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된 커비홀에 비친 강남 초고가 아파트의 미래
엘리자베스 시대 호화저택의 '영광과 몰락'
여왕 총애 받은 해튼 경이 만든 '핫스팟'
영국 내전 등 정치 격변으로 쇠락의 길
화려한 궁전에서 시골 목동의 거주지로
폐허의 매력에 관광객 몰리는 아이러니
부와 권력, 결국 시간 앞에 한낱 모래성
지난달 말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영국 중부 노샘프턴셔 시골 한가운데 자리한 대저택 커비홀(Kirby Hall)을 다녀왔다. 커비홀은 그야말로 '영광과 몰락'의 교과서다. 1570년 지어진 이 호화저택에는 한때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시대의 대법관 크리스토퍼 해튼 경(1540~1591)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붕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신세다. 4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곳은 권력의 허상과 시간의 무자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교과서가 됐다.
춤추는 궁신에서 대법관까지, 해튼 경의 신데렐라 스토리
크리스토퍼 해튼의 출세 과정은 그야말로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다. 시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눈에 띈 계기는 다름 아닌 춤 실력이었다. 1564년 법학원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그의 우아한 춤 솜씨를 본 여왕이 한눈에 반했다. 요즘으로 치면 '너는 나의 운명'을 외치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스타가 된 격이다.
여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해튼은 승승장구했다. 1572년 하원의원이 되더니, 1577년에는 근위대장, 1587년에는 대법관까지 올랐다. 그야말로 '춤 한 번 잘 춰서 인생역전'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급작스러운 출세는 당연히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춤추는 법관'이라며 비아냥거렸고, 심지어 여왕과의 불륜설까지 돌았다.
권력의 달콤함과 쓸쓸한 말로
해튼 경은 여왕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던 시절, 이 집에 '영국 저택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고전적 양식의 특징들'을 과시하며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당시 커비홀은 그야말로 영국 상류사회의 핫스팟이었다. 여왕을 비롯한 고위귀족들이 드나들며 정치적 거래와 사교활동이 벌어지는 권력의 중심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1591년 51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 집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마치 우리나라 재벌가들의 상속 다툼을 보듯, 후손들은 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해튼 경에게는 자식이 없어, 조카에게 상속된 재산은 점차 쪼개지고 팔려나갔다. 급기야는 '여왕의 가장 부유한 신하가 세운 화려한 궁전이 시골 양치기의 거주지'의 처량한 신세가 됐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는 여전히 화려한 잔치가 벌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던 후손들은 집 안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하나씩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귀중한 가구들, 예술품들, 심지어는 창문의 유리까지 뜯어 내다 팔았다.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던 이 집은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됐다.
영국식 '있어 보이기'의 원조
커비홀을 둘러보면 당시 영국 귀족들의 과시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2층 높이의 활 모양 창문, 정교한 조각들, 넓은 정원까지. 특히 건물 정면의 거대한 유리창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유리가 귀하던 시절, 이렇게 큰 창을 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정원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이탈리아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기하학적 패턴의 화단, 분수,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 '인스타그램용' 저택이었던 셈이다. 해튼 경은 이 집을 통해 자신의 교양과 세련됨을 과시하려 했다. 시골 출신의 성공한 신사라는 콤플렉스를 화려한 건축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일까.
건물의 세부장식들을 보면 더욱 흥미롭다. 해튼 경의 문장이 곳곳에 새겨져 있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상징하는 장미 문양까지 조각돼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 'HATTON'을 건물 곳곳에 새겨 넣기까지 했다. 오늘날 자기 이름을 딴 재단이나 건물을 세우는 재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작 지금은 관광객들이 몇 파운드 내고 폐허 구경을 하러 오는 곳이 되었으니, 세상사 참 아이러니하다. 한때 왕족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이 집에, 이제는 누구나 입장료만 내면 들어올 수 있다.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시간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
내전의 상처, 그리고 망각
영국 내전(1642~1651) 시기에는 의회파 군대가 주둔하면서 저택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치열하게 싸우던 그 시절, 이 아름다운 집은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군인들은 난방용으로 집 안의 목재들을 뜯어냈고, 포탄을 피하기 위해 벽을 뚫기도 했다. 마치 우리 역사의 임진왜란이나 6.25전쟁 때 수많은 문화재가 사라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특히 164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파괴가 이뤄졌다. 당시 집주인이었던 해튼 가문의 후손들은 왕당파를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의회파 정부로부터 무거운 벌금을 받아야 했다. 결국 벌금을 내기 위해 집의 일부를 헐어서 건축자재를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예술과 문화는 늘 가장 먼저 희생되는 법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신고전주의 건축이 유행하면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건축양식은 구식으로 여겨졌다. 새로운 유행에 뒤처진 커비홀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관리도 소홀해졌다. 19세기 초에는 아예 빈 건물이 되어 날씨와 시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낭만주의자들의 발견
19세기 중반,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바로 낭만주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이었다. 폐허에 대한 미학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커비홀 같은 '그림 같은 폐허'들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이곳을 찾아와 낭만적인 풍경화를 그렸고, 시인들은 몰락한 귀족의 이야기를 소재로 시를 썼다.
특히 유명한 것은 1820년대 이곳을 방문한 화가 터너(1775-1851)의 스케치다. 그는 무너져가는 커비홀의 모습을 통해 시간의 무상함과 자연의 힘을 표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이 멀쩡할 때보다 폐허가 된 후에 더 많은 예술적 영감을 제공한 셈이다.
작가 월터 스콧(1771-1832) 역시 이곳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그는 해튼 경의 이야기를 각색해,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극을 그려냈다. 덕분에 커비홀은 영국문학사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건물 자체로는 실패했지만, 이야기로는 성공한 셈이다.
폐허가 주는 묘한 매력
지금의 커비홀은 완전한 폐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건물도 아니다. 벽은 서 있지만 지붕은 없고, 창틀은 남아있지만 유리는 없다. 이런 애매한 상태가 오히려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랄까.
특히 해 질 무렵 이곳을 방문하면 더욱 인상적이다. 지붕 없는 건물 사이로 스며드는 석양이 폐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한때 화려했던 연회장에는 이제 풀과 이끼만이 자라고 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인공의 화려함보다 자연의 소박함이 더 감동적일 때가 있는 법이다.
방문객들은 종종 이곳에서 묘한 감정을 경험한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감정 말이다. 독일어로 'Ruinenlus(폐허 취미)'라고 하는, 폐허에 대한 기묘한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일 터이다. 완성된 것보다 무너져가는 것에서 더 큰 감동을 받는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신기하다.
관광 상품이 된 몰락한 저택
1930년 이후 정부의 구조작업을 거쳐 지금은 영국 유산청(English Heritage)에서 관리하는 관광지가 됐다. 입장료를 받는데 영국 유산청 회원이면 완전 무료다. 한때 권력의 중심이었던 곳이 이제는 정부의 한 수입원이 된 셈이다. 그래도 덕분에 후손들이 이 역사적 건물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연간 방문객은 약 15만 명 정도다. 주로 영국인들이 주말 나들이 겸해서 오는 경우가 많고, 외국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히 여름철에는 각종 문화행사도 열린다. 엘리자베스 시대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당시 귀족들의 생활을 재연하는 행사나, 고전음악 연주회 등이 인기다. 한때 실제로 벌어졌던 화려한 연회들을 재현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찾는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해튼 경 관련 상품들을 판다.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머그컵, 커비홀 모형, 엘리자베스 시대 요리책 등등. 권력자였던 해튼 경이 관광상품의 소재가 되어 팔리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현대적 해석과 교훈
최근에는 커비홀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환경주의자들은 이곳을 '자연이 인공물을 되찾아가는 과정'의 상징으로 본다. 인간이 만든 화려한 건물도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읽어낸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들은 해튼 경과 엘리자베스 1세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는지, 그리고 남성 신하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왕의 총애를 얻으려 했는지를 분석한다. 해튼 경의 출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별 권력관계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다.
건축사학자들은 커비홀을 영국 건축사의 전환점으로 본다. 중세적 요새에서 근세적 저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말이다. 방어보다는 과시와 편의를 중시하는 새로운 건축철학의 등장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커비홀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아무리 화려하고 견고해 보이는 권력과 부도 결국은 시간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해튼 경(1540~1591)이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총애를 받으며 이 거대한 저택을 지을 때, 과연 500년 후 이곳이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될 줄 알았을까?
특히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더욱 생각할 거리가 많다. 강남의 초고가 아파트들, 재벌들의 호화저택들을 보면 커비홀의 역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물론 그들의 집이 당장 폐허가 될 리는 없겠지만,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가치는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을 남기는 데 있다.
해튼 경의 삶을 보면 현재 우리사회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 능력보다는 인맥으로 출세하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집을 짓고, 결국은 후손들이 그 빚을 떠안게 되는 모습.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커비홀은 그런 면에서 성공한 셈이다.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역사의 교훈과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권력자로서의 해튼 경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건물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흥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멸일지도 모른다.
결국 커비홀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겉보기에 화려한 것보다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 그리고 권력과 부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아름다움과 의미는 다른 형태로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폐허가 된 저택이 온전한 저택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