판을 난처하게 만드는 정보도 아니다. 이태원 참사의 사망자들은 살인, 성폭력, 가정폭력, 인신매매, 스토킹 등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서 유가족이 안전을 위협받을 가능성도 낮다. 사망자건 유족이건 명단 공개로 2차 가해를 당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것이 시민의 알권리보다 우선한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의 죽음은 모두 보도가치가 있는 공적사안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공적 사안임이 분명한 대형 참사의 희생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개개인의 죽음은 설령 사적공간에서 맞이한 평온한 죽음이라도 공적 기록이 필요한 공적 사항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나라가 사망신고를 강제할 이유도 없고 모든 신문이 부고기사 지면을 따로 할애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의 죽음은 본인과 가족을 넘어 여러 맥락과 역할로 망인을 알고 있는 지인들과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적 관심사다. 사회적 참사로 인한 창졸간의 죽음은 그 공적 성격이 누구에게나 뚜렷해질 뿐이다.
그래서다. 영국의 독립언론규준기구(IPSO)는 사망과 사인보도지침(Guidelines for Reporting Deaths and Inquests)에서 "언론은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 보도할 기본적 권리가 있다. 유가족이 보도를 원하지 않고 죽음을 사적으로 여기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고 선언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언론의 올바른 자세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론이 부고기사를 쓸지 여부를 유가족의 동의를 구해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내용으로 쓸지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평온한 죽음도 얼마든지 보도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참사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겠다.
우리나라의 재난보도준칙도 같은 인식 위에 서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2014년 9월에 한국기자협회에서 만들어낸 재난보도준칙도 다르지 않다. 재난보도준칙 제11조(공적정보의 취급)의 본문 전단은 "피해 규모나 '피해자 명단', 사고 원인과 수사 상황 등 중요한 정보에 관한 보도는 책임 있는 재난관리당국이나 관련기관의 공식 발표에 따르되 공식 발표의 진위와 정확성에 대해서도 최대한 검증해야 한다"라고 선언한다. 짧지만 세 가지 원칙이 녹아 있다. 첫째는 피해 규모나 피해자 명단은 공적 정보라는 것이다. 둘째는 책임당국이 피해 규모나 피해자 명단을 공식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언론은 공식 발표를 존중하되 최대한 검증한 후 보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 합당한 원칙들이다.
문제는 책임 있는 당국이 피해자 명단을 공식 발표하지 않을 경우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재난보도준칙 제11조 본문 후단이 알려준다. “(피해자 명단 등의) 공식발표가 늦어지거나 발표 내용이 의심스러울 때에는 자체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라는 것이다. 재난보도준칙에 따르면 지금은 정부가 명단 공개를 대놓고 거부하는 상황이라 언론이 취재과정에서 입수한 신뢰할 만한 사망자 명단을 공개한 것이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 당연하다. 사고나 참사가 일어났을 때 누가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재난보도의 초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항이다. 애도 추모도 진상규명도 책임추궁도 이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가 당국의 신원확인 절차를 거쳐 확정되고 그 사망사실이 유족에게 통보된 이상 정부가 명단 공개를 지체할 때 언론에 의한 명단 공개는 공적 의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규범적 제약은 언론이 사상자 신원을 파악하고 있더라도 유족이 공식당국으로부터 공식통보를 받은 후가 아니라면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족의 죽음을 공식당국의 통보가 아니라 신문방송, 특히 속보를 통해 알게 하는 건 유가족에게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를 거부할 때 언론이 유가족의 동의나 허락을 받아야만 그 명단을 보도할 수 있다는 취지의 국내외 가이드라인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유가족 동의를 명단공개거부 핑계로 쓸 뿐이다
참사 피해자 명단 공개에 유족 동의가 필요하다는 정부 주장은 규범적으로 뜬금없다. 무엇보다도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망자 명예훼손의 경우와는 달리 개인정보보호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런 규정이 없다. 그렇다고 언론계가 정한 재난보도준칙으로 권장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알아봤듯이 재난보도준칙은 사망자명단이 중대한 공적 정보에 속하기 때문에 정부 당국이 정확성을 책임지고 신속하게 공식 발표할 것을 요구하며 공식발표가 이유 없이 지연되면 언론이 자체 취재를 통해서라도 정확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관련 당국이 모든 유가족에게 사망 또는 실종을 통보한 시점부터는 공식발표가 지연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언론이 사망자 명단을 자체적으로 공개해도 무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의 국무총리와 법무장관, 여당대표와 원내대표는 입을 모아 유가족의 동의가 없는 명단 공개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정부의 명단 공개 거부 방침을 옹호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정부의 명단 공개 거부 방침이 과연 유가족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는가? 유가족의 뜻을 따른다는 건 무슨 뜻인가? 모든 유가족에게 일일이 이름 공개에 동의하는지 물어봤더니 다수가 반대하였다는 뜻인가? 이것이 인권문제라면 다수결로 결정할 사항인가? 사회적 애도를 원한다는 이유로 동의해준 유가족의 의사는 묵살되어도 되는가? 유가족이 동의해준 사망자 명단이라도 공개해야 맞는 것 아닌가? 질문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유가족에게 동의 여부를 물은 사실이 없다. 유가족 중에는 명단 공개를 강력하게 원하는 분들도 많다. 이분들의 뜻을 존중해서 부분공개라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유가족 동의 운운은 정부가 만들어낸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희생자의 개인정보보호와 유가족의 2차 피해 방지라는 공익적 목적과 동기로 명단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는 정부라면 사망자 명단을 일반 공개하지는 않더라도 유가족들에게는 알려줘서 서로 소통하고 위로하며 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하도록 지원할 것이다. 과연 그러고 있는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유가족들끼리도 서로 몰라서 공동대응을 못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정부가 노리는 바다.
정부의 희생자 명단 공개 거부가 원죄다
실은 유족들의 공동대응을 막고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게 사망자 명단을 비공개해온 정부의 속셈이다. 정부는 명단 공개 거부 방침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나? 아니다. 공식추모비를 세울 때 당연히 희생자 명단을 새겨 넣어야 한다. 그 전에라도 언론 등 제3자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공개를 신청하면 공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개 거부이고 무엇을 위한 공개 거부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야바위 공개 거부가 통할 것인가.
이제 결론을 맺자. 유가족 동의를 받지 않고 사망자 명단을 공개했다고 시민언론 민들레를 비난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정부가 사망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유가족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현실적으로 도무지 맞지 않는 요구이고 비판이다. 분명하게 말하자. 원죄는 유가족의 집단행동을 최대한 막고 정치적 책임을 최대한 덜기 위해 윤석열 정부가 마땅히 공표해야 할 사망자 명단을 비공개한 데 있다. 그렇다면 인권침해 비난 역시 국민의 알권리와 유족의 연대 권리를 침해하는 윤석열 정부의 느닷없는 비공개 방침에 집중되어야 한다. 적반하장의 억지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