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망언을 비판 못하는 주류 언론의 망신

윤 대통령 ‘무릎’ 발언, 시민사회·여야 할 것 없이 비판

주류 언론들, ‘단순 말실수, 정제 안된 발언’으로 심각성 축소

‘망언’을 ‘논란’이라며 오히려 ‘정쟁 삼지 말라’ 야당 비판

교묘한 '프레임 바꾸기'로 권력 감시·비판 의무 방기해

2023-04-27     김성재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의 무게를 갖는다. 대통령의 말과 생각은 국민 개개인의 삶,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언론이 대통령의 말에 늘 주목하고 토씨 하나까지 챙겨 보도하면서 역사에 기록하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외신 인터뷰에서 ‘100년전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어라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한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망언과 한국의 대통령의 발언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시민사회와 야당이 ‘일본 총리 발언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다. 여당조차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꼬리를 내렸다.

언론은 이번 윤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 언론은 윤 대통령 발언의 의미, 맥락의 사실관계, 파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단순 말실수’나 ‘오해받을 만한 발언, 정제되지 않은 발언’ '논란거리' 정도로 심각성과 파장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한술 더 떠서 ‘망언’ 수준의 이번 발언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을 오히려 ‘국익을 해치는 정쟁’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주요 신문들의 사설, 그 신문의 공식 입장이라는 사설을 보자. <중앙일보>는 26일 ‘신중해야 할 대통령의 외교언사…취지 오해받는 일 없도록’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실 설명대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한 발언의 취지엔 공감할 부분이 있다, 한일 협력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윤 대통령의 생각도 이해한다’고 윤 대통령의 발언을 감싸고 나섰다. 그러면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지적에도 일리가 있다’, ‘국민의 감정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등 마치 이번 발언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말실수’였던 것처럼 표현했다. 이번 윤 대통령의 발언은 과연 ‘단순 말실수’인가? 진의를 몰라주고 오해한 국민의 잘못인가?

 

<중앙일보>는 또 ‘번역과정 오역’이라는 국민의 힘 수석대변인의 틀린 주장, ‘바이든-날리면’ 비속어 논란을 거론하며, 이번 윤 대통령 발언을 한낱 ‘논란거리’로 치부하고는 결국 ‘이번 WP 인터뷰 논란이 좋은 예방주사가 되길 바란다, 야당 역시 대통령의 국익외교에 흠집만 내려는 지나친 정치공세는 자제해야 마땅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통령의 ‘망언’ 수준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따져 묻는 비판은 없고, ‘논란이 있으니 대통령은 말실수에 조심하되, 정쟁으로 삼지 말라’는 주장이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 ‘대통령 말실수만 기다리는 野, 불필요한 구설 만드는 대통령’ 제목의 사설에서 비슷한 시각을 드러냈다. ‘민주당이 나라 외교는 제쳐두고 말실수만을 찾고 기다리고 있다’고 오히려 야당의 비판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너무 많은 말을 한다. 말은 줄이고 실천을 할 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 걸러서 정제되게 했으면 한다’고 썼다.

<문화일보>의 ‘살얼음 외교 더 위태롭게 할 윤 대통령의 정제 안된 발언’ 사설이나 <세계일보>의 ‘가짜뉴스·인터뷰 오역 주장까지, 정상외교 정쟁 도 넘었다’ 사설 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일보>는 ‘대통령 일 무릎 발언에 오역 주장까지, 메시지 관리문제’ 제목의 사설에서 야당에게 ‘정쟁으로 여기지 않기 바란다’면서 대통령의 ‘논란’ 발언이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의 기본적 역사인식, 역사에 관한 철학의 문제가 아닌 ‘메시지 관리’의 문제로 지적했다.

교묘한 ‘프레임 바꾸기’식 주장이다. 이번 윤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는 망언’이란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유럽에선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다’는 발언이 역사적 무지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은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세계사에 관한 무지와 한일관계에 대한 반민족적 사고방식을 드러낸 것이지 ‘단순 말실수’가 아니다.

대통령이 단지 ‘신중하지 못해’ 나온 그런 말실수로 보기도 힘들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는 기자의 질문에 ‘얼떨결에’ 답변하는 행사가 아니다. 언론인터뷰 답변, 기자회견, 회의 발언, 연설 등 모든 발언은 연설비서관을 포함한 여러 참모가 참여해 사전에 초안을 작성하고 다듬고 확인한 뒤에 진행된다. 이런 과정도 없이 대통령이 외신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면 언론은 참모진을 징계하고 교체해야 한다고 비판해야 한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준비하고도 대통령이 기자의 질문에 ‘얼떨결에’ 답변하다가 이런 망언을 했다면 대통령으로서 심각한 자질 문제를 비판했어야 한다.

언론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정확성, 진실성, 역사성, 합리성을 따지고 그것이 우리 국민과 국가에 어떤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인지 판단해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고 의무다. 국내 정치나 정책 관련 발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는 외교적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배경과 맥락, 파장 등에 대해 더 올바르게 분석·평가하고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 대통령의 망언도 문제지만, 권력을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언론의 망신도 나라를 위험하게 만든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