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선진국 되려면 한국-영국의 제도·철학 수렴해야
영국 의료 대기 길지만 치료 받을 땐 귀족
한국은 속도가 장점이나 그만큼 비용 부담
교육, 경쟁 지옥인 한국, 자유 천국인 영국
주거, 노후, 실업문제 대하는 자세도 대조
35년간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산 덕분에 두 나라 복지제도를 체험했다. 아니, 정확히는 '실험용 쥐'였다. 그 생생한 실험 결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의료: NHS의 마법과 한국의 스피드
영국 NHS, '영국판 무한도전'
영국 국민의료서비스(NHS)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NHS는 당신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뭔 소리야?" 했지만, 살다보니 명언이었다. 감기에 걸려 주치의(GP : General Practitioner) 예약을 잡으려면 2주 대기는 기본이다. 그 사이 감기는 자연 치유되거나, 폐렴으로 진화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의료계에서 실현하는 셈이다.
무릎 수술은 1년, 백내장은 6개월을 대기하기 일쑤다. 영국 친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수술 날짜 잡히면 기뻐하지 마. 그 사이에 늙어 죽는 게 영국인의 숙명이야."
하지만 일단 치료가 시작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에게 왕족 대우를 받는다. 그것도 공짜로! 암 수술이든 장기 이식이든 모든 게 무료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NHS를 욕하면서도 사랑한다. 일본에서 자주 쓰는 '츤데레'(즉, 겉으로는 차갑고 까칠하게 굴지만, 속으로는 애정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이중적 태도) 관계랄까.
한국 의료, '의료계 배달의민족'
한국 의료는 스피드가 생명이다. 감기? 10분 진료, 30분이면 약봉지까지 들고 나온다. 응급실? 24시간 언제든 대기 중이다. 한국에서 '아파도 병원 못 간다'고 하면 그건 돈이 없거나, 게으른 거다. 속도로 따지면 한국 의료는 F1, 영국 의료는 우마차급이다. 하지만 그만큼 한국 의료는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건강보험이 있어도 큰 병에 걸리면 "집 팔아 치료하자"는 소리가 나온다.
결론은 속 터지면 한국, 속 편하려면 영국이다. 한국은 '빨리빨리'의 나라답게 속도전을, 영국은 '신사'의 나라답게 여유를 택했다.
교육: 경쟁의 지옥 vs 자유의 천국
한국 교육, '교육계의 헝거 게임'
한국 교육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 번호표를 달고 나오는 나라'다. 유치원생이 영어 스펠링 테스트를 본다. 초등학생이 새벽 6시에 학원에 간다. "몇 등이야?"는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많이 듣는 인사말이다.
사교육비는 가계를 정조준한다. 부모들은 "애 교육비 때문에 라면만 먹는다"며 울상을 짓지만, 그래도 학원비는 꼬박꼬박 낸다. 이쯤 되면 학원이 종교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창의성? 시험 점수로 증발한다. "상상력은 사치야!"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영국 교육, '교육계의 히피 문화'
영국은 정반대다. '하고 싶은 거 해라, 네 인생이니까'가 교육철학이다. 시험보다는 체험, 암기보다는 탐구를 중시한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도 성적만으로는 안 된다. 인성, 창의성, 사회 기여도까지 종합 평가한다. 한국 부모들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다.
대학 등록금도 혁신적이다. 영국은 소득기반 후불제로, 돈 벌면 갚고, 못 벌면 말고, 30년 지나면 자동 탕감이다. 한국은 부모가 노후자금까지 털어서 미리 낸다.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고착화의 족쇄가 된 현실이다.
한국 부모의 삶을 짚는 한마디. "애 대학 보내려고 평생 노예처럼 살았더니, 이제 애가 취업 안 돼서 또 뒷바라지해야 한다고?"
주거: '영끌'의 나라 vs 집걱정 없는 나라
한국의 내집마련, '부동산교 신도들의 성지순례'
한국에서 '내 집 마련'은 종교다. 전세, 월세는 임시방편일 뿐, 결국 '내 집'을 사야 한다는 강박이 DNA에 새겨져 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기)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부동산 앱은 국민 필수 앱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뭘 보나 했더니, 부동산 시세 확인 중이다. 이쯤 되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부동산 전문가가 됐다.
영국의 공공임대, '집걱정 끝판왕'
영국에는 공공임대주택(Council Housing)이라는 신박한 제도가 있다. 지방정부에서 제공하는 이 주택은 임대료가 저렴하고, 평생 거주 가능하며, 자녀에게 상속까지 된다. 물론 대기는 엄청 길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집 걱정 끝이다. 40~50대가 임대주택에 살아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집은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라는 철학이 사회에 뿌리내려 있다.
한국인의 반응을 예상해 본다. "평생 임대? 그럼 언제 부자 되는데?"
노후: 여행하는 할머니 vs 택배 나르는 할아버지
영국 노후, '실버 백패커들의 천국'
영국 거리를 걸으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노인들을 자주 본다. 여행 가는 건 아니고, 그냥 취미활동 하러 가는 거다. 기본연금에다 각종 노인복지가 빵빵하게 받쳐준다. 60~65세 이상은 대중교통 무료, 난방비 보조, 각종 수신료 면제 등등.
무엇보다 의료비 걱정이 없다. 그래서 "노후 계획이 뭐냐?"고 물으면 "어디 여행갈까?"라고 답한다.
한국 노후, '늙어도 현역, 죽을 때까지 일해라'
한국에는 '낼 땐 연금, 받을 땐 용돈'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많은 노인들이 택배, 청소, 경비 등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한국에 있을 때 어느 날 택배 박스에서 이런 스티커를 봤다: "할아버지가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십니다. 1층에서 받아주세요."
가슴이 뭉클했지만, 동시에 현실이 씁쓸했다. 이게 진짜 '어르신을 공경하는' 방법일까?
실업: 재기의 발판 vs 사회적 낙인
영국의 실업급여, '실직자들의 재활 프로그램'
영국에서 실직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다. 실업급여와 함께 직업훈련, 취업지원 프로그램이 패키지로 제공된다. 실직자들은 "현재 구직 중"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한국의 실업급여, '백수라는 낙인과의 전쟁'
한국은 실직하면 실업급여보다 사회적 시선이 더 무섭다. "왜 일 안 해?"라는 눈총이 실직자를 이중으로 괴롭힌다. 빠른 지급은 장점이지만, 기간도 짧고 눈치도 보인다.
복지 철학: 정(情) vs 제도
한국과 영국 복지의 핵심 차이는 '정'과 '제도'다.
한국은 공무원이 직접 방문해서 "어르신, 밥 드셨어요?"라고 묻는다. 이웃이 어려운 집을 챙긴다. 따뜻하지만 불공정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영국은 철저히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감정은 없지만 일관성과 공정성이 있다. 차갑지만 믿을 만하다. 정이 사람을 살릴 때가 있고, 제도가 사람을 살릴 때도 있다. 어느 쪽이 우월한 게 아니라, 둘이 합쳐지면 완벽할 텐데 말이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
두 나라를 체험하며 내린 결론은 복지는 따뜻한 말보다 안정된 제도에서 나온다. 한국은 아직도 복지를 '시혜'로 본다. 혜택 받는 걸 부끄러워하고, 예산 증가를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복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도움이 필요하다.
복지선진국을 향한 제언: 꿈은 크게!
한국은 이제 복지선진국 문턱에 서 있다. 경제력도, 제도기반도 어느 정도 갖췄다. 남은 건 인식의 전환이다.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약한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영국도 시행착오 끝에 지금 모습을 갖췄다. 한국의 빠른 속도와 따뜻한 정, 영국의 안정성과 제도적 완성도. 이 둘이 만나면 어떨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한국이 따뜻한 정과 든든한 제도를 모두 갖춘 복지선진국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더 이상 '속 터지는 한국, 속 편한 영국'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