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이니셔티브의 성공을 바라는 단상
모방형 국가에서 선도형 국가로
정책선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대통령 선거는 아쉬움이 컸다. 활발한 정책토론이 없어서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책공약은 이재명 후보의 ‘K-이니셔티브’ 비전이었다. 이 비전은 세계가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한국의 소프트파워 자산을 한국과 세계 관계 전반으로 확장하여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K-이니셔티브는 최근 들어 우리 국민들의 인식 속에 자연스럽게 정착된 선진국 정체성을 대내외 정책에 반영하려는 구상이다. 서구 선진국을 추종하는 모방형 국가에서 자기주도성에 기초한 선도형 국가로의 전환을 추구하고자 한다. 십년 전만 해도 이런 정책을 제기하면 시쳇말로 ‘국뽕’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수긍하고 국민 모두가 기대하는 국가 비전이 되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한류의 위대한 성취에서 얻은 영감과 자신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K-이니셔티브 구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 구상이 나올 수 있었던 영감의 원천인 한류의 성공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로부터 한국과 세계의 관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과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K-컬처의 세계적 유행은 한국 역사에서도 놀라운 일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의의가 있다. 19세기 이래 세계사는 서구적 근대성이 전 세계를 압도했다. 따라서 근대 이후 문화의 전파 양상은 기본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되어 점차 세계인이 수용하는 방향으로의 흐름이 하나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한류의 확산은 이를 거슬러 문화 흐름의 방향을 역전시킨 것이다. 20세기 초 식민지를 경험한 수많은 국가들이 여전히 문화수입국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은 유일하게 문화수출국으로 변모했다. 이는 한국이 이룬 경제적, 정치적 성취보다 더 값지고 특별한 것이다.
한국이 어떻게 경제발전을 이루었는지, 또 어떻게 정치 민주화를 실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이 어떻게 문화강국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의 문화적 성취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관련 연구가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경제나 정치발전 영역은 서구 선진국의 경험과 이론으로 설명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데 비해, 문화적 성취는 이를 적용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한류의 성공 원인에 대해 추론한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국은 어떻게 문화강국이 되었나?
한류의 성공 원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측면에서 가능한데,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콘텐츠의 독특한 매력과 세계적 수용성 측면에서 볼 때 두 가지 이론의 설명력이 강하다. 하나는 문화혼종성(cultural hybridity)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초국가적 근접성(transnational proximity) 이론이다. 혼종문화의 대표적 사례는 K-Pop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미국의 대중음악은 흑인음악이 백인문화와 한차례 혼종성을 일으킨 후 창출된 것인데, 이것이 한국에 상륙한 이후 한국적 정서와 다시 한번 뒤섞이면서 K-Pop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혼종문화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크리스털 앤더슨 저, <케이팝은 흑인음악이다> 눌민, 2022)
또 다른 이론인 초국가적 근접성 이론에 입각한 설명은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개별 지역과 민족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세계인 모두가 공감하고 수용할 만한 주제 의식을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과잉경쟁 사회에서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피로감을 잘 드러낸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한류의 성공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론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다. 콘텐츠 측면에서 볼 때, 한류의 성공 요인은 ‘문화혼종성’을 통해 기존의 서구 주류문화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움을 담아내면서, 또한 글로벌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편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초국가적 근접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두 이론 중 초국가적 근접성 이론의 경우 한국 민족의 특수성보다는 세계적 보편성에 더 주목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류의 성공과 관련하여 한국민족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더 잘 반영하는 개념은 문화혼종성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중간지대 한국의 문화융합 정체성
한국인 및 한국문화의 이런 특성은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민족성으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한반도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중간지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근대 이전 시기에는 주로 북방 유목민족과 중화문명 사이에서,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 사이의 중간지대에 위치했다. 이런 중간지대 성격으로 인해 한반도 국가는 역사적으로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 정체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나는 지정학적 충돌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문화적 융합의 정체성이다. 전자가 안보 문제와 직결된 위기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문화적 역동성을 강조한다. 주변 양쪽의 이질적인 세력이 충돌할 때 한반도는 삼각구도의 위기 구조에 빠져들고,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고도의 긴장감과 균형감각을 요구 받는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유지되는 치열한 생존본능이 독특한 융합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질적인 문화와 세계관이 충돌할 때 내적으로 극심한 갈등과 균열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또한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질적 문화 요소들과 한국적 고유성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혼종문화를 창조하기도 한다. 고 이어령 선생은 문화지리적(geoculture)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전통문화는 북방 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가 뒤섞여서 형성된 것이며, 근대 이후에는 대륙문화(혹은 동양문화)와 해양문화(혹은 서양문화)가 뒤섞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문화 요소들을 수용할 때 양자택일적이기보다는 포용과 융합의 기호체계에서 양단불락(兩端不落)의 가치관과 문화양식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민족은 타문화와의 관계에서 편협한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또한 고유문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는 이웃국가인 중국과 일본의 강한 자문화 중심주의와 대비되는 한국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한류의 성공은 우리 민족성에 깊이 뿌리박힌 문화융합의 정체성이 폭발적으로 활성화하면서 얻은 성취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지금에야 한류가 융성하고 있는가? 한반도가 중간지대 국가로서 갖는 융합문화 정체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말이다. 그것은 최근 약 150년 동안의 한국 근현대사가 우리 역사상 중간지대 국가로서 받는 압박과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는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생존압박에 시달려 온 시기였고, 서로 다른 이념과 문화가 끊임없이 충돌해 온 문화격변의 시대였다. 그 발현이 한편으로는 삼각관계의 함정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위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혼종문화가 탄생하는 문화적 역동성이다. 한류의 성공은 21세기 들어와 후자의 측면, 즉 중간지대 국가의 문화융합 정체성이 폭발적으로 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K'는 창발성의 징표가 돼야
문화 분야에서 먼저 개척한 글로벌 주도권을 여타 분야에서 이어받고, 국가적 차원에서 분야 간 협력을 실현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구상이 K-이니셔티브 정책이다. 그 성공을 위해서는 중간지대 국가 한국의 융합문화 정체성이 갖는 강점을 여타의 분야로 파급·확산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각종 산업 분야를 비롯해서 외교, 관광, 교육, 학술 등 많은 분야에서 전개되는 K-시리즈 열기는 이런 열망의 반영이다.
그런데 접두어 ‘K’를 관성이나 유행에 따라 붙이고 남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개념의 남용은 자칫 그 본래의 가치를 퇴색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접두어 ‘K’는 한류의 성공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각자의 분야에 적용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창발성의 징표’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세계질서는 패권의 공백기에 접어들고 있는데, 이를 설명할 때 ‘궐위의 시대’ 혹은 ‘G0 시대’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언급했다는 “낡은 것은 갔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시대다.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기대는 곧 새로운 문명을 향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궐위의 시대는 문명전환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전환기에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중간지대 국가의 융합정체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도래한 듯하다. 식민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다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한국은 여러 방면에서 중간지대 국가에 해당한다. 동양과 서양, 글로벌사우스와 글로벌노스, 그리고 근대문명사의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위치한 한국의 역량이 ‘K-이니셔티브 구상’으로 수렴되어 인류 공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