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타고 ‘노리’와 ‘시위드’ 물리치려는 ‘김(Gim)’
김 국제 표준화 추진하며 ‘Gim’으로 영문명 정해
국제적으로 일본어 ‘Nori’, 영어 ‘Seaweed’ 통용
한류 덕에 국산 수출 급증…세계 시장 70% 차지
김밥도 ‘Kimbap’ 아닌 ‘Gimbap’으로 표기 바꿔야
각 분야에 일본어가 국제 통용어 된 사례 수두룩
태권도는 가라테를 누르고 국제 표준 자리매김
해양수산부가 국산 김의 국제 표준화 작업에 착수하며 공식 영문 명칭을 ‘Gim’으로 정했다. 지금까지 김은 국제적으로 일본어인 ‘노리(のり·Nori)’나 영어의 ‘시위드(Seaweed)’로 통용돼 왔다. 한국산 김은 수출용에 대부분 시위드로 표기하고 있으나 노리라고 적은 제품도 적지 않다.
최근 세계 시장에서 치솟고 있는 국산 김의 인기를 감안하면 김이란 용어가 노리를 제치고 국제 용어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더욱이 노리는 통상 ‘김(海苔)’으로 번역되지만 사전적으로는 ‘수중 암석에 붙어서 이끼 모양을 이룬 해초의 총칭’을 뜻한다. 시위드 역시 김과 미역 등 해조류를 통틀어 일컫는 단어다.
“검은 종이 먹였다”며 미군 포로 학대 주장
올해 3분기까지 우리나라의 김 수출액은 8억 8233만 달러(약 1조 26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14%가량 늘었다. 당초 2027년까지로 잡은 10억 달러 목표를 2년 앞당겨 달성하게 된 것이다. 2020년 6억 달러 수준이던 김 수출액은 코로나19 영향으로 2022년 잠시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해마다 급증해 10년 전의 약 4배 규모로 커졌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직접 사들고 가는 물량도 만만치 않다. 백화점과 면세점 식품 코너나 대형마트 등에는 김을 사려는 외국인이 줄을 잇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경주를 찾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국산 김을 선물하기도 했다.
K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소개된 한국산 김은 최근 친환경, 채식, 다이어트 건강식품으로 소문이 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등장인물들이 김밥을 먹어 치우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산 김은 김밥용 김이나 반찬용 조미김 말고도 샐러드나 튀김 등의 요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김 스낵 제품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김은 K푸드의 대표 상품이자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란 뜻으로 ‘검은 한류’, ‘검은 반도체’란 별명을 얻었다. 한국산 김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에 이른다. 가장 많이 사간 나라는 일본, 미국, 중국, 태국 순이다.
김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일본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만하다. 미국에서의 인기도 놀랍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렸을 때 미군 측은 포로 학대의 증거물로 김을 제시하며 “검은 종이를 억지로 먹였다”고 주장했다.
17세기 김여익이 태인도에서 인류 최초로 김 양식 시작
김 양식의 출발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50년 이상 앞선다. 비문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김여익은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탄을 금치 못하고 1640년 전라도 광양 태인도에 들어가 은둔하던 중 해변에 밀려온 나뭇가지에 해초가 붙은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를 응용해 바다에 떠다니는 포자가 잘 착상하도록 갯벌에 나뭇가지를 세우는 ‘섶꽂이 방식’의 김 양식법을 1643년 인류 최초로 창안했다. 그는 김 건조법도 개발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경상도지리지’ 등 옛 문헌에는 김을 ‘해의(海衣)’라고 기록해놓았다.
태인도에서 생산된 김을 임금에게 진상하자 그 맛에 매료된 인조가 창안자의 성을 따서 ‘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 시식지(始植地) 태인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인호사와 재실 영모재가 있으며, 김 역사관과 유물전시관도 들어섰다.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후손들이 인호사에서 제향을 올린다. 정월 대보름에는 주민들이 김 풍작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용지큰줄다리기를 펼친다.
김 양식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김을 잘 먹지도 않는 영국인이었다. 여성 식물학자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가 홍조류(紅藻類)를 연구하며 1949년 김의 생명주기를 밝혀내자 일본은 이를 토대로 김의 인공 파종 기술을 확립해 대량 양식에 성공했다. 일본에서는 드루베이커를 ‘김 양식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Gim’으로 밥을 싼 음식이 ‘Kimbap’이라고?
‘Gim’을 국제 용어로 정착하게 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김을 재료로 한 대표적인 K푸드 김밥은 국제적으로 ‘Gimbap’ 대신 ‘Kimbap’으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Gimbap’이 맞지만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는 ‘Kimbap’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올곧의 냉동 김밥 상품명도 ‘Kimbap’이다.
규범 표기에 따른 교체 작업이 일제히 이뤄지지 못하는 바람에 한동안 부산국제영화제(PIFF: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Pusan’이 아닌 ‘Busan’에서 열려 외국 참가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일화가 떠오른다. 김을 ‘Kim’이라고 쓰면 규범 표기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한국인이 흔히 쓰는 성씨와도 같아 혼란을 준다. PIFF를 뒤늦게 BIFF로 바꿨듯이 ‘Kimbap’도 ‘Gimbap’으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이나 중국이 먼저 개발한 식품인데도 일본어가 국제 용어로 자리 잡은 사례는 김 말고도 많다. 대표적인 동아시아 콩 제품인 두부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발됐다. 우리나라 문헌 가운데서는 고려 말 이색이 지은 ‘목은집’에 처음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박호인이 두부 제조 기술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부를 일컫는 국제용 단어는 한자 두부(豆腐)를 일본식으로 음독(音讀)한 ‘도후(とうふ·Tofu)’다. 김치도 이제는 ‘Kimchi’로 통용되고 있지만 한때 일본식 발음인 ‘기무치(キムチ·Kimuchi)’로 해외에 소개되기도 했다. 된장과 된장국도 일본어인 ‘미소(味噌·Miso)’와 ‘미소시루(味噌汁·Misosiru)’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김치와 기무치가 딴 식품이듯이 일본식 된장인 미소도 한국식 된장과 엄연히 다르다.
한국의 특산품인 인삼(人蔘)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진셍(Ginseng)’이라고 부른다. 1843년 세계식물학회에 러시아 학자 칼 안톤 폰 메이어가 인삼 학명을 ‘Panax ginseng C. A Meyer’로 등록하며 공식화됐다.
일본어 기원설과 중국 기원설도 있지만 중국 남부 방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금산인삼약초산업진흥원과 인삼 세계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전 세계 영어사전에 ‘인삼(Insam)’이란 단어를 등재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구글이 바둑 프로그램을 알파고로 명명한 까닭
식품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식 용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바둑을 중국에서는 웨이치(圍棋·围棋), 일본에서는 고(碁)라고 한다. 바둑은 중국에서 기원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으나 서양에는 일본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바둑을 뜻하는 영어는 ‘고(Go)’다.
만일 한국이나 중국이 바둑의 세계화에 앞장섰다면 2016년 프로기사 이세돌과 5번기 대결을 벌여 전 세계인의 시선을 집중시킨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명칭은 ‘알파고’가 아니라 ‘알파바둑’이나 ‘알파웨이치’가 됐을 것이다.
불교식 명상법이자 수련법인 선(禪)도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한국식 발음인 ‘선(Seon)’이나 중국식 발음인 ‘찬(Chan)’ 대신 일본식의 ‘젠(Zen)’을 쓴다. 도력 높은 승려를 일컫는 선사(禪師)도 영어로는 ‘젠 마스터(Zen master)’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디자인, 인테리어 등으로도 의미가 확장돼 간결하고 자연친화적이고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동양적인 분위기를 ‘젠 스타일’이라고 한다. ‘젠 패션’, ‘젠 가구’, ‘젠 거실’, ‘젠 여행’으로도 파생됐다.
이런 경향에 맞서 한국식 이름찾기 운동을 펼치는 곳이 또 있다. 종이학으로 대표되는 종이접기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 전해준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리가미(折り紙)’란 일본어로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다. 종이접기 용어와 방식도 일본이 국제 표준이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오리가미란 이름으로 일본식 종이접기를 가르치고 있다.
1987년 한국종이접기협회를 결성한 노영혜 씨는 2005년 종이문화재단을 출범시키며 ‘K-종이접기(Jongie Jupgi) 세계화’를 선포했다. 우리말 교재를 보급하고 강사를 배출해 종이접기세계연합을 전 세계 25개국에 200여 개 지부를 거느린 단체로 키웠다. 그는 “태권도가 가라테를 눌렀듯이 종이접기가 오리가미를 누를 날이 있을 것”이라며 일본과 국제 통용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태권도도 초창기엔 ‘코리안 가라테’로 불려
태권도는 한류의 선봉으로 꼽히지만 해외 진출은 일본보다 한참 늦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을 대표하는 무술은 중국에서 기원해 류큐 왕국(오키나와)을 거쳐 일본에 정착한 가라테(唐手·karate)였다. 당나라 권법이란 뜻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에 파견된 태권도 사범들이 ‘Taekwondo’라고 적힌 영어 간판을 내걸면 중국음식점인 줄 알고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 ‘코리안 가라테(Korean Karate)’라는 이름을 내세운 사례도 흔했다. 지금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Hanbok’이란 단어가 표제어로 올랐지만 예전에는 한복이 ‘코리안 기모노(Korean Kimono)’로 불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모노(看物)는 일본의 전통 의상, 특히 여성용 옷을 뜻한다.
그러나 태권도의 우수성에다가 사범들의 개척정신이 더해져 태권도는 가라테를 제치고 동양의 대표 무술로 자리 잡은 데 이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지금도 전 세계 도장에서는 ‘차렷’, ‘경례’ 등의 우리말 구령이 울려 퍼지고 있다.
한국산 김도 태권도처럼 노리를 누르고 국제 통용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품질에서나 인기 면에서는 이미 자격을 충족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양수산부를 비롯한 관계 당국, 기업, 생산자협회, 시민단체 등의 분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