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
종합예술단 봄날, 싸우는 이들과 함께하는 행복
노동자·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노래해온 종합예술단 '봄날'의 지난 4년간의 궤적을 소개하는 글을 이 예술단의 단원이자 한글운동가인 이건범 씨가 민들레에 보내 와서 싣는다. 이글은 「씨알의 소리」 광복 80주년 기념 특집호에도 게재됐다(편집자 주).
무대를 향해 고성의 야유가 쏟아진다. 이상화의 시에 변규백이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노래가 끝난 뒤 남녀 단원 둘이 무대 앞쪽으로 나와 언쟁을 벌이고 있다. 함께 삼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우’와 ‘무개’는 일본의 지배가 더욱 공고해지고 폭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친일 노선과 항일 노선을 둘러싸고 대립 중이다. 항일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무개의 그림자 뒤로 들판을 달리는 말발굽과 같은 피아노 전주가 울리면서 무대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둘러앉아 있던 합창단원들이 중앙으로 나와 노래를 시작한다.
바람을 지고 어둠을 이고 조국을 품고 끝도 없는 길
끝도 없는 길 빗줄기 뚫고 여기 달린다 나 여기 달린다
.....
아무개라고 적어다오. 묘비 없는 죽음뿐이니
해방되는 그날까지 총을 들어라
원수놈들 잊지마라 죽은 동지 함께 올 테니
대한독립 깃발 아래 총을 들어라 총을 들어라
(‘아무개-항일 독립군의 노래’ 중)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의 주제가 격인 ‘아무개-항일 독립군의 노래’는 종합예술단 봄날이 합창극 기획을 시작한 2023년부터 창작에 들어갔던 노래다. 가사는 이건범 단원이 지었고, 젊은 음악가 강반디가 작곡했다. 노래가 끝난 순간 한 단원이 태극기를 펼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객석에서는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아무개가 꿈꾸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지켜가자는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는 윤석열의 내란 계엄 사태 때문에 더더욱 시대적 의의가 커진 작품이다.
14곡의 합창곡과 6편의 낭독, 4장면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외세의 침탈이 시작된 1865년부터 광복까지의 80년을 하나의 이야기로 끌어가는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는 광복 80주년 기념 공연으로 기획되었다. 1945년 해방된 날로부터 80년이지만 절묘하게도 그 이전의 80년 역사가 광복의 감격과 의미를 돋보이게 한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합창단원 손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공연을 보러 왔던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이영국 사무총장은 공연에 감동한 나머지 합창단원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던 이 총장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음악교사로 살아온 이다. 그는 종합예술단 봄날에 들어온 최초의 성악 전공자다.
20명이니 규모만으로는 좀 수가 적다 싶은 합창단. 게다가 음악 전공자 한 사람 없이 프로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칸타타’를 기획하여 무대에 올린 종합예술단 봄날. 좀 이상한 시민들의 모임임에 분명하다. 급식 노동자, 일반 회사원, 시민단체 대표, 교육단체 간부, 작가, 출판편집자, 방과후 교사, 퇴임한 전교조 교사, 자영업자, 전 민주노총 간부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로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종합예술단 봄날은 2021년 9월에 창단하였다. 어떤 합창단에서 주축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좀 더 폭넓고 인간적 정이 넘치는 합창단을 만들고자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았다. 활동의 출발은 명동역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투쟁 문화제였다. 채 10명도 되지 않고 성부별 숫자 균형도 맞지 않았지만 봄날은 용감하게 무대에 올랐다. 그들의 무대는 세종호텔 앞 도로에 붙은 인도 한켠이었으니, 여느 음악인들의 무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렇게 시작된 종합예술단 봄날의 노래 행진은 동국제강 산재 사망 이동우 노동자 추모제, 경기도 폐암 사망 학교 급식노동자 추모제, 태안화력 김용균 추모제,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 추모제 등 3년 만에 100여 회의 연대 공연으로 이어진다. 다들 자기 일이 있고 수도권에 흩어져 사는 처지인지라 연대공연에 모든 단원이 다 모이기는 어렵다. 아주 적을 때는 대여섯 명이, 심지어는 세 명이 연대공연을 한 적도 있다. 노래를 잘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응원하고 아픔을 나누는 마음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종합예술단 봄날이 그저 목소리와 구호만 앞세우는 선동대는 아니다. 2023년 7월 강릉에서는 세계합창대회가 열렸다. 인터쿨투르(INTERKULTUR)라는 독일의 예술공공단체가 2000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면서 개최하는 합창대회로, 2023년에는 코로나로 1년 연기된 대회였다. '케이 보이스 싱 투게더'라는 예선 격의 국내 대회를 거쳐 세계대회에 나온 합창단들이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수백 개의 합창단이 강릉을 찾아왔다. 여러 합창단이 주목을 받았지만 단연 특별한 존재는 종합예술단 봄날이었다. 진보적 노래 문화와 사회 참여를 추구하는 합창단이 흔히 주류 문화라고 치부되는 합창대회에 나온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이들이 들고 나온 진보적인 노래로 결국은 혼성 시니어 부문에서 금상을 받은 것.
종합예술단 봄날의 금상 수상은 단지 그 부문의 참가 합창단 중에서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1명의 국내 심사위원과 4명의 해외 심사위원으로 꾸려진 심사위원단이 매긴 절대 점수가 20점을 넘어야만 금상 후보가 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봄날의 노래가 세계 무대에서 통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봄날은 네 곡의 노래를 불렀다. 2010년 광양의 한 제철소에서 일하다 용광로에 빠져 죽은 청년 노동자를 추모하는 '그 쇳물 쓰지 마라'(제페토 작사, 하림 작곡)와 거리에서 싸우는 부당 해직 교사의 활동을 응원하다가 만들게 된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이건범 작사 강반디 작곡),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함께하는 행복을 힘으로 느끼며 봄날을 맞자는 '봄날이 온다'(이건범 작사 전다빈 작곡), 그리고 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주 불린 교회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 등이다. 이 가운데 ‘봄날이 온다’는 봄날의 주제가와 같은 창작곡이다.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진보적인 노래 문화를 일구기 위해 창작에 노력하는 면모가 일반적인 시민합창단은 물론이요, 프로합창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2024년 독일의 기독교 베를린 선교부와 튀빙겐 대학 한국학과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세 차례 공연을 펼친 봄날은 ‘평화와 인권의 길 위에서’라는 공연 제목에 어울리게 ‘착한 전쟁은 없다’라는 평화 호소 노래를 창작하였고, 이 노래를 베를린 장벽 앞에서 불렀다. 벌써 이렇게 창작한 노래가 ‘봄날이 온다’와 산업 재해를 추방하기 위해 만든 ‘목숨은 지켜야 한다’, ‘어디까지 내주어야 한단 말이냐’, 부당해고 노동자들의 감동적인 싸움을 그린 ‘작은 저항’ 등 6곡이다.
종합예술단 봄날의 음악 분야는 진보적인 노래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민중가요만이 아니라 들국화의 ‘행진’,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등 유명한 대중가요와 ‘내 나이가 어때서’, ‘무조건’ 같은 트로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 영혼 바람 되어’와 같은 클래식까지, 그리고 창작곡까지 말 그대로 종합적이다.
노래 분야만이 아니라 공연에서도 합창에다 낭독과 연기, 춤까지 종합적인 예술단으로서 과감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칸타타 ‘아무개의 나라’는 그런 점에서 봄날에게도 매우 뜻깊은 공연이다. 특히나 이 공연은 대체로 1회 공연하면 사라지는 여느 합창단들의 공연과 달리 2025년만 해도 6차례 공연이 펼쳐지고, 해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즈음에 고정으로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 2025년 8월 9일에도 광복절을 앞두고 흑석역 소태산홀 공연이 잡혀 있다. 시민합창단에서 일종의 장기 공연을 만들어낸 이례적인 경우다.
사람들의 염원을 구체적으로 모아내는 일에도 봄날은 게으르지 않다. 실질적으로 세상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돈을 모으고 뜻을 모은다. 1년에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2천 명이 넘는 현실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운동에 힘을 보태고자 2023년 가을에 기금 모금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에서 모은 수익금 500만 원을 생명안전시민넷에, 100만 원을 김용균재단에 기부하였다. 2024년 7월 독일 공연 전에는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될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투쟁 기금 580여만 원을 모아 독일 코리아협의회에 전달하였다. 물론 응원의 노래가 빠지지 않았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그리고 철거를 기도하던 미테구청 앞에서 철거 반대 공연을 펼친 것이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에도 단원들이 100만 원을 모아 냈다.
사실, 종합예술단 봄날은 자기 살림도 빠듯한 편이다. 그럼에도 시민합창단 수준에서는 흔치 않게 지휘자와 반주자 수당을 높게 지급하고, 2025년부터는 이들의 퇴직금을 적립하기 시작하였다. 예술노동자인 지휘자와 반주자를 ‘착취’해서는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다는 생각에서다. 단원들이 거두는 회비로 이 재원을 모두 마련할 수는 없으니, 후원 단원을 모으고 있다. 정식 공연을 할 때면 자리의 좋고 나쁨이 없음에도 기본권 외에 가격이 더 높은 응원권과 후원권을 팔아 재원을 확보한다. 공연을 하고 나면 저작권료를 따박따박 정산하여 저작권협회에 낸다. 문화예술 생태계를 조금이라도 보호하고 키워가려는 마음에서다.
세종호텔 앞 공연 이야기도 했지만, 봄날의 무대는 장비와 주위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바로 옆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노래가 들리든 말든 바쁘게 걸어가고, 전원이 없어 마이크를 설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춥든 덥든 실내가 아니라 주로 바깥에서 공연하니 추위에 발 동동 구르면서 기다렸다가 언 목소리로 노래하고 한여름 더위엔 뜨거운 숨결로 노래한다. 비가 폭포수처럼 퍼부을 때도 비옷을 입고, 아니면 처마 밑에서 봄날은 노래한다. 함께 살아가는 존엄한 인간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례하고 독선적인 판단에 인생의 낭떠러지로 몰리는 모양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23년 강릉 세계합창대회에서도 불렀던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토바이 버스 빵빵 사나운 길바닥 한 켠에 줄지어서
힘 내세요 응원의 노래 부르네 등 뒤에 바쁜 발걸음
무대 없는 여기서 예술은 무슨 예술
그대 없는 거기서 진실은 무슨 진실
시들지 않는 시들지 않는 당신이
당신이 예술입니다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 중)
“봄날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거리에서 노래하는 그들을 ‘현대의 독립운동가’로 느꼈습니다. 그 진정성과 뜨거운 연대의 힘이 제 마음을 움직였지요.”
지휘자 심형진의 소감이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과 형식미를 추구하는 순수 예술인이었던 바리톤 심형진에게 음악은 오롯이 ‘음악을 위한 음악’이어야 했다. 호흡과 화음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콘서트홀이 중요했다. 그는 이제 동지다.
“어느새 거리, 묘지, 농성장, 공장, 빈소, 투쟁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지휘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지요. 처음엔 낯설고도 충격적이었지만, 점차 이 활동을 통해 음악이 가진 위로와 연대의 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순수음악과 실천적 음악 활동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고 느껴요. 봄날의 음악은 목적을 갖고 있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기에 오히려 더욱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울림 안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죠.”
지휘자 심형진은 클래식 음악을 기획하고 연주하는 정통 음악인이지만 봄날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여러 세상과 만난다. “함께하는 행복이 우리 힘이다”라는 봄날의 구호처럼,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의 힘과 기쁨을 체험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합창의 시대다. 노래를 특출나게 잘 부르지 못해도 여러 목소리가 모이고 섞여 하나의 행복하고 환상적인 소리를 내는 합창은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활동이다. 종합예술단 봄날이 그 행복한 시대의 선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