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협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양심수들 어이 됐을꼬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가족의 손발로 40년

양심수 석방 운동으로 민주화 투쟁 중심에

1257회 목요집회 열어 반민주 악법 철폐 견인

수감된 윤석열이 누리는 대우도 그 투쟁 덕분

전대협 등 아들딸 단체들 40주년 기념사업

기념행사 후원 모임 ‘보랏빛스카프단’ 모집

2025-09-29     안영민 시민기자(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운영위원장)

MZ세대들에게 민가협과 양심수를 아냐고 물으면 "그 사람이 누구예요?"라고 되묻는다. 성은 '민'이나 '양'이요, 이름이 '가협'이나 '심수'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여름, 서울구치소로 몰려와 "에어컨도 없는 독방에서 우리 대통령님이 고생하신다!" "에어컨을 설치하라!"며 분개하는 '윤어게인' 시위대를 보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구치소에도 선풍기가 설치됐구나… 여름철에 부채를 달라며 투쟁하던 때가 생각났다.

윤석열과 내란 사범들도 누리는 혜택

윤석열 구속 이후 언론이 친절히 소개하는 구치소의 주간 식단 메뉴를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담배꽁초가 나오던 멀건 배춧국과 쉰내가 나는 김치가 담긴 식판을 내던지고, 부식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던 선배들이 떠오른다. 그에 비하면 윤석열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호사스러운 특식이다.

겨울은 또 어떤가. 밤새 머리맡에 둔 물그릇이 얼 정도인데도, 우리는 담요 몇 장에 의지해 긴 겨울을 보냈다. 유일한 보온 장비는 일본어로 '뜨거운 물을 담은 주머니'를 뜻하는 '유담프' 뿐이었다. 유담프를 끌어안고 오직 체온만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뎌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닥에 전기 온돌이 설치돼 있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1970~80년대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끌려가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 갇혔다.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족들이 모여 1985년 12월에 결성한 단체가 바로 민가협이다. (사진 제공 민가협)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힘이 민가협이고 양심수였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치하에서 무수한 사람이 끌려갔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 갇혔다. 간첩으로 내몰려 사형, 무기를 선고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독재정권과 하수인들이 공안사범, 빨갱이라고 낙인찍은 이들을 우리는 '양심수'라고 불렀다.

양심수들은 감옥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부식, 부족한 운동과 목욕 시간, 그리고 일상적인 교도관의 폭행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빵투'(소내 투쟁)를 전개했다. 광주교도소에서는 박관현 열사가 단식투쟁 끝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 투쟁은 양심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투쟁의 성과는 일반 재소자들에게도 그대로 돌아갔다. 윤석열이 지금 구치소에서 누리는 혜택은 바로 양심수들의 치열한 투쟁 결과물이다. 윤석열은 에어컨이나 '1.8평 서바이벌' 타령할 게 아니라 양심수들에게 우선 고마워해야 한다.

 

'모든 양심수를 즉각 석방하라!'며 농성 중인 민가협과 재야단체 회원들. 양심수들의 어머니와 아내들이 민가협의 회원들이었다. (사진 제공 민가협)

양심수 가족들이 만든 단체, 민가협

민가협은 양심수의 가족들이 만든 단체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란 이름 그대로 민주화 실천에 나섰다가 구속된 이들의 가족들이 모여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기 위해 1985년 12월 12일에 창립됐다. 전두환 독재기였던 1984~85년에는 특히 구속자가 많았다. 1985년 5월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과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사건 외에도 전두환 독재에 맞선 집회 시위로 구속자가 속출했다. 또 학생운동의 배후를 캔다며 혹독한 고문으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구속된 학생과 노동자, 재야인사의 가족들이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모이기 시작했고, 민가협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가협 결성 이전에도 구속자 가족들의 모임은 있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대거 구속자가 나오자, 가족들은 구가협(구속자가족협의회)을 결성해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섰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종교인과 대학교수들이 대거 잡혀가자, 가족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를 만들어 독재정권의 부당한 탄압을 알려 나갔다. 훗날 민가협의 상징이 된 보랏빛 스카프도 이때 등장했다.

민가협은 창립 때부터 양심수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 나갔다. '양심수 석방'은 민가협 활동의 최우선 과제였다. 민가협의 활동으로 양심수는 반독재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국제적인 관심 사안이 됐다. 또한 수십 년 동안 구금돼 있던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를 알리고 이들의 석방을 위해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유엔 인권위원회 등과도 연대했다. 교도소 내 처우 개선과 인권 보장을 위해서도 치열하게 싸웠다.

민가협은 양심수를 양산하는 악법 철폐에도 힘을 모았다.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 철폐 운동을 벌여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를 폐지시켰다. 또한 악명 높은 고문 수사관인 이근안 현상 수배와 안기부(현 국정원),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등 공안기관 감시활동을 통해 고문 수사 근절에도 앞장섰다.

이를 위해 민가협은 1993년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를 시작해, 2020년 코로나로 중단할 때까지 27년 동안 1257회나 진행했다.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과 하루감옥체험 등을 통해 양심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냈다.

 

1993년 9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열린 목요집회는 2020년 2월 말 코로나로 중단할 때까지 27년 동안 1257회나 계속 됐다. 사진은 2014년 1000회 목요집회 광경 (사진 제공 민가협)

민가협의 목요집회는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사진 제공 민가협)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끈 민가협 40년

이처럼 민주와 인권의 상징이 된 민가협이 올해로 창립 40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민가협의 현실은 안타까운 모습이다. 1980~90년대 왕성하게 민가협 활동을 이끈 어머니들의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초대 민가협 공동 회장이었던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와 이소선 어머니(전태일 열사 어머니), 그 뒤를 이어 민가협의 전성기를 이끈 임기란 회장(2020년 작고), 서경순 회장(2018년 작고) 등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났다. 김춘옥 어머니(김민석 국무총리 어머니, 1985년 창립 당시 공동 회장)를 비롯한 많은 분이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활동이 가능한 분들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민가협도 서서히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다. "민가협이 누구예요?"라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586세대들조차 "아직도 민가협이 있나요?"라고 묻는 실정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혜택은 민가협 덕분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역사 속에서 민가협은 빼놓을 수 없는 조직이다. 지난 겨울 내란에 맞서 응원봉 물결로 '빛의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도 민주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온 민가협과 같은 단체가 수십 년을 버티어 왔기 때문이다. 수감된 윤석열과 내란사범들까지 누리고 있는 인간적 대우 역시 이들 덕분이다.

역사는 기억의 산물이자 기록의 결과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역사의 단절을 의미한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기록될 수도 없다. 지금 민가협이 처한 현실이 그렇다. 우리는 '국민주권정부'의 등장에 환호하면서도 그 승리를 이끈 진정한 힘은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가 잘나서만 이룬 결과가 결코 아니다. 오늘의 승리와 성공은 지난 시대의 희생과 눈물의 결과다. 이 사실을 잊는다면 오늘의 승리도 연속될 수 없다. 역사의 반동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가 민가협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0~2000년대 민주시민단체가 연말에 송년회를 겸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로 자리매김됐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 민가협 40주년을 맞아 재현된다. 올해는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란 제목으로 열린다.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에 모두 함께 나서야

민가협 창립 40년을 맞아 지난 6월 24일 기념사업위원회가 결성됐다.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민가협에 신세를 지고, 민가협의 혜택을 받은 개인과 단체들이 참여해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40주년 기념사업은 크게 기록사업과 기념행사로 준비되고 있다. 민가협의 40년 역사와 활동을 정리하는 기록사업은 아카이브 구축과 구술 기록 영상 제작, 백서와 사진집 발간, 사진전과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다. 기념행사는 예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과 같은 콘서트 형식으로 12월 13일 오후 4시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란 제목으로 열린다.

기념사업은 정부나 기관의 도움 없이 민가협의 활동을 기억하고, 민가협의 역사를 제대로 남기는 데 공감하는 이들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아직 참여가 많이 부족하다. 현재 기념사업위원회는 '보랏빛스카프단'이란 이름으로 개인과 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다. 기념행사인 콘서트 공연은 '좌석후원제'라는 이름으로 티켓을 판매할 예정이다.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과거 양심수들과 시민사회단체의 참여와 후원으로 40주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후원조직의 이름은 민가협의 상징인 보랏빛수건에서 따왔다,  

관심있는 단체와 개인은 아래 구글 폼으로 직접 신청하면 된다.

https://bit.ly/민가협40주년기념사업
후원계좌 : 국민은행 031601-04-164394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문의 :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안영민 상임운영위원장(전대협동우회 회장, 010-8010-7013)

 

 

인터뷰 : 조순덕 민가협 회장

"괜히 자식들한테 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조순덕 민가협 회장은 40주년 기념사업 이야기를 꺼내자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처음에 전대협 아들딸들이 40주년 행사 이야기했을 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민가협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있으니 당연히 기념행사를 하고 싶지만, 이제 어머니들도 몇 분 안 남다 보니 우리가 할 여력은 도저히 안 되고…"

팔순 잔치 준비하는 자식한테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행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다들 어려운데, 주위에 폐만 되면 어쩌나 하는…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민가협의 아들딸이라 할 전대협과 한총련 세대, 그리고 수많은 양심수를 배출한 각 대학 민주동문회, 양심수후원회와 구속노동자후원회 등 지난 시절 양심수들이 주축이다. 여기에 많은 민주시민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민가협의 40년 역사와 활동에 비한다면 아직 참여가 저조하다. 더 많은 단체와 개인이 참여해 주길 희망한다.

"40주년을 앞두니 돌아가신 분들이 생각나네요. 1970년대부터 구속된 문익환 목사님 석방운동에 나선 박용길 장로님은 민가협을 창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죠. 아들이 석방된 뒤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민가협 활동을 계속 하셨던 임기란 회장님은 민가협을 민주화운동의 대표 단체로 만든 분이셨죠. 서경순 회장님도 구속된 자식을 걱정하던 어머니들에게 의지처가 됐던 분이세요. 그분들께 부끄럽지 않게 여태까지 민가협을 지켜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대담 중인 조순덕 민가협 회장과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운영위원장을 맡은 안영민 전대협동우회 회장.

조순덕 회장은 현재 남아 있는 민가협 어머니 중에서 가장 막내다. 1950년생으로 유일한 70대다. 1996년 아들 위영석이 경원대학교 총학생회장 때 같은 학교 장현구 열사의 분신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들은 수배자가 됐다. 이후 서울대에서 민가협장터, 유가협장터가 동시에 열렸을 때 임기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손을 돕게 됐다. 그때부터 민가협 활동을 시작한 게 어느덧 30년이 됐고, 임기란 어머니 뒤를 이어 민가협 회장을 맡고 있다.

"민가협에는 엄마뿐만 아니라 양심수의 아내들도 큰 역할을 했어요. 감옥에 갇힌 남편을 챙기며 혼자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도 민가협 활동에 열심이던 아내들을 볼 때마다 참 안쓰러웠어요. 민가협의 아빠들은 주로 열심히 돈을 벌어 민가협을 후원했죠. 민가협이라고 하면 엄마들이 상징처럼 떠오르지만, 민주화실천에 나선 모든 가족이 민가협의 주인공입니다. 이번 40주년 기념행사에는 그분들을 모두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험난한 세월을 함께 헤쳐나온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기뻐하는 잔치가 되었으면 합니다. 많이 도와주시고,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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