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감수성’이 최우선 가치일 수는 없다
어제 정철승 변호사의 성추행 사건 항소심이 있었다. 필자는 시민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이 사건은 대한변협의 감사였던 정 변호사가 동석한 남녀 변호사 2인과 함께 개방된 장소의 주점에서 한 시간 남짓 대화 도중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여성 변호사는 이날이 초면의 만남이었다. 핵심 쟁점은 여성 변호사의 가슴에 묻은 과자를 0.7초 동안 떼어준 것이 성추행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1심은 징역 1년의 실형이었다. 신망받던 인권 변호사에게 성범죄자라는 주홍 글씨로 낙인을 찍어 사회적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젠더감수성’이라는 용어가 이처럼 여성의 도덕적 우월성만을 대변하며 불합리한 편견을 양산하는 무기가 될 줄 정말 몰랐다. 제아무리 위대한 정의라 할지라도 “사실”에 대한 적법한 검증을 외면한 채 여성의 주장만을 근거로 판결한다면 이는 여성의 성은 흉기가 되고, 법은 정적을 제거하는 합법적 폭력의 수단이 되고 만다.
성추행 사건의 경우 ‘여성’의 주장은 주장 그 자체로 ‘진리’가 되는 것이란 말인가? 피고 측의 ‘증거가 분명한 주장’은 ‘진실’이 아닌 조작이더란 말인가? 김학의의 멀쩡한 얼굴은 안 보여서 실체가 불분명하다던 판사들이 동영상 전문 분석가의 “추행으로 보기 어렵다”와 “판독이 불가하다”라는 소견을 무시한 채 무슨 관심법적인 신통력으로 범죄를 일방적으로 단정하는가?
‘원님 재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와 증인, 절차적 정당성이나 실체적 진실 등이 아니다. 오직 사또의 ‘심기’에 달려 있다. 피고인의 무죄 입증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도 사또의 심기를 불편케 한다면 괘씸죄에 걸리고 만다. 심기를 건드리는 ‘괘씸죄’는 무죄를 유죄로 유죄를 무죄로 만드는 마법의 신통력이 있다. 아마도 이 사건의 괘씸죄의 원인은 피고가 조선일보 폐간 운동을 주도하는 변호사라는 점과 검찰과 사법 개혁에 앞장선 사회운동가라는 점, 그리고 박원순 미투 사건의 변호사라는 점이 눈엣가시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나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침해당하는 것도 반대하지만 여성이 성을 무기화하여 폭력의 수단으로 삼는 것도 반대한다. 모든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비호감이라 생각하는 남성 모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규정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친근한 표현마저도 선택적으로 미투에 이용당하는 사회라면, 출퇴근 시 지하철에서 옷깃만 스쳐도 남성들은 모두 범죄자가 될 판이다. ‘젠더 감수성’이 세상의 모든 도덕과 정의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라면, 그런 사회에 사는 남성들은 모두 한쪽 발을 지뢰 위에 얹어두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이 경우 여성의 성은 사회적 흉기이며 인격 살인의 도구일 뿐이다.
오늘 법정에 참석하면서 나는 다산의 ‘애절양(哀絶陽)’이 종일토록 생각났다. 다산이 살던 시대에 어떤 사내가 자신의 양기를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갓난 아이에게까지 군적에 이름을 올려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인 까닭이지만, 오늘날은 ‘가짜 미투’와 ‘함정 미투’ 때문에 양기를 거세해야 할 판이다. 이런 사회라면 젊은 총각들은 과연 자유롭게 연애라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양성의 평등과 보호를 위해 사회적 ‘격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공존’의 해법을 원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의 육체를 ‘무력화’하여 함정 미투의 폭력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나치 페미라고 해야 마땅하다. 진영의 대결 구도가 고착된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유망한 인물을 키워내기란 공든 탑을 쌓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은 단 한 순간이다. 우리의 낙인찍기 문화는 오래된 악습이다.
한국의 보수가 진정한 정통 보수와 무관한 것처럼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정통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국의 보수가 민족과 자유를 지향하는 양심이 마비된 것처럼, 한국의 페미니스트가 인류애를 상실한 남성 혐오집단에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도덕을 상실한 페미주의라면 사회를 이분화하는 폭력적 수단이며 인격 살인의 도구가 될 뿐이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오직 ‘차별성’에 두고 지나치게 차별성에만 의존하다가는 결국은 극단적 ‘배타주의’로 흐르고 만다. 자칫 일반 여성들조차도 걸핏하면 자신들의 육체를 무기화하여 선택적 미투에 집착하는 소모적 투쟁이 만연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모든 여성은 선량한 피해자이고 모든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이다’라고 하는 시각을 고착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1심 판결을 보면서 대한변호사협회의 감사요, 한 정당의 대변인이 이럴진대 일반 대중이 이런 일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자기의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참담하다. 집안의 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대한민국은 곳곳이 지뢰밭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다.
미투 사건으로 우리는 이미 박원순 시장을 잃었다. 나는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혹자는 “죄가 없는데, 왜 죽어”라고 고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란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변명이나 해명을 구차하고 수치스러워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정신적 결벽증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을 키운다는 것은 영웅 만들기가 ‘독 안의 게’ 꼴인 우리 사회에서 공든 탑보다 어려운 일이다. 공든 탑을 부수고자 하는 불순한 세력의 의도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정 변호사가 조선일보 폐간을 위하여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이 시대의 '독립군' 활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같은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는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성역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검찰이 ‘수사’와 ‘기소’로서 정치보복을 하고, 권력의 단맛에 길들어진 사법부가 ‘판결’로써 농단을 부리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 불의한 법비들에게 금강경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만약 현상으로서 나를 찾으려 하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라.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중생(衆生)은 언제나 현상에 집착하는 병을 갖고 있다. 인생의 가장 큰 오류는 ‘상(像)’에 드러난 나를 보고서, 상에 드러나지 않은 나의 근원적 참모습을 보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에 드러난 나를 보고 나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바른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다. 한 사람의 인생의 업적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한 집안에 주홍 글씨가 새겨지는 참담한 현장에서 과연 저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원심 사법부의 원님 재판에 불편한 나의 심사를 대신코자 루신의 피맺힌 절규를 여기에 덧붙인다.
“먹으로 쓴 거짓은 결코 피로 쓴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알립니다] "국민의 법 감정과 동떨어진 성범죄 판결들, 왜?" 등 관련
본지는 지난 5월 4일~6월 26일 간 정철승 변호사의 성추행 판결 관련하여 <국민의범 감정과 동떨어진 성범죄 판결들, 왜?> 등의 제목으로 4차례에 걸쳐 사법부가 편파적으로 판결했다는 취지의 기고문을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1심은 경찰 수사단계에서 확보된 CCTV 영상을 증거로 채택하였고, 피해자거부 의사를 표시한 영상 및 피해 주장 상황 당시의 다양한 증거를 고려하여 정철승 변호사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현재 항소 중인 사건임을 알려 드립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