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청 설립 때 영국 SFO의 한계 반면교사 삼아야

'졸린(Sleepy), 선택적(Selective)' 이란 멸칭

수사 지연으로 정의는 '시간과 함께 자연사'

'칼날은 아래로만, 위로는 솜사탕' 비난받아

SFO, '우나오일 사건'…스스로 신뢰 허물어

시민 참여한 '인선위원회' 구성해 감시해야

2025-07-13     김성수 시민기자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이 있다. 단, 그 전에 너무 자주 정의가 패배한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패배 장면을 반복 재생해주는 기관이 있으니, 바로 영국의 중대비리수사청(Serious Fraud Office, SFO)이다.

SFO는 지난 1987년 마가릿 대처 보수당 총리가 창립했다. 1987년은 대처가 3선에 성공한 해였다.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불렸던 대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작은 정부, 시장중심개혁, 노조약화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SFO의 설립은 이런 대처 정부의 금융 및 기업규제강화 흐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빈번했던 대형 금융사기 사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기도 했다. 창립 당시만 해도 SFO는 ‘사기왕국’이 된 런던금융가에 철퇴를 내릴 영국정부의 야심작이었다. '독립성과 전문성, 신속성을 갖춘 정의의 창설!'이라며 등장한 이 기관은 '중대한' 또는 '진지한'이란 뜻의 'Serious'라는 단어를 간판에 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중대한 실패'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영국 중대비리수사청. 위키피디아

속도는 거북이, 결과는 증발

SFO의 수사는 그 간판처럼 놀라우리만치 진지하다. 문제는 그 진지함이 거북이의 철학 수준이라는 것. 착수부터 기소까지 5년, 10년은 기본선택이고, 어떤 사건은 시효가 다 끝나갈 즈음에 기소 여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수사가 끝날 무렵이면 피의자는 이미 은퇴 또는 자연사, 증거는 디지털 소각, 기업은 구조조정으로 책임소재를 고의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쯤 되면 SFO의 수사지연은 마치 정의를 '시간과 함께 자연사' 시키려는 전략같다.

SFO의 별명 중 하나는 'Sleepy Fraud Office (졸린비리수사청)'이다. 아무리 중대한 범죄라도 이 기관에 들어가면 '수면제 한 알 먹은 셜록 홈즈'가 처리한다. 결과는 뻔하다. 피해자들은 환멸을 느끼고, 기업은 다시 뇌물영업부를 가동한다.

 

런던에 있는 SFO 본부. 구글 이미지

'돈 내고 용서받기', 기소유예의 귀족판

SFO의 대표 상품은 '기소유예 합의제도(Deferred Prosecution Agreement)'다. 구조는 간단하다.

기업: “잘못했어요. 벌금 낼게요.”
SFO: “좋아요. 대신 기소는 미뤄드릴게요.”

정의는 감옥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은행계좌에서 이체되는 순간 실현된다.

지난 2017년 롤스로이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20년 동안 아시아·남미·아프리카를 돌며 뇌물관광을 즐겼다. 그 결과는? 벌금 5억 파운드, 그리고 한 장의 사과문. 그게 끝이었다. 감옥 간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뇌물을 준 회사가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면 끝나는 법, 이게 바로 '영국식 유감정치'다.

놀라운 건 이 제도가 언뜻 공정해 보인다는 것이다. 기업이 벌금도 내고, 협조도 하고, 개선 약속도 하니 제도 자체는 '현실적 대안'처럼 포장된다. 문제는 이게 적용되는 대상이 대부분 대형 다국적기업이라는 점이다.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자는? 그런 거 없다. 뇌물 5000만 원이면 직접 영치번호 받는다. 롤스로이스는 20년형 범죄에 벌금으로 해결했는데, 동네 건설업자는 거래명세서 하나 잘못 써도 구속영장부터 나온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있다. 선택적비리수사청(Selective Fraud Office). 정의의 칼날은 아래로만 향하고, 위로는 솜사탕이다.

 

SFO 표지판. 구글 이미지

‘우나오일 사건’, 스스로 부패를 증명한 수사기관

SFO의 실상을 보여준 정점은 지난 2000년대 초중반 발생한 ‘우나오일(UnaOil) 사건’이다. 이 사건은 수사기관이 얼마나 스스로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법조 블랙코미디다.

지난 2000년대 초부터 2010년대 초까지 중동·아시아 지역에서 석유 개발과 관련해 광범위한 뇌물 거래가 있었다. 2016년 SFO는 이를 수사하며 '중대한 증거'들을 확보했지만, 일부러 법원에 보고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법원의 눈을 가린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난 2021년부터 2022년 항소법원은 SFO의 수사방식에 대해 "심각한 절차적 흠결이 있다"고 판결했고,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인들조차 무죄를 선고받았다. 결국 SFO는 이 사건으로 자신이 수사하던 부패를 스스로 닮아가는 역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의는 절차를 통해 구현되지만, 절차가 엉망이면 정의도 고물상 신세가 된다. SFO는 그걸 몸소 실험해 본 셈이다.

 

런던에 있는 SFO 본부 안내판. (구글이미지)

한국이 만든다면? '제도'보다 '정신'부터

이쯤 되면 질문이 나온다. “한국에도 SFO 같은 기관이 필요할까?” 정답은?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결코 영국처럼 만들면 안 된다.

법기술자 전유물 아닌 시민 참여하는 통제 제도부터

한국형 SFO 또는 이와 유사한 기소청을 만든다면 기관장 인선부터 시민사회가 개입해야 한다. 청와대 인사검증실에서 뽑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학계·노조·언론 등이 참여하는 '인선위원회'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권력과 자본에 흔들리지 않을 공익적 인물을 기관장으로 세워야 한다.

SFO의 내부는 법률가, 회계사, 수사관 등 ‘기술 전문가’ 위주다. 그러나 이들은 종종 정의보다는 절차, 피해보다는 계약서, 시민보다는 판례를 우선시한다.

한국의 수사기관은 전문성을 인정하되, '시민감수성'이 빠지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 법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흔히 '법꾸라지'가 돼서 법 뒤에 숨는 재주도 좋다는 걸, 우리는 내란수괴 윤석열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결정은 투명하게, 평가는 독립적으로

기소유예나 불기소 결정은 때때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 판단이 불투명하면 곧 특혜다. 수사 착수와 종료 사유를 공개하고, 외부 감사기구에서 정기적으로 수사기관의 성적표를 발표해야 한다.

“이번 분기 수사성공률 : 58%. 불기소 사유 : ‘외압 없음, 다만 설명 불가’.”

이런 보고서가 공공연히 돌아다닌다면, 국민의 신뢰는 OTP(One-Time Password) 즉 인터넷 뱅킹, 보안인증 등에 쓰이는 짧은 시간 내에 자동으로 만료되는 임시 일회용 비밀번호보다 더 빨리 만료된다.

기득권 수사를 회피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수사의 공정성을 확보하려면, 누구를 수사할 것인지 정하는 기준부터 명확해야 한다. 특히 정치권력과 재벌에 대한 수사회피는 사유를 공개하고, 시민사회로부터 비판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공정함은 '모두에게 관대하거나 모두에게 엄격한'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에게도 두려운 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된다.

정의는 마케팅이 아니라 실천

SFO는 지금도 "우리는 정의의 최전선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최전선이 실제로는 벌금협상의 접수처라면, 국민은 그 정의를 믿지 않는다. 정의는 법률용어도, 대변인 브리핑도 아니다. 행동이고, 실천이고, 책임이다.

한국이 중대비리수사청을 만든다면, 영국의 실패를 뼈저리게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속도는 한국의 ‘빨리빨리’ 정서를 반영하여 빠르고, 기준은 공정하며, 책임은 분명하고,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는 기관. 그런 기관이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외치게 될 것이다.

“정의는 빠르게 오고 있다. 결코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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