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이라는 허상 - 미국과 영국의 경우

이해타산에 철저한 미국을 착한 국가로 맹신

영국의 ‘특수관계 환상’과 그로 인한 굴욕

2023-04-26     김평호 미국 톺아기

(본 컬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1941년 12월 13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6일 후, 영국 수상 처칠은 전함 요크에 몸을 싣고 워싱턴으로 향한다. 열흘 동안의 항해 끝에 버지니아 노포크 군항에 도착한 수상은 바로 워싱턴 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이후 한 달 가까이 백악관에 머물며 처칠은 루스벨트와 함께 2차 대전을 어떻게 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린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한 배에 탄 운명이다. 이 배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가라앉을 수도 없다.”

그의 방문은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도 온다는 손님이 도착해서야 처칠임을 알 정도로 극비였다. 이후 처칠은 네 차례 더 미국을 방문한다. 백악관에 또는 뉴욕 하이드파크에 있는 대통령 사저에 묵을 때도 있었다. ‘세계를 구한 우정’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특별한 관계’였다. 처칠은 양국이 ‘결혼한 사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처칠과 루스벨트. 1943년 5월 24일. 백악관(AP Photo)

1945년 4월 12일. 2차 대전 마지막 무렵. 불과 63세의 나이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사망한다. 장례는 4일장. 그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 사실상 연합군의 2차 대전 총 지휘자였다. 그의 사망에 즈음해 처칠은 그를 “위대한 미국인이자 영국의 가장 위대한 동지”라고 애도를 표했다. 그런데 정작 루스벨트의 장례식에 처칠은 참석치 않았다. 두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얄타 회담장이었다. 처칠은 회담이 끝나고 헤어지면서 “아, 이 분을 다시 못 볼 수도 있겠구나”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훗날 털어놓았었다. 회담 두 달 뒤 루스벨트는 사망하고 처칠은 장례식에 가지 않았으니 그의 느낌은 기어이 현실이 되었다.

왜 처칠은 루스벨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을까? 궁금해하는 언론의 질문에 영국 정부는 전쟁 중이고, 상당수 각료들이 마침 해외출장 중인 상황에서 수상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일까?

영국의 굴욕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다. 이틀 후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압도적 전력과 전격전에 밀려 영국과 프랑스 군은 40년 5월 덩커크에서 철수하고 프랑스는 한 달여 뒤 항복한다. 그즈음부터 다음 해 5월까지 거의 1년간 전쟁은 영국과 독일 사이의 대결로 집중된다. 덩커크 철수 이후 7월부터 넉 달 가깝게 이어진, ‘영국전투(battle of Britain)’로 불리는 영국과 독일 공군의 공중전, 9월부터 11월까지는 57일 동안 쉼 없이 이어진 런던공습, 그리고 다음해 5월까지 ‘번개(blitz)’라는 이름으로 계속된 공습.

악전고투 속에 전쟁을 이끌던 처칠은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무기와 장비 지원을 요청한다. 그런데 미국은 ‘현금거래(일명 cash and carry)’를 고집한다. “‘중립 유지법’ 때문에 군수물자를 무상으로 지원할 수 없다” “영국의 항복이 예상되는데 그 경우 독일에게 무기를 바치는 꼴이라며 군부가 반대한다” “유럽 전쟁에 개입치 않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됐는데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등등.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영국의 눈에 국내 사정을 들이대는 루스벨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샤일록’이었다.

3개월여의 줄다리기 끝에 거래가 이뤄졌다. 미국은 자신들이 쓰지 않는 중고 구축함 50척을 주고, 영국은 대영제국 시절에 개척한 캐나다 뉴펀들랜드와 카리브해의 여러 해·공군기지를 99년 무상조건으로 대여해준다. 영국은 자신의 미국 내 자산을 헐값으로 판다. 긴급한 상황에 재정도 바닥난 영국으로서는 무자비한 불평등 거래에 울분을 터트렸다. 외무장관 A. 이든은 “사정이 딱하니 우리가 이렇게 당하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중앙은행장은 “우리가 미국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며 탄식했다. 처칠도 사석에서는 미국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12월,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항의서한을 보낸다. “미국은 우리의 피와 땀으로 전쟁을 이기고 영국은 벌거벗겨진 상태로 떨어지는 중이다. 가진 돈이 없는 영국에게 미국의 요구는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도 양국에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루스벨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41년 3월 ’무기 대여법‘을 제정한다. 말 그대로 군수물자를 빌려주는 것으로 무상대여 부분도 있고 돌려받는 것 역시 대폭 할인되는 형식적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대여는 어디까지나 대여였다. 2차 대전 중 대여법에 따른 영국의 대미 채무는 2006년 12월이 돼서야 완결되었다. 그만큼 미국의 계산은 철저했다.

‘특수관계’라는 환상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인 M. 헤이스팅스는 1930년대 이래 영-미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국과 미국이 특수한 관계라는 생각, 즉 미국이 영국에 대해 우호적 조처를 취해줄 것이라는 기대, 그것은 환상이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별 까닭도 없이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상황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면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과의 문제에서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관계 설정이 잘못되는 정책실패를 범한다. 그는 이를 양국이 이해와 가치를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미국을 만족시켜줘야 한다는 영국의 고정관념이 당혹스럽고 때로는 굴욕적인 사태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과 다른 길을 선택한 사례도 없지 않다. 1960년대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영국에 베트남 전쟁 참전을 요청했다. 윌슨 수상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국무장관 D. 러스크는 “소련이 영국을 침략한다 해도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며 극단적인 불쾌감을 표했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대처 수상 역시 남달랐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아르헨티나 군부와 함께 남미 전체를 아우르는 반공전선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 몬로 독트린 이래 미국은 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으로 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미국은 포클랜드 침공을 반대했고 영국에 압력을 넣었다. 대처는 압력을 뿌리쳤다.

이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잘못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양국 외교 관료들 간의 개인적 불쾌감 표현 수준에서 문제는 정리되었다. 그러나 ’단호한 영국‘은 예외적인 경우다. 이해타산에 철저한 미국을 착한 국가로 믿는 영국의 ‘특수관계 환상’과 그로 인한 굴욕은 계속된다.

오만한 미국?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영국의 경제나 군은 사실 형편없는 상태였다. 미국은 그런 영국에게 한국전쟁 지원을 요청하면서 GDP 대비 14% 국방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당시 애틀리 정부는 10%로 하겠다고 했지만 미국의 요구는 그렇다면 전후 회복을 위한 재정원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14%로 올렸으나 재정지원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10% 방침으로 되돌아갔다. 그것도 사실 영국으로서는 벅찬 것이었다. 한 경제학자는 “영국정부는 미국에 굽실대면서 전후 경제 부흥의 책임을 저버렸다. 왜 이런 식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질타했다.

1956년에는 수에즈 전쟁이 벌어졌다. 그해 7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아스완댐 건설 재원마련을 위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앞장서고 프랑스와 영국이 합동으로 이집트를 침공한다. 미국은 이들의 즉각 철군을 요구했고 그러지 않을 경우 경제제재를 가하겠다고 선포했다. 결국 침공 두 달여 만에 영국을 비롯한 침략군들은 철수해야 했고 수상 A. 이든 역시 사퇴해야 했다. 여기서 문제는 미국 정부의 태도가 제국주의적 행태 반대, 민족자결 같은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영국이 자신들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도 항상 대통령과 함께하겠습니다.’ 2002년 7월, 부시에게 보낸 블레어의 메모.

2003년 수상 T. 블레어는 ’부시의 강아지(Bush’s poodle)‘라는 전 세계적 모욕을 견뎌야 했다. 대량살상무기라는 있지도 않은 거짓명분을 복창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가장 앞장 서 부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전쟁 홍보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적극적으로 뛰었다. 블레어는 그러면서 부시 대통령에게 중동 평화특사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자청했었다. 부시는 그에 대해 “그건 우리 국무장관이 알아서 할 일이야”라는 식으로 답했다. 블레어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윤허를 받기 위해 부시에게 머리 숙인 모욕적 형국이 돼버린 때문이었다.

미국의 오만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1991년부터 94년까지 주영 미국대사를 역임한 R. 사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영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영국이 유럽에 영향력을 가진 존재일 때뿐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말라.” 달리 말하면 호의적 관계라고 해서 특별한 이유 없이 미국이 영국에 어떤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유럽은 미국의 신하?

되짚어보면 루스벨트와 미국은 처칠과 영국을 대체로 무시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미국을 희망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병기창’이라고 불렀지만 미국의 민낯은 언제든 이해타산에 철저한 존재였다. 처칠이 루스벨트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눌리어져 버린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큰 응어리를 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4월 초, 유럽 외교연구회(Europe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ECFR. 유럽연합 소속기관처럼 보이지만 G. 소로스를 비롯한 여러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된 독자적 싱크탱크)는 브리핑 자료에서 미국의 ‘봉신국가화(vassalisation)’ 되어가는 유럽의 신세(?)를 우려하면서 유럽 나름의 독자성 확보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안보와 경제, 기술 영역에서 유럽이 워싱턴을 지도자로 모시는 관행을 문제 삼은 것. 연구회는 미국이 이젠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밑으로 줄들 서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면서 “유럽이 미국의 신하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따끔한 충고를 던졌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가를 놓고 늘 계산서를 뽑는다. 국가이익이 약속과 신뢰, 관계의 의미, 역사적 맥락보다 앞선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가치외교.’ ‘동맹’ 또는 ‘혈맹’ 운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익이 함께 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며 실제로는 명분과 선전의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기대어 자신의 운명을 저울질하는 자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존재이다. “미국의 적이 되면 위험한 정도지만, 미국의 친구가 되면 치명적이다.” 키신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 말은 두고두고 유념해야 할 경고다.

사족: 처칠은 1965년 사망했다. 존슨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치 않았다. 이유는 폐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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