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네켄 노예 노동으로 시작한 120년 멕시코 이민사
5월 4일은 멕시코 연방의회 지정 ‘한인 이민자의 날’
1905년 영국 선적 일포드 호 타고 인천 떠난 1033명
멕시코 에네켄 농장서 채찍 맞으며 지옥의 노예 노동
288명은 계약기간 끝나고 1921년 쿠바로 건너가
끼니마다 쌀 한 숟가락씩 모아 중경 임시정부 송금
“에네켄을 자르기 위해 왼손으로 줄기를 잡았다. 아얏. 날카로운 가시가 그의 손에 박혀 있었다.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져 마른땅을 적셨다. (중략) 오후 네 시까지 그들이 자른 에네켄 잎은 불과 500장밖에 되지 않았다. 감독들이 채찍을 들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찰레스(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찰레스,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땀이 흥건한 등짝으로 채찍이 날아들었다. 채찍 문화가 전혀 없던 조선인들에게 그것은 굴욕이기 이전에 놀라움이었다.”
2003년 발표된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의 한 대목이다. 구한말 이민선을 타고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유카탄반도 에네켄 농장에서 처음 일하던 광경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노예 취급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편하게 일하며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넘쳤다.
하와이에서 성실성 인정받은 조선인 주목한 사기 브로커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온역(溫疫) 등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한국과 묵서가국은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나 최혜국으로 대우하여 마음대로 왕래하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황성신문에는 1904년 12월 17일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이런 문구의 광고가 7차례 실렸다. 대한일보에도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 부녀자에게는 닭을 치게 하고 하루 노동 시간은 9시간이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광고가 게재됐다.
당시 멕시코에는 용설란의 일종인 에네켄을 재배하는 농장이 많았다. 에네켄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는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 데 주로 쓰였다. 에네켄은 필리핀 마닐라삼과 더불어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화물 운송량이 급증하면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원주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전근대적 고용 관계가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기온이 높고 건조한 데다 줄기 채취 작업의 노동강도가 높아 농장주들은 인력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1897년 일본에 이어 1899년부터 중국 인력이 들어왔으나 악조건을 견디지 못해 중단됐다.
농장주들의 의뢰를 받은 영국인 국제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는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은 한국인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는 일본의 대륙식민회사 이름으로 신문에 허위 광고를 내고 인력을 모집했다. 하와이 이민과 달리 정부 인가를 받지 않은 불법 이민이었으나 당국의 묵인 속에 여행허가증까지 받아냈다.
농장 24곳으로 흩어진 농민, 퇴역 군인, 몰락 양반, 무당, 부랑아…
1905년 4월 4일, 화물선을 여객용으로 급조한 영국 선적의 일포드호가 한국인 1033명을 태우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났다. 성인 남녀가 각각 702명과 135명이고 어린이가 196명이었다.
마이어스는 독신 남자들만 송출해 사회 문제를 빚었던 하와이의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도 신청을 받았다. 독신인 성인 남자는 200명가량이었고 독신 성인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출신으로 보면 노동자와 농민이 가장 많았고 퇴역 군인이 200여 명이었다. 몰락한 양반, 기독교인, 내시, 무당, 부랑자 등도 있었다.
일포드호는 5월 8일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닻을 내렸으나 나흘 뒤에야 하선을 허락받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이질 환자가 발생해 어린이 2명과 성인 남자 1명이 숨지고 한 명이 태어나 멕시코 땅을 밟은 인원은 1031명이었다.
항구 인근 들판에서 하루를 머문 뒤 144명의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5월 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반도의 중심도시 메리다에 도착해 농장 24곳에 배치됐다.
신문에 실린 광고 문구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한낮에는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 속에서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가시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내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고,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감옥에 갇혔다. 집세도 따로 내야 하는 데다 임금은 멕시코까지 오는 비용을 갚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호소하지도 못하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참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동포 박영순이 메리다를 방문했다가 목격한 후 국내에도 전해졌다. 그는 안창호가 조직한 애국계몽단체 공립협회 회원이었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 사설에서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대한매일신보도 그해 12월 20일 “의식과 거처는 짐승과 마찬가지고, 혹 신체가 곤핍하여 잠시 쉬는 듯하면 즉시 맹렬히 때리고 어두운 데 가둔다고 하였다”고 폭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구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말뿐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그럴 의지도 힘도 없었다. 1905년 11월부터는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다.
1909년 5월, 지긋지긋하던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다. 그러나 조국은 사실상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데다 돌아갈 여비도 없어 대부분 재계약하고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288명은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민 1세대는 한 명도 없었다.
마이어스의 사기극이 한 차례로 끝나 추가 피해가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기왕의 멕시코 이민자들에게는 그런 불행이 따로 없었다. 1902~1905년 64차례에 걸쳐 이주가 지속되고 신붓감 여성들까지 유입돼 한인 사회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하와이와는 사정이 달랐다. 오랫동안 모국과 단절되는 바람에 정체성을 빨리 잃어버렸고, 불균형한 남녀 성비 탓에 현지인과 결혼을 많이 하다 보니 2세와 3세로 내려가며 대부분 현지화되고 말았다.
대한인국민회 지부 결성, 학교 설립, 눈물겨운 독립자금 모금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이 이끈 미주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메리다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세우기도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이들이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1873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김익주는 초촐라 농장에서 일하다가 계약 기간이 끝나자 탐피코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를 결성해 3·1운동 기념식, 순국선열 추모식 등의 행사를 주도하는가 하면 상해임시정부 등에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보냈다. 1930년 흥사단 계열의 한인자성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55년 눈을 감았고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임천택은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살 때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행 배를 탔다. 1921년 쿠바 마탄사스로 이주해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서기, 총무, 회장 고문을 역임했다. 1922년과 1923년에는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에 각각 민성국어학교와 진성국어학교를 세웠다. 3개 지역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재쿠바한족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쿠바 한인들이 성금을 모으는 방식은 천도교식이었다. 끼니 때마다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가락을 덜어내 성미(誠米)를 마련한 뒤 돈으로 바꿔 중경 임시정부에 보냈다. 임천택은 1941년 4월 3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쿠바 이민사’를 11회 연재해 1954년 책으로 펴냈다. 1985년 별세했으며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뒤늦게 받았다. 2004년 유해가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함께 쿠바에서 활동한 박창운과 서병학에게도 각각 2011년과 2021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한인으로는 쿠바 최고위직 오른 체 게바라의 동지 임은조
1926년 태어난 임천택의 장남 임은조(헤로니모 임)는 아바나 법대에 입학해 한인으로는 처음 대학생이 됐다. 부패한 관리들이 수해 구호물자를 빼돌리는 것을 보고 동료 학생들을 규합해 항의 집회를 열었다가 구속됐다. 출감 후 아바나대 법학과로 편입해 동갑내기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둘은 시국 토론에도 참여하고 시위를 벌이며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1949년 좌익정당 오르토독소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멕시코로 망명했던 카스트는 1956년 11월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해 게릴라전을 벌인 끝에 1959년 1월 1일 친미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혁명 뒤 임은조는 혁명정부 경찰청에서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내다가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겨 산업부 장관이던 체 게바라와 함께 4년간 일했다.
1988년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정부 관료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바나 근교 키테라스 시장에 선출된 데 이어 차관급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으로 뽑혀 한인으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1995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한인 이주 기념비를 세우고 한글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인 후손 정체성 회복에 매달리다가 200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대기는 2019년 재미동포 전후석 감독에 의해 영화 ‘헤로니모’로 꾸며져 한국, 쿠바,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상영됐다.
멕시코에서도 한인 후손 가운데 연방 상원의원(노라 유)과 주(州)대법원장(리스베스 로이 송) 등의 고위직을 배출했다. 최근에는 이민 1.5세 이종훈이 멕시코 전통주 데킬라 제조회사 카사피나를 차려 화제를 모으고 있다. 데킬라는 에네켄과 비슷한 아가베의 즙을 증류해 만든다.
멕시코 연방의회 ‘한인 이민자의 날’ 제정
현재 일포드호 승선자 후손은 멕시코에 3만여 명, 쿠바에 1천여 명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후손회가 결성돼 있으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가정에서 양배추 김치와 된장, 고추장을 담가 먹으며 희미하게나마 한민족의 전통을 잇고 있다.
2019년 3월 30일 초기 정착지였던 메리다시의회는 한인 노동자들을 태운 일포드호가 멕시코 영해로 들어온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캄페체주에 이어 멕시코 연방의회도 2년 뒤 외국 관련 기념일로는 유일하게 이날을 ‘한인 이민자의 날’로 제정했다.
이에 앞서 2007년 인천시는 메리다시와 자매결연해 친교를 다져오고 있다. 메리다시에는 ‘대한민국로’와 ‘제물포거리’가 있으며 한인협회가 쓰던 건물을 한인이민사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쿠바 아바나에도 2014년 한인 후손 문화회관(호세 마르티 한국·쿠바 문화클럽)이 들어섰다.
멕시코와 쿠바에서는 한국과의 경제 교류가 늘어나고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한인 후손들도 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려는 열기가 높을 뿐 아니라 임천택의 증손녀 아자리아 임이 2013년 쿠바 유학생 1호로 대전 한남대를 다닌 것을 비롯해 많은 한인 후손이 모국을 찾고 있다.
올해 멕시코 이민 120주년을 맞아 한국과 멕시코에서는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은 지난 3월 멕시코 한인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전수식을 열었다. 4월 22일에는 멕시코 한국교육원이 문을 열었다.
멕시코·쿠바 등 미주 이민자 후손 42명은 지난 3월 26일부터 11박 12일 일정으로 방한해 천안 독립기념관, 화성 제암리교회,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을 답사했다. 재외동포협력센터는 임천택의 셋째딸 마르타 임 김과 메리다시의 초대 한인이민사박물관장 헤니 장 송 등의 구술 채록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 영상 일부를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