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지 말라 했거늘…스마트폰, 현대판 '피핑 톰'
연민 실천 위해 알몸 행진 불사한 고다이바
감동받은 주민들 창문 닫았는데 훔쳐본 톰
못된 호기심…'엿보기 즐기는 호색가' 오명
클릭 한 번에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세상
궁금하면 지는 걸까, 이기는 걸까?
누가 그랬다. "궁금하면 지는 거다." 그런데 묻고 싶다. 도대체 인간은 왜 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궁금해 하는 걸까? 왜 우리는 그렇게도 '남의 일'에 열심일까? 누군가의 연애, 이웃집 택배, 연예인의 공항 패션, 낯선 이의 SNS 일상에까지 우리의 눈과 마음은 끝없이 기웃거린다.
호기심은 인간을 진보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가 지나친 호기심은 윤리를 가르고 경계를 넘으며, 타인의 삶을 침범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도가 지나친 궁금증'의 대명사가 있다. '피핑 톰(Peeping Tom)'. 우리말로 흔히 '엿보는 톰' 또는 '엿보기 좋아하는 호색가'로도 불린다. 영어권에서는 누군가 몰래 남을 지켜볼 때, 또는 부적절한 호기심을 가질 때 "Don’t be a Peeping Tom! (남의 일에 기웃거리지 마!)"라고 말한다. 어쩌다 '톰'이라는 흔한 이름 하나가, 천 년 넘게 '몰래 엿보는 자'의 상징이 되었을까?
고다이바, 알몸의 용기
이야기의 무대는 11세기 중엽, 앵글로색슨 시대의 영국 중부, 정확히는 코벤트리(Coventry)라는 도시다. 당시 이곳의 영주는 레오프릭 백작(Lord Leofric). 전형적인 중세 영주답게, 그는 백성들의 고통에는 무심했고, 수탈에는 집요했다. 소작농들은 땀 흘려 일하고도 세금에 짓눌려 헐벗고 굶주렸다.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아내, 고다이바 부인(Lady Godiva)이다. 오늘날의 초콜릿 브랜드로 더 친숙하지만, 역사 속 고다이바는 단순한 귀족 부인이 아니었다. 사회적 책임과 연민을 실천에 옮긴, 최초의 민중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적 상징이었다.
고다이바는 남편에게 수없이 간청했다. "백성들이 죽어갑니다. 세금을 낮춰 주세요." 하지만 백작은 빈정거리며 조건을 내걸었다. "당신이 벌거벗고 말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돈다면, 생각해 보지요."
백작의 진심은 '절대 불가능한 조건'을 걸어 아내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다이바는 생각과 달랐다. 그녀는 백성의 고통 앞에 자신의 체면과 수치심을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으로 알몸을 가리고, 백마에 올라 도시를 돌았다.
이 장면은 단순히 자극적인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절박한 간청이자, 신념의 행위였다. 말 한 마디로 바뀌지 않던 백작의 마음을, 침묵의 실천이 흔들었다.
침묵의 연대, 그리고 한 사람
고다이바의 행위는 단숨에 마을 전체의 마음을 울렸다. 백성들은 그녀의 숭고한 결단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누구도 창문을 열지 않겠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겠다."
그리고 실제로, 고다이바가 시내를 도는 동안 모든 창문은 닫히고, 거리는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민망함도, 흥미도, 인간적인 궁금증도 모두 조용히 삼켰다. 이 순간, 코번트리는 역사상 가장 고요하고 위대한 집단적 윤리를 실현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순간에 반드시 '한 놈'이 있다. 그 한 놈, 바로 이름도 절묘한 '톰(Tom)'.
재봉사 톰의 눈
전설에 따르면 톰은 평범한 재봉사였다. 그는 유독 호기심이 많고, 남들보다 한 발짝 더 알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
“정말로 아무도 안 본단 말이야? 진짜? 말도 안 돼!”
톰은 이 말할 수 없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작업실 창문으로 가서 아주 작은 틈을 통해 거리로 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고다이바 부인의 말을 탄 모습… 머리칼로 간신히 가린 알몸… 그 역사적 순간을 기어이 엿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순간, 톰은 눈이 멀었다.
일각에서는 신의 벌, 혹은 양심의 저주라고 해석한다. 또는 그 장면을 본 후 극도의 죄책감으로 스스로 눈을 감았다는 해석도 있다.
어찌 됐든, 그는 '호기심이 불러온 대가'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고, 그 이름은 이후 수백 년 동안 '몰래 엿보는 자'의 아이콘이 되었다.
전설인가, 진실인가
이 일화는 단지 도덕교훈을 위해 꾸며진 이야기일까? 실제 역사일까? 고다이바 부인은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알몸으로 말을 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더욱이 톰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전설이 생긴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즉, '엿보기 톰'은 후세의 창작, 중세의 도덕극 같은 장치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진위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이야기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지 말라면 더 보고 싶고, 지켜야 할 경계는 깨고 싶어진다.
디지털 시대의 톰들
중세의 톰은 한 명이었지만, 오늘날의 톰은 수없이 많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 안에 톰 하나쯤은 살고 있다.
창문이 없어도 된다. 스마트폰 하나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클릭 한 번에 엿볼 수 있다. 유튜브 몰카 채널, SNS 스토킹, 연예인 파파라치, 불법촬영물, 위치추적 앱… 인간의 호기심은 기술과 결합하며 더 빠르고 교묘하게 타인을 침범하고 있다.
무서운 건, 이제 엿보는 쪽이 눈이 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기술의 눈은 더 뚜렷하고 정밀해졌다. 대신, 우리의 감수성, 우리의 윤리, 우리의 연대의식이 점점 눈이 멀고 있는 건 아닐까?
커튼은 누가 치고, 누가 걷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고다이바 시절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커튼을 쳤다. 그러나 지금은 권력이 커튼을 걷고 우리를 들여다본다. 감시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정보는 위에서 통제되고, 시민은 투명하게 분석된다. 감시 카메라, 얼굴인식, 신용카드 내역, 심지어 검색어 기록까지.
현대의 톰은 개인이 아닌 체제 전체다. 그리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용기를 낸 이들, 내부고발자나 기자, 고다이바 같은 존재들은 오히려 비난받는다. 그들을 향해 수많은 톰이 다시 창문을 연다. 이번엔 손가락질을 위한 엿보기다.
묻는다, 나는 톰인가, 백성인가, 혹은 고다이바인가
이 오래된 전설은 묻는다. 당신은 엿보는 자인가? 아니면 눈을 감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자인가? 혹은, 진실을 위해 옷을 벗을 용기가 있는 자인가?
'엿보기 톰'은 먼 옛날 중세의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거울이다.그리고 오늘도, 그 거울은 묻고 있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몰래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누군가의 불행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과연 보는 자인가, 보여지는 자인가, 함께 눈을 감는 자인가?
톰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
이름 하나로 천 년 동안 욕을 먹은 사내, 톰. 아무 잘못도 없이 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오늘날에도 그 어원을 알고 멋쩍게 웃는다. 하지만 그 '톰'이 결국 말하고자 했던 건 단순한 경고일지 모른다.
"보고 싶다면, 그 대가를 생각하라."
"엿보는 눈은 작지만, 잃는 것은 클 수 있다."
다시, 창문 앞에서
지금, 당신의 손 안에도 작은 창문이 있다. 그 창을 통해 당신은 무한한 세상을 볼 수 있고, 동시에 누군가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창문을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 선택은 당신의 눈에 달려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엿보는 톰인가? 고다이바의 백성인가? 아니면 그 백마 위의 고다이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