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잘 싸운다는 미국의 인정이 목말랐던 한국군

[베트남 참전 60돌]⑱ 누구를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 반공 이념과 용맹 과시 위한 전쟁

한국이 미군보다 더 잘 싸워야 한다는 강박

승전보를 기다려 온 존슨에게 무용담 제공

미국이 베트남 양민에 대한 편견 지속 주입

베트남에서 양민 학살 사건은 예정된 비극

2025-08-20     이길주 시민기자

 

존슨(가운데)은 매일 아침 베트남의 전황을 보고 받았다. 백악관 작전상황실 (Situation Room)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군의 작전 상황도 자세히 보고했다. 1968년 케산 전투 당시 작전 상황실에서 전황을 보고 받는 존슨. (Public Domain)

1966년 1월 17일 아침 7시 5분. 평소처럼 백악관 작전 상황실(Situation Room)에서 존슨을 위한 비밀 상황 보고서가 올라왔다.

"퀴논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한국/미국/베트남군이 합동으로 펼친 제퍼슨 작전이 종료됐다. 최종 사상자는 미군 전사 3명, 부상 8명, 한국군 전사 29명, 부상 66명, 남베트남군 전사 13명, 부상 18명. 베트콩 사상자는 전사 391명, 포로 14명이다."

한국의 신문들은 "한국군과 월남 정부군은 사이공 동북방 4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푸엔주에서 제퍼슨 작전으로 390명의 베트콩을 사살하고 기지로 돌아왔다"면서 "한국군과 월남 정부군의 손실은 경미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한국군에게 결코 가벼운 손실이 아니었다.

나흘 후인 1966년 1월 21일 아침 6시 50분에 올라온 보고서에는 한국군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었다. 한국군 1개 소대가 작전 중 세 방향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았다. 적은 약 400명이었는데 그 중 다수는 남녀 노인들이었다.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이하 베트콩)들은 의도적으로 이들을 총알받이로 앞에 세우고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국군은 침착하게 총을 발사하지 않고 적이 거리를 좁힐 때까지 기다렸다. 적과의 거리가 30미터(100피트)로 좁혀졌다. 그 후 거의 두 시간 동안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한국군 사상자는 전사 6명, 부상 16명, 실종 8명이었다. 베트콩은 46명이 사살됐다.

이 상황을 풀어보면 한국군은 수적으로 10배가 넘는 적이 밀려오는데 이들을 제압하고 승리했다. 한국군 사상자와 실종자를 합하면 30명이다. 한 개 소대를 35명으로 가정하면 한국군의 피해는 컸다. 위의 보고서에서 한 단어가 눈길을 끈다. '육박전'이다. 밀려드는 400명의 적을 온몸으로 막아냈다는 말이다.

잠시 존슨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본다. 베트남에서 미군은 헬리콥터를 주 이동 수단으로 활용했다. 길도 변변치 않았지만, 치고 빠지는 적이 출몰한 지역으로 빨리 병력을 투입해 작전을 펴는 게 중요했다. 교전이 시작되면 적에 대한 화력 지원, 즉 포사격을 요청했다. 이어 전투기의 공폭이 뒤따랐다.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고 미군 병력은 가능한 한 빨리 다시 헬기를 타고 작전 지역을 떠나 베이스로 돌아왔다. 이런 교전 형태에서 '백병전'은 자주 들려오는 소식이 아니었다. 존슨은 한국군이니 할 수 있는 용감한 행동이라 믿었을 것이다.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이송하는 청룡 부대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화랑정신 '임전불퇴'에 익숙해서일까? 1966년 2월 9일 아침 9시 25분, 존슨에게 올라온 베트남 상황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치열한 전투력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월 31일, 푸옌성에서 베트콩 2개 대대가 한국 해병대의 비박(Bivouac, 야영지)을 공격했지만, 한국군의 맹렬한 총격과 포격에 밀려 후퇴했고 217명이 전사했다. 한국군은 전사 5명, 부상 50명을 기록했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이 전투에서 적은 한국군에 비해 40배가 넘는 전사자를 뒤에 남기고 패주한 것이 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밀림의 비정규전에, 투입 3개월 만에 세운 놀라운 전공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한국군은 또 큰 피해를 보았다(The Koreans again took heavy losses)."란 문장이 들어있다. 종합해 보면, 한국군은 죽기 살기로 전투에 임했고, 때로 놀라운 성과도 있었지만,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는 뜻이다.

이렇게 존슨은 베트남 전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매일 아침 접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보고서를 통해 존슨은 매일 미군 사상자 수를 메모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가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심야에 백악관 상황실로 내려오거나 전화를 걸어 베트남 전황을 파악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는 증언도 많다. 현지 사령관이 해야 할 일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는 비난이 있다. 존슨은 전형적인 지나치게 세심한 관리자(micromanager)였다.

존슨은 한국 군대가 베트남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존슨 정부로부터 용감하게 잘 싸우는 군대라는 인정을 받아야 했다. 처음부터 이 목표를 위해 3000킬로미터를 건너와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구국의 선택이라 주장했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한 환송식이 대대적인 국가 행사가 되었다. (서울기록원)

처음부터 군사, 경제 원조의 삭감 위협의 토대 위에서 결정된 전쟁 개입이니만큼 파병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미국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전해야 했다. 1965년 8월 13일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제3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0월 9일 청룡부대(제2해병여단)와 맹호부대(수도사단) 선발대가 베트남에 도착했다. 10월 20일 '주한 파월 한국군 사령부'가 개소했고, 이틀 뒤 10월 22일에는 맹호부대 본대가 베트남에 왔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에 한국군은 비전투(비둘기), 전투부대 (청룡, 맹호) 합쳐 모두 2만 600명에 달했다. 미군은 18만 4300명. 한국군은 미군의 10%가 넘었다.

다음이 오스트레일리아로 156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내내 최소를 투자해 미국으로부터 최대를 얻어냈다는 시기(猜忌)성 비난의 대상이 되는 필리핀 파병 수는 1965년 70명. 그다음 해 2000명으로 늘었지만, 전투 병력은 아니었다. 

앞의 존슨을 위한 아침 보고서가 보여주듯 한국군은 베트남 도착 직후 전장에 투입됐다. 한국군이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한 뒤 수개월, 벌써 미군 사령부는 한국군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상징적 가치를 위한 베트남에 '국기 더하기(More Flags)' 캠페인의 결실로 이루어진 파병이다. 전시 효과가 목적이었는데, 한국군은 마치 자기 나라가 침략당한 듯 싸웠다. 

한국군은 먼저 베트남 전장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후방에 처져있지 않았다. 감독과 관중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자마자 상대편의 골로 공을 몰고 질주하는 무모와 용기백배 사이의 축구 선수의 모습이 한국군에서 읽혔다. 물론 미국은 한국의 경기 능력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고, 이미 한국의 두 번째 전투 사단을 불러들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인정을 받고 전쟁에서 이기려면 두 개를 잘해야 했다. 적에게는 무섭고, 양민에게는 친절해야 했다. 한 손에는 적과 싸울 총, 다른 손에는 양민들을 위한 곡식, 약품, 연장을 들고 다니라고 한 것과 같은데, 한국군은 이 주문에 맞추기 위해 애썼다. 

1966년 3월 베트남 주재 미군 사령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몇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깊은 인상을 준다고 했다. 작전을 펴면서 과도한 포사격 지원 요청을 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베트남전에 꼭 필요한 군대라고 평했다.

첫째, 전투 효율성 측면에서 한국군은 적군에 대해 약 16대 1의 사살 비율을 기록할 정도로 잘 싸운다고 했다. 한국군 1명의 전사 할 때 적은 16명을 잃는다는 말이다. 작전을 마친 한국군의 행동도 "뛰어나다(excellent)"며 미군 사령부는 군기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작전이 끝나 베이스로 돌아오면 인근의 술집으로 달려가려는 미군과 달리 베트남에 즐비한 술집보다는 배구 게임 등으로 안정을 취한다고 했다. 솔직히 술집이 배구장보다 훨씬 많은 베트남의 상황에서 놀라운 절제력이라며 칭찬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한국군이 대민 사업에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했다. 미국이 못하는 일을 한국군은 한다는 우월감을 갖게한 측면이 있다. (대한뉴스)

대민 사업에도 한국군은 미군이 따라 할 수 없는 수준이란 평을 들었다. 한국군은 농촌 출신으로 농사에 익숙해 쌀농사를 거든다. 동양식 예절이 몸에 배어 있어 베트남 촌로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식사는 연장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베트남 소년들은 연장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큰 흉이 아닌데, 한국군은 이들을 야단친다. 촌로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미군 사령관들에게 한국군은 독특했다. 

전시이니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농작물을 교환하기 쉽지 않다.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장터'를 열어주고 양민들의 일상생활을 돕는다는 한국군에 대한 미군 사령부의 보고서도 있다. 한국군은 안전이 보장된 '장터'에서 적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한다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설명에 미군 지휘관들은 "바로 이거다"를 외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작전 중인 한국군 병사. 한국군은 잘 싸우지만, 양민 피해에 민감하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WarHistory.org) 

하지만 한국군의 장기는 따로 있었다. 군사 시설, 통신망, 도로 같은 병참선(line of communication)의 정찰, 경계, 방어, 호송 능력이 뛰어났다. 한국군이 책임 맡은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적의 준동이 줄어들어 안전이 유지된다고 미군 사령부는 평가했다. 한국군 관리 지역에서는 밤길을 차로 달려도 게릴라로부터 총맞을 가능성이 낮다는 증언을 쉽게 만난다. 적의 기습 공격이나 매복 작전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순화하면 한국군은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 작전에 주력했다는 해석할 수 있다.  

단순명료한 논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베트남에서 3개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마을, 양민, 그리고 안전한 도로망이었다. 특히 도로는 군대와 군대, 여러 지역을 이어주면서 군사 작전과 정부의 행정 수행을 가능케 했다. 길이 통치다. 

당연히 땅, 사람, 길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승리를 위한 이 3박자 책임 수행에 한국 군대는 실력을 인정받았다. 맥나마라는 1965년 6월 한국군 전투 부대의 파병을 촉구하면서, 남베트남군은 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1966년 10월 존슨이 한국을 방문해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지 않았으면 그가 한국을 찾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Lyndon B. Johnson Library)

잘 싸운다는 칭찬의 정치적 효과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예로 맥나마라는 한국군의 활약에 보은하기 위해 1966년 6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성은 국방부 장관의 워싱턴 공식 방문을 허락했다. 김성은에게는 훈장도 달아주었다. 그 후 4개월, 이번에는 존슨이 한국을 직접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정부 수립 후 두 번째였고 대한민국의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한국군에 대한 미국 측의 높은 점수는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3F로 정리되는 한국군에 대한 평가에 위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생선 요리에 비하면 먹음직한 살 속에 가시가 촘촘했다.

적과 교전할 때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Fearless) 군대, 대민 사업을 통해 양민들의 마음과 생각에 가까이 가는 친근감 있는(Friendly) 군대라는 평가 뒤에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무서운(Fearful) 군대란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한국군은 '공포의 군대 (Korean Miliary=Fearful Force)'란 등식이다. 어중간한 병력과 전략으로 한국군과는 교전하지 말라는 공산 게릴라 내부 지시도 존재했는데, 한국군은 잘 싸운다는 말이지만 잔혹하다는 뉘앙스가 섞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공포심이 한국군 전투력의 중요한 요소였다. 공포심을 증폭시키려면 군사 행동이 더 과격해져야 한다. 

한국군을 평가에 우려되는 단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빈틈이 없다(meticulous)" "의도적이다(deliberate)" "끔찍하다(harrowing)”. 냉혈적이란 느낌이 드는 표현들이다. 끝까지 적을 찾아내 공격하고 작전을 확실하게 마무리한다는 평가인데 그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었음이 느껴진다.

두려움을 유발하는 한국군의 군사 행동에 대한 증언으로 존슨의 보좌관 해리 맥퍼슨(Harry McPherson)의 현장 보고가 자주 인용된다. 그는 존슨의 지시로 1967년 7월 베트남의 한국군 부대를 방문했다. 맥퍼슨은 보고서에서 먼저 한국군은 정말 강인한 군대라 했다. 한국군은 심리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봉쇄, 수색 방식을 동원했다. 천천히 치밀하게 수행하는 작전은 '끔찍하지만 효과적'이라고 존슨에게 전했다. 그는 제대로 된 신분증 없이 밤중에 논길에서 한국군을 만나지 않길 바랄 뿐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경우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1966년 8월 베트남을 방문한 박정희. 미군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국군의 가치는 높아졌다. 베트남에서 미국은 의존국 한국의 군사 원조에 의지하는 위치가 됐다. (e영상역사관 정부 기록 사진집)

한국군을 보수적이고 지나치게 신중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와 비교할 수 없다고 덧붙인 맥퍼슨은 한국군이 민간인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일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 군대가 베트남 민간인의 삶에 대해 무관심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는 판단을 한다고 존슨에게 전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미군 사령관이 된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은 전쟁 수행은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해야 하는데 한국군을 드럼 하나만을 두드린다며 저돌적인 행동과 압도적인 화력에 의지하는 작전 실태를 비꼬았다. 그러면서도 종국에는 적을 제압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라면 수용해야 한다며 한국군의 전투 방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영국 언론은 1968년 '음력설 공세' 직후 다른 나라 군대들이 철저한 한국군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것이라는 황당한 분석도 내놓았다.

비극의 씨는 이렇게 뿌려졌다.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승전보가 귀한 전쟁에서 한국군은 다른 군대가 할 수 없는 성과를 내는 군대란 인상을 심어주어야 했다. 과도한 무력 사용은 철저한 작전 능력으로 포장됐다. 민간에 대한 군사 행동은 미군의 주 전략인 '수색과 파괴(Search and Destroy)'에서 한 단계 넘어선 '분리와 파괴(Cut and Destroy)' 작전으로 정당화됐다. 

베트남의 마을에서 적을 찾아내 사살하고 이들의 베이스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적과 이들의 군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양민과의 협조 관계를 끊겠다는 의도였다. 이 연결고리를 없애는 방식은 민간인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방식과, 무력과 잔혹함을 동원해 공포심을 심어주는 방법이 있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접근 방식이 더 많이 사용되었을까? 후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의 민간 피해를 정확히 계산하기는 거의 불가능이다. 전쟁 중 최소 100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40만~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민족해방전선, 남베트남 정부군, 미군, 한국군 어느 쪽도 민간인 피해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국군의 통제력(control)이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환경을 조성한 증표들은 여럿이다. 먼저 미국 국방부는 베트남전에 투입되는 병사들에게 '베트콩'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이들을 위한 교육 지침서는 "베트콩이 문제다"로 시작한다. 과연 미국에 베트콩은 누구였나?

"베트콩(Viet Cong)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의미하며, 공산주의의 온갖 속임수와 폭력을 사용한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해방', 즉 베트남 공화국을 위해 말과 무기를 사용하는 남자, 여자, 또는 어린이(man, woman, or child)로 이들은 강인한 투사이다." 이 현혹된 추종자들에게 민족해방전선은 그들이 섬기는 정부이지만, 대다수 남베트남인에게 베트콩은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하는 테러와 억압의 도구"라고 했다.

 

베트콩을 남자, 여자, 또한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강한 적으로 묘사한 미국 국방부의 교육 지침서. (Public Domain)

위의 헬리콥터 이미지가 보여주듯 이런 베트콩은 이를 잡듯 뒤져 색출하고 사살해야 하는 존재였다. 남자, 여자, 어린이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 똑같은 적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이 안내서의 설명이다. "물소 위의 앉은 아이가 베트콩 첩자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의심스러우면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 좋다(The child on the water buffalo can be a Viet Cong spy but it is better to treat him as a friend in case of doubt)." 흔한 말로 베트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전쟁에 투입된 평범한 병사에게 어려운 조언이다. 경계심과 친근함을 동시에 구사하라고 했다.

이 도전적인 환경과 상황에 미국의 인정을 목말라 한 한국의 병력은 투입됐다. 공격 목표를 신중하게 정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일단은 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양민들, 무력한 남베트남 정부군, 공폭과 같이 파괴성 높고 굉음은 크지만, 적의 의지를 꺾지 못하는 고비용 전략. 왜 태평양을 건너와 베트남에서 침략군이 아닌 게릴라들과 싸우고 있는지 답이 없는 50만 미군. 그리고 점차 거세지는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이 혼란스러운 베트남 전쟁은 한국군에게 기회였다. 원조 제공국 미국이 의지하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보다 더 잘 싸워야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과 과도한 무력 사용은 필수 조건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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