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낭 사후 115년… 점점 멀어지는 적십자의 이상
10월 30일은 적십자운동 창시자 뒤낭 115주기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 목격하고 적십자운동 제창
이슬람 국가들은 적십자 대신 적신월 마크 사용
올해에만 적십자·적신월 활동가 18명 숨져
고종 칙령으로 세운 대한적십자사 120주년 맞아
일제강점기 망명 정부 적십자 통해 독립자금 모아
정치적 결탁으로 회장 임명되는 어두운 면도
“그것은 하나의 도살장이었으며 피에 굶주리고 피 맛에 취해 날뛰는 맹수들의 싸움이었다. 부상자들조차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로 싸웠으며 무기를 잃어버린 자들은 적군의 목덜미를 잡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31세의 사업가 앙리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회상’의 한 대목이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제분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수리시설 이용권을 부탁하려고 1859년 6월 북이탈리아 솔페리노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치르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가 참상을 목격했다. 교회에 임시병원을 차리고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은 공격하지 않는다”
제네바로 돌아온 뒤 뒤낭은 솔페리노에서 받은 충격을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결심한 뒤 각종 문헌과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 1862년 11월 책으로 펴냈다. 그는 “만일 국제구호단체가 존재하고 자원봉사 간호사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라고 아쉬워하며 전시에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돕는 중립적인 민간 봉사단체를 만들고 이 단체 요원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뒤낭을 비롯한 5명의 위원이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창설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29일 유럽 16개국 대표가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최초의 다자간 국제협정이었다.
골자는 ”무기를 버리고 전투행위를 중지한 부상자와 병자는 인종·성별·종교·정치적 이념이나 다른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 없이 인도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은 중립시설로 간주해 공격하지 않고, 적군을 간호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적십자조약(제네바협약)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부 개정됐고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병자·난선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이 추가됐다.
베니스영화제를 울린 가자지구 소녀의 목소리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진 지 165년이 지난 2024년 1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살던 6세 소녀 힌드 라잡은 이스라엘군 공습을 피해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탱크의 총격을 받아 가족을 모두 잃었다. 홀로 남은 라잡은 팔레스타인 적신월(赤新月)에 전화를 걸어 애끓는 목소리로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3시간가량 이어지던 구조대원들과의 통화는 폭음과 함께 끊기고 말았다. 12일 뒤 라잡과 그를 구하려던 구조대원 2명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의 시신은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튀니지 출신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아는 라잡의 비극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배우들의 연기로 상황을 재연하긴 했지만 라잡과 구조대원들이 나눈 실제 통화 녹음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 지난달 2일 제82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힌드 라잡의 목소리’는 역대 최장이라는 23분간의 기립박수를 끌어냈고 9월 6일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안았다.
하니아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라잡의 목소리는 단지 한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자지구 주민 전체가 내는 절규였다”면서 “영화는 라잡을 되살릴 수 없지만 그의 목소리를 지킬 수 있고 이를 국경 넘어 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보건부의 집계에 따르면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군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가자지구 사망자는 6만 8000명을 넘어섰으며 이 가운데 약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팔레스타인인 사망자 가운데 전투원은 17%에 불과하다는 현지 매체의 보도도 있다. 지난 10일 휴전이 선언된 뒤에도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17일에는 소풍을 가던 가족 11명이 이스라엘군 탱크포에 맞아 몰살하기도 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는 전투원끼리만 싸움을 벌였다. 민간인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이들은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가자 전쟁에서는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이 훨씬 많다. 사망자 가운데는 라잡을 구하려던 적신월 구조대원도 포함돼 있다. 이스라엘군은 테러리스트가 은신해 있거나 환자로 위장해 이동한다고 주장하며 병원과 구급차를 공격하고 있다. 뒤낭과 적십자 활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오히려 후퇴하는 듯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국제적십자연맹(IFRC)은 지난 8월 19일 국제 인도주의의 날을 맞아 공동 입장문을 발표해 “올해 들어서만 적십자·적신월 직원과 자원봉사자 18명이 가자지구, 수단, 남수단, 이란, 에티오피아,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 업무 수행 중 목숨을 잃었고 다치거나 납치된 사례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적십자는 노벨 평화상 최초·최다 수상 기록 보유
뒤낭은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창설하고 제네바협약을 끌어낸 공로로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1917년과 1944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창설 100주년을 맞은 1963년에도 세 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창시자를 포함해 노벨 평화상 최초와 최다 기록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1948년부터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세계적십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올해로 78회를 맞았다. 뒤낭은 1910년 10월 30일 스위스 하이덴에서 82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오는 30일은 그의 115주기 기일이다.
뒤낭이 제창한 적십자운동에는 대부분 국가가 호응했으나 상징 마크는 초창기부터 시비를 낳았다. 뒤낭은 자신의 모국이자 적십자조약 탄생에 큰 도움을 준 스위스 연방정부에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자 스위스 국기 색깔을 거꾸로 한 적십자(Red Cross) 마크를 상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11~13세기 십자군들의 침공을 받은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튀르키예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1876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오스만부상자구호협회는 적십자 대신 제국의 상징인 붉은 초승달 깃발을 사용했고 이슬람권으로 퍼져나갔다. 적신월(Red Crescent)은 1929년 국제적십자위원회의 공인을 받아 현재 34개국에서 쓰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듬해부터 적십자도 적신월도 아닌 다윗의 육각별(Red Shield of David)을 독자적으로 써오다가 2005년 국제적십자위원회 승인을 얻어 적수정(Red Crystal)을 사용하고 있다. 그해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적십자·적신월·적수정 표장에 아무런 종교적·문화적·정치적 함의가 없다”는 내용의 추가의정서를 채택했다.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은 적사자태양(Red Lion with Sun) 문양을 쓰다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후 적신월로 대체했다.
고종에 이어 역대 대통령이 적십자 명예회장 맡아
대한적십자사는 올해 120주년을 맞았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 1월 8일 제네바협약에 가입하고 1905년 10월 27일 고종 황제 칙령 47호(대한적십자사 규칙)를 반포해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사도세자 후손인 의양군 이재각에 이어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 이강이 초대와 2대 총재를 맡았다. 고종은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 전통에 따라 역대 대통령이 대한적십자사 명예총재를 맡아왔으며, 2019년 총재에서 회장으로 바뀜에 따라 명예회장으로 부르고 있다. 1905년 10월 10일에는 대한국적십자병원도 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는 출범 4년 만에 간판을 내리는 비운을 맞았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1국1사 원칙을 내세워 1909년 7월 23일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편입시킨 것이다. 대한국적십자병원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진료소로 격하됐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이희경·여운형·안정근 등의 발의로 그해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를 부활시켰다. 병원을 세우고 간호원과 구호원을 훈련해 동포 환자들을 돕고 재난에 대비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도주의를 내세워 각국 적십자사를 상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을 호소하는가 하면 독립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멕시코의 한인 지도자 김익주는 안창호가 1918년 멕시코를 방문하자 운영하던 식당까지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탁했다. 이듬해 대한적십자회가 창립되자 곧바로 가입한 뒤 한인들의 회비를 모아 정기적으로 전달했다.
지난 8월 19일 대한적십자사가 개최한 제7회 국제 인도주의 학술회의에서 박환 전 수원대 교수는 김익주의 사례를 소개한 뒤 “적십자 활동은 독립운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면서 “당시 모은 자금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로 전달됐고 적십자 조직은 한인 사회를 결속시키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했다.
1921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도 “함경남도 원산의 김영하와 간도의 오희영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간도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해 의연금을 모으고 회원 가입을 권유하다가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4·19 혁명 부상자 돕기로 시작된 헌혈 사업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결성된 국제적십자연맹에도 대표를 파견해 가입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해방 후 1947년 조선적십자사를 거쳐 1949년 대한적십자사가 재건된 뒤 1955년 7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현재 국제적십자연맹 회원국은 191개국이다.
대한적십자사는 한국전쟁, 사라호 태풍,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산불과 지진, 코로나19 등 국내는 물론 해외의 전쟁, 기근, 지진, 화재, 홍수 등의 현장에서 인명 구조와 긴급 지원 활동을 펼쳐왔다.
1954년 국립혈액원(1958년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으로 개칭)을 개원한 이후 혈액 수급을 매혈에만 의존해오다가 1960년 4·19혁명 때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헌혈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헌혈 사업을 펼치고 있다. 1922년 청소년적십자(RCY)를 결성해 청소년운동에도 앞장섰다. 스승의날은 1958년 충남 논산의 강경여고 RCY 단원들이 은사의날 기념행사를 벌였다가 1964년 전국의 RCY로 확산된 것이 기원이다.
1971년부터는 북한적십자사와 회담을 열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했다. 2000년 9월 인도적 차원에서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한으로 송환할 때도 대한적십자사가 나섰고 북한에 식량과 약품 등을 지원하는 사업도 꾸준히 펼쳐왔다. 일본적십자사와 협력해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부산 난민보호소를 만들어 베트남 보트피플을 수용하는 등 재외동포들과 외국 난민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왔다.
윤셕열 비리의 짙은 그늘 드리운 김철수 현 회장
그러나 어두운 면도 있었다. 회장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논란이 일기도 했고, 혈액 관리나 재해 성금을 둘러싸고 비리 의혹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22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대한적십자사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측에 52차례 표창을 수여했다는 사실이 폭로돼 비판에 휩싸였다.
윤석열 대선 후보 공동후원회장 출신인 김철수 대한적십자사 회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간부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H+ 양지병원’이 베트남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비호로 KT의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을 낮은 가격에 인수했다는 특혜 의혹도 받고 있다.
김철수 회장은 국감에서 “적십자의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면 윤 전 대통령의 계엄은 옳은 것이냐”라는 질문에 “정치·종교·이념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기관이어서 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정치적 배경으로 회장에 오르고 재임 중에도 중립 원칙을 지키지 못해 사퇴 압력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리는 지키고 싶어 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적십자운동에 재산 다 쓰고 자신 위한 모금도 거부한 뒤낭
뒤낭은 적십자운동에 전 재산을 다 써버리고 사업에도 실패해 불우한 만년을 보내면서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관직을 탐하지 않았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보불전쟁에서 부상자 구호와 포로 석방 등에 힘쓴 공로를 인정해 프랑스적십자사가 거액의 상금을 수여하려고 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겠다는 제안도 뿌리쳤다.
적십자운동을 제창하고 온몸으로 적십자정신을 실천했다. 인류는 뒤낭의 꿈을 되새기고 모두 같은 꿈을 꾸어야 한다. 그래야 꿈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