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도청] 뭉개기 넘어 전면 부정…덮어씌우기까지
사태 축소에 급급, 미국 정부 대신 총대 멘 형국
미국도 "도청 없었다" 못하는데 주객전도 자초해
백악관 "문서 유출 변명의 여지 없어…매우 심각"
대통령실은 "거짓 명백"…이틀 만에 진상조사 끝?
"한미동맹을 흔드는 행위" 협박성 정치 공세까지
용산 이전 당시 국민의힘 의원도 도청 우려 제기
미국 정보기관 도청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대통령실이 미온적인 '뭉개기'를 넘어 적극적인 '사실 부인'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사태 축소에 절치부심하다 급기야 미국 정부 대신 총대를 메는 형국이다.
정작 미국 정부는 온라인에 유출된 기밀 문서들의 포맷(형식)이 고위급 인사들에게 제공되는 보고 문서와 유사하다며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는데, 피해자인 한국 정부가 오히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공식 입장을 낸 것이다. 미국 정부 스스로도 "도청은 없었다"고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신중하고 면밀하게 사태에 접근하기는커녕 앞장서서 '전면 부정'에 나선 것은 전형적인 '주객전도'에 해당한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뭐에 쫓기듯 서둘러 도청 파문을 진화하려는 시도는 보름 앞으로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11일 오전 대변인실 명의 언론 공지에서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 관련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을 알려드린다"며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했다. 이어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 운용 중"이라며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안보실 등이 산재해 있던 청와대 시절과 달리, 현재는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더불어민주당은 진위를 가릴 생각도 없이, '용산 대통령실 이전'으로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식의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을 선동하기에 급급하다"며 "이는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핵 위협 속에서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 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고 역공을 가했다. 그러면서 "한미 정보 동맹을 강화하고 발전시켜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더불어민주당의 외교 자해행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해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며 "앞으로 굳건한 '한미 정보 동맹'을 통해 양국의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앞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최종 조율을 위해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면서 취재진에게 비슷한 입장을 설명했다. 김 차장은 '미국 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전달)할 게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위조를 한 것이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통령실 발표는 미국 정부 브리핑 내용과 사뭇 다르다. 미국 정부는 10일(현지시간) 유출된 기밀 문건들의 문서 형식이 보고 문서와 유사하다고 확인하면서 이번 사건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존 커비 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이 문건들은 공공 영역(public domain)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이런 종류의 문서가 (유출돼) 공공 영역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우리는 끝까지 조사해 필요한 조치가 있으면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출된 문서 내용 중 위조된 것도 있냐는 질문에는 "온라인에 있는 일부 문서 내용은 우리가 진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고친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문건을 비롯해 모든 문건이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문건 유출의 배후와 의도 등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사안을 본 지 며칠밖에 안 됐다"며 "누가 그랬는지, 동기가 무엇인지, 추가로 더 있는지 등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모른다. 법무부가 이 사안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의 보좌관인 크리스 미거는 기자들과 만나 "(유출된) 문서는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관련 작전 등에 대해 우리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제공된 일일 정보 보고와 비슷한 형식(포맷)"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출된 문서가 진짜인지에 관해 확인은 하지 않으면서 "일부의 경우는 변경된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문서 유출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심각하게 사안을 보고 있고, 문서 양식이 기존 고위급 정보보고 포맷과 비슷하다고 판단하며, 진상을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한 것이다. 일부 문서가 수정 또는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을 뿐 모든 문서가 가짜라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도청한 적이 없다는 입장은 어디서도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 대통령실은 미국 언론들의 관련 보도가 쏟아진 지 이틀 만에 진상 조사를 다 끝냈다는 듯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벌써부터 단정 지은 것이다.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는 발표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상당수'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위조됐다는 문서를 직접 원본 문서와 대조해서 확인했다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실 입장문이 더 악성인 것은 도청 의혹 제기를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 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고 간주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해 애초 해당 기사를 보도한 미국 유수 언론들도 한미동맹을 흔드는 세력이라는 건지 덮어씌우기도 황당한 수준이다. 미국 언론 보도대로 문제의 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에 "전화와 메시지 등 통신 감청을 뜻하는 신호정보(SIGINT·시긴트)를 통해 나온 정보"라는 점이 명시돼 있다면 용산 대통령실 이전 과정에 보안상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냐는 추정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국회 국방위·외통위·정보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전날 국회에서 가진 합동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실을 정부 출범일에 맞춘답시고 국방부를 대통령실로 급히 꾸리려다 보니, 보안을 강화하는 벽면 공사 등을 새롭게 하지 못했고 보안 조치 공사나 리모델링 등도 짧은 기간의 수의계약 방식으로 급하게 이뤄졌다"며 "공사에 필요한 자재나 장비에 대한 보안 조치와 확인이 부족했고, 공사 인력에 대한 신원조회도 정식으로 하지 못하고 서약서만을 받는 등 졸속으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 대통령실 담벼락 바로 옆에는 주한미군 기지가 있다"면서 "대통령실과 미군 기지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우리 대통령실의 방첩 조치와 보안은 취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이 같은 보안상 우려는 용산 대통령실 이전 당시 국민의힘에서도 제기됐던 것이다. 지난해 5월 4일 열린 이종섭 국방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가정보원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대통령실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이 자재를 나르고 돌아다니는 어수선한 모습의 사진을 제시하며 "내가 만약 외국의 정보기관원이면 저기다가 도청 장치를 설치했을 거다. 보안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도청 문제를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에 육군 중장 출신인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도 "김 의원의 말씀에 동의한다"고 적극 호응했다. 신 의원은 "대통령 경호처에서 하는 수준으로 (공사) 인부당 기무사 요원을 붙여서 인부들이 불쾌하지 않게 잘 체크했으면 좋겠다"며 "공사가 끝나고 나면 현 시설에 대해 아주 강도 높은 보안 진단을 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번 김성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 등에 대한 도청 보도에 대해서도 여당에서 "미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사과도 요구해야 한다"(하태경 의원), "러시아가 이런 문제까지로 조작정보를 하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팩트일 가능성이 더 많다"(홍석준 의원)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 동맹국간의 도청이라는 엄중한 문제를 흐지부지 지나갈 수는 없다"(유승민 전 의원) 등의 발언이 줄을 이었다.
대통령실이 언급한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 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는 규정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런 대통령실의 주장이야말로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을 선동하기에 급급'한 협박성 정치 공세로 읽힌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본청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지금 대통령실이 말하는 '동맹을 흔드는 세력'이 대체 누구냐?"며 "처음 이 내용을 보도한 외신인가? 이를 받아쓴 국내 언론인가? 아니면 국가적 위기를 막고자 신속한 점검과 대책 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야당 국회의원들인가?"라고 따졌다. 그는 "안보 컨트롤타워인 대통령실 전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의 대화가 그대로 털렸는데, 또다시 '엉뚱한 곳'만 탓하니 기가 막힌다"면서 "심지어 여당 대표는 '제3국 개입설'까지 제기하며 전형적인 물타기에 나섰다. 문제가 된 도청을 미국이 아닌 제3국이 해서 미국에 넘기기라도 했다는 말이냐"고 개탄했다.
김민석 정책위의장은 "미국이든 천공이든, 대한민국 국민을 대리한 최고 권력과 최고 기밀을 넘나드는 의혹의 씨앗을 완전히 걷어내야 한다"며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 비서실, 대통령 관저의 투명한 공적 운영과 유지에 대한 '대통령실 3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켜서 앞으로 모든 국내외적 불법 기밀 유출에 대비하겠다"고 예고했다.
박성준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대통령실은 '견해가 일치했다'라는 모호한 소리 하지 말고 보도된 문건이 모두 위조된 것이고, 미 정보기관의 도청은 일절 없었다는 말인지 분명하게 답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도청당한 것보다 이에 대처하는 용산 대통령실의 태도에 더 분노한다"면서 "무슨 일만 터지면 사실을 부인하고 남 탓하며 책임 회피에만 골몰하는 윤석열 정부의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