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혁명가인가 독재자인가?

찰스 1세의 목을 베고 역대 최고의 구조조정

'왕 없는 왕'이 된 크롬웰이 남긴 권력의 교훈

2025-07-04     김성수 시민기자

영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다. 그는 혁명가였을까, 독재자였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마치 정치인들이 선거철에는 서민의 벗이었다가 당선 후에는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처럼, 크롬웰도 참 묘한 변신을 보여준 인물이다.

 

시골지주 크롬웰이 살던 집, 지금은 관광지다(위키피디아).

시골지주에서 호국경까지, 인생 대역전극의 교본

크롬웰은 원래 영국 케임브리지셔 헌팅던 지역의 시골지주이자 평범한 하원의원이었다. 젠트리(gentry) 계급 출신으로 농장을 경영하며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빚쟁이와 변호사가 늘 곁에 있는' 그런 삶을 살았다. 1640년 케임브리지 지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동료의원들 사이에서는 그저 그런 인물이었다. 심지어 어떤 회의기록에는 '의견 없음'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영국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타이밍'이었다. 찰스 1세가 의회와 싸우고 있을 때, 이 '나대지 않는 독실한 청교도 아저씨'는 "아, 이거 기회다!" 하며 의회군에 가담했다. 마치 요즘 유튜버들이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콘텐츠를 만드는 것처럼.

그의 기병대 '아이언사이드(Ironsides)'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 부대였다.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술도 안 마시고, 도박도 안 하고, 오직 하느님과 크롬웰만을 믿었다. 요즘으로 치면 극성 팬클럽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왕의 목을 자른 남자, 역사상 가장 과감한 '구조조정'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크롬웰이 직접 도끼를 휘두른 건 아니지만,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왕을 처형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오늘날 대기업 회장을 해고하는 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신의 뜻이다!"라며 왕의 목을 친 크롬웰. 그런데 웃긴 건, 나중에 자신이 왕보다 더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혁명이 혁명을 낳고, 권력이 권력을 부른다"고 평가한다.

 

올리버 코롬웰(Sora).

호국경이라는 이름의 왕, 브랜딩의 천재

크롬웰은 1653년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호국경(護國卿)은 나라를 지키는 관리라는 뜻이다. 왕이라고 하면 반발이 클 테니, 그럭저럭 멋진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요즘 기업들이 '구조조정' 대신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네이밍 센스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 왕제를 없앤다고 해놓고는 자신이 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한 셈이다. 마치 "이 제품은 화학첨가물이 없습니다"라고 광고하면서 온갖 인공감미료를 넣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다.

아일랜드 정복,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참극

크롬웰의 가장 어두운 면은 아일랜드 정복이었다. 1649년부터 1653년까지 벌어진 이 전쟁에서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크롬웰은 이를 "가톨릭에 맞서는 성전"이라며 정당화했지만, 실상은 잔혹한 정복전쟁이었다.

아일랜드인들에게 크롬웰은 지금도 증오의 대상이다. 그들이 '크롬웰의 저주'라는 욕을 쓰는 걸 보면, 그의 '유산'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알 수 있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일랜드 펍(선술집)에서 크롬웰 얘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싸해진다고 한다.

엄격한 청교도 사회, 재미없는 나라 만들기 프로젝트

크롬웰 치하의 영국은 극도로 엄격했다. 연극도, 춤도 , 크리스마스 축제까지도 금지였다. 심지어 화장도 죄악시했다. 마치 모든 재미를 법으로 금지한 듯한 사회였다. 당시 영국인들은 "이게 자유를 위한 혁명의 결과냐?"며 한숨을 쉬었으리라. 왕의 전제정치에서 벗어났더니 더 까다로운 종교적 독재를 만난 셈이니 말이다.

 

찰스 2세는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1661년, 이미 죽은 크롬웰의 시신을 파내어 교수형에 처한 장면을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죽어서도 벌 받은 남자, 사후 3년 만의 처형

1658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 리처드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텀블링 딕'(Tumbling Dick = 굴러 떨어진 딕(리처드) = 권력에서 굴러 떨어진 리처드) 즉 '실패한 지도자'라는 별명답게 리처드는 곧 물러났고,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돌아왔다.

찰스 2세는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1661년, 그래서 이미 죽은 크롬웰의 시신을 묘지에서 파내어 교수형에 처했다. 죽은 자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이 기괴한 의식은 당시에도 "좀 오버 아니냐?"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크롬웰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크롬웰은 혁명가이자 독재자였다. 그는 구체제를 무너뜨린 혁명가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집권체제를 만든 독재자이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를 외치며 시작한 혁명이 또 다른 부자유를 낳는 것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크롬웰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시골지주에서 시작해 호국경이 된 그의 인생은 권력의 마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한때 경제적 몰락을 겪고 농장을 팔기까지 했던 시골지주가, 종교적 열정과 내전의 기회 속에서 어떻게 절대권력자로 변모했는지 코롬웰의 삶은 권력욕망의 무서움을 드러낸다.

혁명의 이상과 권력의 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딜레마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혁명가든 독재자든, 크롬웰은 분명 영국사의 전환점을 만든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역사에는 영웅도 악역도 없고, 오직 복잡한 인간들만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 크롬웰 동상이 그곳에 자리잡은 이유는, 그가 의회주의를 옹호한 역사적 인물이며, 영국 정치발전에 끼친 중대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 비록 그의 통치는 독재적이었고 논란도 크지만,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정치로 나아가는 과정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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