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도청] '도청'을 '도청'이라 하지 않는 언론
보수 언론이 헛다리 짚은 다섯 가지
미국은 원래 그래! 하필 이때 터져서!
국빈방문 앞이니 쉿! 안보 취약 모르쇠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대통령실 도청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제2의 한일 굴종 외교'라고 할 정도로 극도의 저자세다. 그러나 이를 질타하고 비판해야 할 한국 언론은 도청이 아닌 ‘감청’ 사건으로 명명하는 것에서부터 나라 간의 ‘정보전’ 와중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로 규정하는 등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
언론이 짚어야 할, 그러나 제대로 짚지 않는 점을 5가지로 나눠 따져본다.
1. 감청이 아닌 ‘도청’이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대한민국 대통령실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 의혹에 대해 ‘도감청’이라는 용어 대신 ‘도청’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는 다수의 언론이 이를 ‘감청’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용어 사용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도청과 감청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텐데 굳이 이에 대해 도청이 아닌 감청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도청(盜聽)은 글자 그대로 범죄행위다. 이에 반해 국내법상 ‘감청(監聽, monitoring)’은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서 할 수 있는 행위다. 국가 간에 적법한 행위로서의 감청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모두 ‘도·감청’도 아닌 ‘감청’으로 규정했다. 대통령실도 “미국의 ‘감청’ 정황”이라고 해 감청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대통령실과 언론 어느 쪽이 먼저인지 따져보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상호간에 잘못된 용어 사용을 전파시키고 있다. 조선 중앙 동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논조를 펼치는 한국일보도 감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감청이라는 용어로 이들은 미국의 불법 행위를 사실상 합법화시켜 주고 있다.
‘도청’이라는 용어를 쓰는 곳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뿐이다. 잘못된 명명에서부터 이번 사건에 대한 대응이 길을 잃고 있다.
2. 미국은 원래 도청을 한다?
“미국은 늘 도청한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를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1일자 1면에 ‘외교안보 원로’라는 이들의 말을 빌어 “정보전엔 피아 따로 없어”라는 제목으로 “우방끼리 첩보전을 펴는 건 공공연한 비밀로 흥분할 일이 아니다”라고 썼다. 사설에서는 뜬금없이 “우리의 첩보 능력을 키우자”는 ‘자강론’을 꺼내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강대국으로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라고 해서 늘,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도청하는 것은 아니다. 늘 도청하는 것이 아니라 늘 도청하려 하지만 어떤 상황이냐, 어떤 상대냐에 따라 도청을 실행하기도 하고 실행하지 못하기도 하며 극도로 자제하기도 한다. 나라와 나라 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국제조약과 규범들에 의해, 또 도청이 들켰을 때 지게 될 위신의 추락과 상대국에 지게 될 부담에 따라 ‘도청 의지’를 ‘도청 실행’으로 옮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감청이라는 용어도 그렇지만 ‘미국은 늘 다른 나라를 도청하는 나라’라는 주장은 이번 사태를 호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와도 다른 설명이다.
3. 한미동맹 훼손 안 되게 하려면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동맹국 간의 관계가 종속적 일방적이냐 대등 수평한 관계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대등한 행동이 나오는 게 아니라 대등하게 행동하면 좀 더 대등한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과거 미국으로부터 이번과 같은 도청 피해를 입었던 다른 나라들, 독일 프랑스 브라질 등은 2013년 10월 미국 국가안보국의 도청이 폭로됐을 때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대통령실의 대응은 “한미 동맹을 흔들 만한 사안은 아니다”라며 사태를 진화하려는 발언부터 내놓았다. 미국에 따지기는커녕 미국 측을 감싸고 변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를 한미관계, 특히 이달 말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돌발 악재’가 터졌다고 보도했다. “그간 미국이 동맹국을 대상으로도 도감청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는 노출 시점이다”라고 했다. 노출 시점이 미국 방문을 앞둔 시점만 아니라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인가. 또 이것이 ‘악재’ 정도의 사안인가. 심지어 11일자에선 “일각에선 러시아가 이번 사건의 배후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러시아 배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중앙일보에 이번 사건은 도청 사건인가, 아니면 폭로되지만 않았으면 도청해도 문제가 안 되는 한미 동맹 관계에서 도청이 드러나버려서 문제인 ‘노출 사건’인가.
4. 미국 국빈방문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사건에 대한 대응의 수위를 어떻게 잡든 미국 측에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 그 출발이다. 공동 조사 요구까지도 검토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과 협의하겠다는 입장만 내놓고 있다. 도청당한 쪽에서 협의하겠다 하니 도청한 쪽에서 협력하겠다며 마치 이를 ‘허락’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 같은 저자세에 대한 질타는 없이 국빈방문에 미치는 영향만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빈방문 신중론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어서 방문을 위한 선행 조건의 요구, 선 조사와 조치 후 방문, 무기한 연기 등의 방안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언론들은 “그렇다면 동맹국 방문을 하지 말자는 것이냐”는 극단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해버리고 만다. 방미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동맹국 간의 정상외교다운 여건을 조성하고, 그래야 방미 성과도 제대로 올릴 수 있다는 주장을 극단적인 방문 포기론으로 과장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무조건적인 방미냐 방문 철회냐, 극단적인 두 개의 상황 사이에 여러 해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언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5. ‘대통령실 용산 이전 안보 공백’, 국기를 흔드는 일 아닌가?
한나라 정부의 심장부가 뚫렸다는 것은 조선일보나 국힘당이나 윤 정부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을 빌자면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안보 취약점이 드러난 것에 대해 언론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있다. 언론 스스로가 국기를 흔드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