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자락에 펼쳐진 한국 현대 건축사(상)
건축 거장 김종성 작품 서울힐튼호텔은 철거 중
사업가 시절 트럼프도 펜트하우스에 초대받아
장충단 헐고 왜색 털지 못한 영빈관과 신라호텔
‘찬란한 신라시대 품위 재현’ 뜻하는 이름 무색
서울의 간판급 호텔이자 우리나라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로 꼽히던 남산 자락의 서울힐튼호텔 건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 5월 9일 철거 공사에 들어가 내년 말까지 마칠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6성급 호텔을 비롯해 지하 10층, 지상 39층의 대규모 복합시설이 들어선다.
남산 자락에는 힐튼호텔 말고도 서울신라호텔, 그랜드하얏트서울, 반얀트리 클럽앤스파 서울 등 지난 반세기 동안 특급호텔의 대명사로 불리던 건물이 즐비하다. 설계자는 모두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획을 그은 인물들이어서 남산은 한국 건축 거장들의 경연장이자 한국 현대 건축사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힐튼호텔 건물은 가장 늦은 1983년 완공됐으나 가장 먼저 헐리고 있다. 설계자 김종성도 1935년생으로 다른 건축 거장들보다 가장 늦게 태어난 데다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래서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목격하는 비운을 맞았다.
남산 껴안는 형태로 설계된 힐튼호텔 건물
힐튼호텔 체인의 창업자 콘래드 니컬슨 힐튼은 현대식 호텔 경영의 선구자로 힐튼호텔의 역사는 현대 호텔의 역사나 다름없다. 1925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자신의 이름을 딴 댈러스 힐튼호텔을 세운 데 이어 1927년 객실마다 냉수기와 에어컨을 갖춘 최초의 호텔을 개관했다. 1946년 호텔업계에서 처음으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이듬해 뉴욕 루즈벨트힐튼의 모든 객실에 TV를 설치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1977년 서울역 맞은편에 당시로서는 최대 연면적(132,806.05㎡·약 4만 평)의 대우빌딩을 지은 뒤 바로 뒤편에 힐튼호텔을 세우기로 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김종성 일리노이공대 건축과 교수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김종성은 일리노이공대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스 반데어 로에 건축연구소에서 10년간 근무한 전력이 있었다. 미스 반데어 로에는 커튼월(건물 하중은 기둥이 떠받치고 외벽은 유리 등 경량 소재로 마감하는 공법) 방식을 도입해 20세기 마천루의 전형을 만든 근대 건축의 거장이다.
김종성은 “세계적인 호텔 건물을 지어 달라”는 김 회장의 부탁을 받고 1978년 학교에 사표를 낸 뒤 귀국해 힐튼호텔을 설계했다. 한국인이 설계한 글로벌 호텔 체인 건물 1호였다. 1979년 착공해 1983년 12월 문을 열었다. 객실은 682개였다.
서울힐튼호텔은 양쪽 끝이 남산 쪽으로 구부러져 산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산을 껴안는 형태를 띠었다. 출입구도 서울역 반대편인 남산 방향에 냈다. 알루미늄 커튼월 방식을 채택하고 로비를 지하부터 천장까지 압도적인 개방감을 느끼도록 꾸며 미스의 건축 철학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우중 회장은 맨 위 23층 펜트하우스를 개인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이곳에 초대받았다. 전두환은 서울힐튼호텔을 애용해 1987년 6월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연과 1988년 2월 대통령 퇴임 환송 만찬을 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방송(NBC) 중계진과 1997년 미셸 캉드쉬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도 묵었다.
호텔 경영은 김우중 부인 정희자 대우개발 회장이 맡았다. 하도 억척스럽게 일해 본사에서나 직원들에게 ‘터프 마담’으로 통했다. 그의 경영 수완과 열정 덕분에 1996년에는 서울힐튼호텔이 500개 가까운 전 세계 힐튼호텔 가운데 1위로 꼽히기도 했다.
대우그룹 부도로 호텔 소유권 넘긴 뒤 대성통곡한 ‘터프 마담’
그러나 대우그룹이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부도 사태를 맞아 1999년 싱가포르 기반의 호텔 운영사 CDL호텔코리아에 2600억 원을 받고 소유권을 넘겼다. 정희자는 자식처럼 아끼던 서울힐튼호텔의 매각이 결정되자 남편 앞에서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런 애착 때문인지 대우개발은 23층 펜트하우스를 장기임대 형식으로 한동안 사용했다.
CDL호텔코리아는 2004년 호텔 운영업체 밀레니엄과 신규 계약을 체결해 밀레니엄 힐튼 서울이란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경영난을 겪자 2021년 이지스자산운용이 1조 1000억 원에 사들여 재개발을 추진했다. 2022년 12월 31일에는 호텔 영업도 중단했다.
건물 철거 계획이 알려지자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며 성명을 내는 등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신라 범종을 녹여 가마솥을 만드는 꼴”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토론회와 심포지엄도 열렸다. 그러나 소유권이 자산운용사에 넘어간 상태에서 보존론이 개발론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시는 힐튼호텔 건축미의 상징과도 같은 로비를 지하로 옮겨 보존하는 설계안을 승인하는 것으로 생색을 내는 데 그쳤다.
오는 25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서울 중구 회현동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에서는 ‘힐튼서울 자서전’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마련한다. 설계도, 신축 공사 현장과 영업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철거 현장에서 수거한 대리석 등 건축 부자재 등을 만날 수 있다. 10월 1일에는 김종성의 특별 강연도 열린다.
김종성은 서울힐튼호텔로 서울시건축상 금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현 우리금융아트홀), 동양투자금융 사옥, 아트선재센터, 서울역사박물관, 부산 파라다이스비치호텔, SK빌딩 등의 작품을 남겼다.
순직 군인 추모 공간 장충단에 들어선 이토 히로부미 추모 절
힐튼호텔 반대쪽인 남산 동북쪽 기슭은 한양 도성을 방위하는 어영청(御營廳) 휘하의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때 숨진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고종 황제의 명으로 1900년 10월 제단과 사당을 세우고 장충단(奬忠壇)이라고 명명했다.
나중에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의 순직자까지 포함했고 봄가을로 나라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장충단 권역은 지금의 장충단공원을 비롯해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서울클럽(구 사파리클럽), 자유센터, 반얀트리호텔, 국립극장, 동국대 일부 등을 아울렀다.
일제에 의해 희생된 국가유공자들의 추모 공간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노골화하면서 정반대로 바뀐다. 일제는 1908년부터 장충단 제향을 금지한 데 이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 직후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0년 뒤에는 황태자 시절의 순종과 당시 육군부장이던 민영환이 각각 앞뒷면 글씨를 쓴 장충단비를 뽑아버리고 공원으로 꾸몄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딴 절 박문사(博文寺·하쿠분지)를 짓고 뒷산도 그의 호를 붙여 춘묘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절의 정문 경춘문과 요사채는 각각 경희궁 정문 흥화문과 경복궁 선원전을 헐어내 옮겨 세웠다. 원구단의 석고전도 이전해 종루로 썼다.
1937년에는 5년 전 중국 상해사변 때 영웅적으로 산화했다는 거짓 신화의 주인공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193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용구·송병준·이완용 등 친일 앞잡이들을 기리는 ‘일한 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일제가 훼손한 장충단 터에 왜색 입고 들어선 신라호텔
1945년 광복 직후 육탄삼용사 동상은 철거되고, 동국대 기숙사로 쓰이던 박문사도 그해 11월 화재로 전소됐다. 6·25 전쟁을 겪으며 몇 해 동안 국군장병 합동 위령소가 설치돼 장충단의 뜻을 잇는 듯했으나 1956년 개장한 국군묘지(이후 국립묘지를 거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개칭)로 옮겨졌다.
이승만 정권은 장충단을 복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5년 지금의 장충체육관 자리에 노천 체육시설 육군체육관을 개장한 데 이어 1959년 박문사 터에 외국 국빈들의 전용 숙소인 영빈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잇따라 일어나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다가 1967년에야 완성했다. 대지 2만 8000평(약 9만 2600㎡)에 건평 1000평(약 3300㎡) 규모였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긴 했으나 운영도 순조롭지 못했다. 경영난을 겪으며 영빈관 운영권이 총무처에서 중앙정보부, 국제관광공사 등으로 수차례 넘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영빈관을 싸게 넘겨줄 테니 특1급 호텔을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이병철 집도 장충체육관 건너편에 있었다.
삼성그룹은 1973년 2월 호텔사업부를 창설한 데 이어 5월 ㈜임페리얼을 설립해 영빈관 건물과 대지를 28억 4420만원에 사들였다. 같은 해 11월 호텔 신축 공사를 시작해 5년 4개월 만인 1979년 3월에 개관했다. 지상 22층, 지하 3층, 연면적 6만6525㎡(약 2만 평)에 객실은 464개였다. 회사 이름도 호텔신라로 바꿨다.
삼성그룹은 호텔이 들어서는 집터의 내력에는 추호의 관심이 없었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국민적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삼성은 신라호텔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일본 업체에 맡겼다. 하필이면 경복궁과 경희궁 전각을 허물고 박문사를 세운 오쿠라쿠미(大倉組)토목의 후신 다이세이(大成)건설이었다. 흥화문도 한동안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 앞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의 정문은 흥화문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건물만 아니라 호텔 운영도 일본풍을 벗어나지 못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일본인 오사와 고이치가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아 개관 준비를 도맡았고, 일본 호텔 브랜드 오쿠라 도쿄와 제휴를 맺었다. 신라호텔이 유독 왜색 논란에 자주 휩싸인 것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위대 리셉션, 한복 차림 출입금지 등으로 비난 사기도
2004년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 리셉션을 이곳 영빈관에서 열었을 때 신라호텔도 큰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2011년에는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씨가 뷔페식당 파크뷰에 들어가려다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호텔 직원에게 제지당해 말썽을 빚는가 하면, 2012년 모든 객실에 일본식 잠옷 유카타를 비치한 것이 드러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설계에는 한국인 건축가 박춘명(1924~2017)도 참여했다. 도쿄 나리츠고등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일본 단게겐조(丹下健三) 도시건축설계연구소에서 일한 일본파였다. 1959년 김수근과 함께 국회의사당 현상 공모에 당선돼 귀국했으나 남산 경성신사 자리(지금의 백범광장)에 지으려던 국회의사당은 4·19혁명과 함께 무산됐다.
그는 입구 쪽에서 볼 때 남산의 풍광을 막지 않도록 신라호텔 건물을 세로로 배치했다. 객실이 있는 고층부 외관은 붉은 타일의 PC판으로 장식했고, 로비 현관 위에는 기와지붕을 덧붙여 전통 한옥 분위기를 냈다. 조흥은행 본점, KBS 본관, 63빌딩, 한양투자금융 사옥, 전경련회관, 동방플라자, 센터빌딩, 광주대성당, 목동 하이페리온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곳을 거쳐간 유명 인사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조지 H. W. 부시, 중국 지도자 시진핑·장쩌민·후진터오·주룽지·원자바오, 브라질 축구 스타 펠레,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수두룩하다. 팝 황제 마이클 잭슨은 4차례 방한해 3번을 이곳에 투숙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음식점 골목은 신라호텔에 묵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인근 장충동 족발집 골목의 가게마다 돼지족발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구상한 것이라고 한다.
왜색 논란 무색케하는 영빈관 언덕의 이병철 동상 표석 글귀
호텔신라의 역대 사장은 구자학·박무승·손영희 등으로 이어졌지만 1992년까지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는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고문이었다. 2011년부터는 이병철의 손녀이자 이건희 회장 장녀 이부진이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영빈관 뒤편 언덕의 조각공원에는 이병철 동상을 세워놓았다. 표석에는 그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라호텔 건립과 작명의 취지에 대한 설명인데, 장충단이 겪어온 비운의 역사와 신라호텔이 빚은 왜색 논란을 떠올리면 아이러니를 넘어 당혹감을 안겨준다.
“호텔이라는 기업은 도시의 얼굴이며 일국의 얼굴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는 한국의 얼굴이라고 내세울 만한 호텔이 없어서, 찬란한 우리 고유의 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시대의 우아한 품위와 향기를 재현시켜 보고자 1973년 호텔신라를 건설하게 되었다.”
<※ 1주 후에 하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