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분단 80년…차별없는 '진짜 평화'는 이제부터

단순한 무력 충돌의 종식만으로는 '가짜 평화'

광장에서 이룩한 평화, 국경을 넘어 온 세계로

'다시 만날 세계'로 새로운 평화 만들어 가자

2025-08-15     유하영 시민기자

2025년 광복 80년이자 분단 80년이 되는 해다. 이 기념비적인 해에 우리는 윤석열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웠다. 빛의 혁명이다. 그러나 권력의 폭주를 멈췄다고, 우리의 삶이 바로 평화로워지지는 않는다. 트럼프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과 관세 폭탄은 우리 경제와 안보를 뒤흔들고 있다. 주권 없는 평화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올해 8.15대회 슬로건은 ‘빛의 광장에서 주권과 평화로’인 이유다. 탄핵광장을 빛낸 2030 여성들은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기둥이자 평화의 주체로 우뚝 섰다.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짜 평화'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시민 80명이 독도 동도 선착장에서 가로 30m, 세로 20m 크기의 초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있다. 2025.6.30. [서경덕 교수 제공] 연합뉴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지적처럼, 전쟁 서사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진다. 일제강점기의 일본군 '위안부',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에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군 '위안부', 한국전쟁 당시 동원된 한국군 '위안부'…이들은 겉핥기식 전쟁 서사에서 배제됐다. 여성의 몸은 군사주의와 가부장제가 점령한 첫 식민지였다.

여성의 경험을 단지 피해로만 환원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족주의 담론은 종종 여성들을 희생의 상징으로 소비하여 이들의 주체성을 가린다. 윤금이 씨를 '누이'로 부르며 연대하는 방식조차 때로는 피해자의 정체성만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화 논의는 늘 여성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성을 호명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여성주의적 평화는 기존 평화 담론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전쟁을 끝내면 평화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성들은 차별과 폭력의 일상에 남겨진다. 전장에 나간 여성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여성 일자리는 후순위로 밀리며, 국가적 재건은 종종 여성에게 출산과 돌봄을 강제한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종전만을 평화로 환원하는 논리는 허구다. 여성없는 평화는 결국 폐허 위에 세워진 '가짜 평화'일 뿐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2015) 표지. 박은정 번역, 문학동네.

윤석열 탄핵광장에서 '진짜 평화'의 한 단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진짜 평화는 단순한 무력 충돌의 종식이 아니다. 일상의 안전과 존엄이 보장되고, 혐오와 차별이 공적 규범으로 억제되는 상태다. 광장에서는 이를 위해 구체적 실천을 약속했다. 집회를 시작하면서 낭독하던 평등수칙(발언과 행동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누구나 안전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약속한 규범)은 추상적 선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발언자가 혐오적 표현을 쏟아낼 때 우리는 즉각 문제를 지적했으며, 발언자와 주최 측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그 과정은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대신 대화와 책임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훈련하는 장이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미리보기라고 느꼈다. 평화는 먼저 폭력없는 관계 맺기를 실천할 때 제도적으로 힘을 얻는다.

제국주의와 군사주의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한반도에 주둔한 외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전쟁터에서 권력은 점령과 통제의 논리로 작동한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지 폭격의 문제가 아니다. 식량과 의약품 봉쇄, 의료기관 파괴, 기본적 생활수단 차단은 민간인의 생존권을 조직적으로 빼앗는 행위이다. 이 점에서 '기아는 학살이다'라는 선언은 인도주의적으로 통렬한 의미를 갖는다. 봉쇄된 사회에서 가장 먼저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은 임산부와 어린이이며, 가부장적 분배 구조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식량을 후순위로 미루곤 한다. 폭력이 총구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

 

아이들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4일 가자시티의 자선 기관으로부터 식량을 받기 위해 그릇을 들고 있다. 2025. 8. 4. [EPA=연합뉴스]

'침묵은 살인이다'라는 말의 의미도 다층적이다. 하나는 가해를 묵인하는 침묵, 다른 하나는 피해자가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폭력이다. 광장에서도 일부는 "우리는 탄핵만 원한다, 왜 차별금지법까지 들고 나오느냐"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이는 정치적 의제를 축소시키는 것을 넘어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살 행위였다. 우리는 그런 말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하지 않는 것이 곧 연대였고, 연대가 곧 안전의 조건이었다.

윤석열은 내란죄뿐만 아니라 외환죄도 저질렀다. 윤석열을 끌어내렸더라도, 전쟁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래서 '다시 만날 세계’라는 표현으로 새로운 평화를 제안한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서로의 안전을 약속하는 사회적 장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청년 여성들은 8년 전 박근혜 탄핵광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익명으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발언대에 오르고 있다.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지만, 광장에서는 평화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상행동이 배포한 평등수칙.

광장에서 시작된 약속이 제도와 국제연대로 이어질 때, 우리는 분단 80년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평화'다. 광장의 평화가 국경을 넘어, 분단 80년의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의 평화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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