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후원 퀘이커교 터닦은 조지 폭스·마가렛 펠

부부로 살았지만 동지적 유대로 박해 이겨내

22년 결혼생활 중 대부분은 투옥과 선교여행

조지, 퀘이커리즘의 심장이면 마가렛은 등뼈

감명받아 개종한 함석헌에 노벨평화상 추천

2025-05-24     김성수 시민기자

영국 최초 퀘이커교도 조지 폭스(1624-1691)와 그의 아내 마가렛 펠(1614-1702)은 22년 동안 부부였지만, 실제로 그들이 함께 산 세월은 고작 4년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 18년은 감옥에 갇혀 있거나, 퀘이커운동을 위한 여행과 선교로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한 몸처럼, 서로의 사명을 존중하고 헌신했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과 헌신덕분에 퀘이커교도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퀘이커교도들은 한국과도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6.25 전쟁 직후 의료봉사로 시작해 박정희·전두환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도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이들은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을 만나 그의 인권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영국 퀘이커교의 뼈대를 세운 조지 폭스(왼쪽)와 마가렛 펠 ⓒ BFSC

영성과 법, 감성과 이성의 만남

마가렛 펠은 토마스 펠 판사가 1658년 사망할 때까지 26년 동안 그의 아내로 살면서 법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체득했다. 반면 조지 폭스는 강한 영성을 지녔지만 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17세기 초, 영국 퀘이커들은 법적·제도적으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때 마가렛 펠은 판사의 아내로서 습득한 법적 식견과, 상류층 인맥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국왕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그녀의 법적대응 덕분에 조지 폭스를 포함한 수많은 퀘이커들이 처형을 면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지 폭스가 퀘이커 운동의 영적 창시자라면, 마가렛 펠은 그것을 제도화하고 조직화한 실무의 중심이었다. 그녀는 냉철한 전략가이자 탁월한 행정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퀘이커리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진리의 친우’, 조지 폭스

1624년 조지 폭스는 영국 청교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페니 드레이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643년 생계를 위한 구두수선공 생활을 접고 '진리'를 찾기 위해 홀로 떠났다.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누구나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깊은 확신에 이르렀다. 예배는 굳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으며, 십일조나 성직자의 중개 없이도 누구나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그는 거리에서, 장터에서, 감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그 믿음을 설파했다. 곧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1650년 더비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신 앞에서 떨라(Quake before the Lord)"는 말에서 ‘퀘이커(Quaker)’라는 명칭이 조롱 섞인 말로 등장했다. 하지만 조지 폭스는 그 이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며, ‘진리의 친우’라는 뜻의 ‘종교친우회(Society of Friends)’, 즉 퀘이커교를 결성했다.

퀘이커운동의 시작과 확산

1652년 조지 폭스는 영국 북부지방 펜들 힐에서 '위대한 무리'에 대한 환시를 본 후, 그 부근 세드버그와 스와스무어 홀을 중심으로 퀘이커운동의 뼈대를 세운다. 이 시기 그는 ‘60인의 용맹한 자들(Valiant Sixty)’이라 불리는 초기 퀘이커 설교자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모든 인간 사이의 평등을 믿었고, 군주제 국가나 절대성을 주장하는 교회의 권위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퀘이커들은 맹세를 거부하고, 세속의 상급자인 왕이나 귀족 앞에서도 복종의 표시인 모자를 벗지 않았으며, 교회에 대한 십일조 납부도 거부했다. 당연히 체제에 반하는 급진주의자로 몰렸고, 종종 투옥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심지어 고문 끝에 사형도 당했다.

조지 폭스는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조직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내인 마가렛 펠과 함께 지역, 월간, 연례모임 체계를 도입하며 퀘이커 공동체의 구조를 마련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 조직 형태는 당시 그들 부부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조지 폭스와 마가렛 펠의 결혼식. ⓒ BFSC

마가렛과의 만남, 그리고 나머지 여정

1652년 조지 폭스는 스와스무어 홀에서 펠 판사와 그의 아내 마가렛을 만난다. 마가렛은 곧 폭스의 감화 메시지에 강한 감명을 받고, 당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서 퀘이커로 개종한다. 이후 스와스무어 홀은 퀘이커운동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영국 각지의 퀘이커들과 편지, 사람, 물자를 연결하는 중심지가 된다.

펠 판사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1669년 조지 폭스와 마가렛 펠은 90여 명의 퀘이커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이후에도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계속되는 투옥과 선교여행, 그리고 감시 하에 놓인 마가렛의 처지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편지와 기록, 모임과 헌신을 통해 서로 굳게 지지했다. 조지 폭스는 카리브해, 북미식민지, 유럽대륙까지 다니며 퀘이커 신앙을 퍼뜨렸고, 노예제도에 반대하며 노예해방을 주장했다. 마가렛은 자택에서부터 의회까지, 늘 퀘이커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1664년부터 4년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유산

조지 폭스는 1691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고, 마가렛은 1702년까지 살았다. 그들의 삶은 단지 부부로서의 동행이 아니라, 시대와 체제에 맞선 신념의 연대였다. 오늘날 퀘이커리즘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종교적 이상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의 철저한 자기 헌신과 실천 덕분이었다.

조지 폭스는 퀘이커리즘의 심장이었고, 마가렛 펠은 그 등뼈였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단지 개인적 연대가 아니라, 정의와 평등, 평화와 자유라는 가치를 위한 고통스런 연대였다. 오늘날까지 퀘이커들은 “조지 폭스는 진리를 찾았고, 마가렛 펠은 그것을 조직했다”고 말한다.

 

3일 오후 개관한 서울 도봉구 함석헌 기념관. 함 선생이 타계 전 7년간 살았던 곳으로 책과 저서, 생활용품 등 유품 400여점과 생전 육성이 담긴 강의 테이프, 동영상이 전시돼 있다. 2015.9.3. 연합뉴스

한국에 남긴 유산

퀘이커는 한국에 6.25전쟁 직후 미국과 영국 퀘이커 의료봉사자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전후 폐허가 된 한국에 병원을 짓고 과부, 고아 등 전쟁으로 난민인 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돌봐주었다. 이때 이들을 직접 만난 한국 사상가이자 인권운동가 함석헌(1901-1989)는 이들의 인도주의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아 자신도 나중에 퀘이커가 된다. 영미 퀘이커들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때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적극지지 후원했다. 미국 퀘이커들은 1979년과 1985년 각각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와 마가렛 펠이 뿌린 신념과 사랑의 씨앗이 20세기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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