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 피하려다…국내 산업 기반 무너질라
딜로이트 “트럼프 관세 한국 제조업 경쟁력 위협”
현대차-포스코, 미국 전기로 제철소 건설 의기투합
삼성·LG·SK 등도 관세 폭탄 대응 대미 투자 확대
과도한 대미 투자는 국내 제조 기반, 공급망 흔들어
양질의 일자리 감소와 무역수지 악화도 불 보듯
트럼프 발 관세전쟁이 우리나라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도 높은데다 미국이 주요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그 징후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 기업들이 관세 장벽을 피하려고 미국 현지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내내 이런 추세는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국내 투자는 쪼그라들고 수출도 감소할 게 뻔하다. 한국 제조업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관세전쟁, 한국 산업 전반에 구조적 충격
세계경제연구원은 22일 ‘트럼프 2기 관세정책 평가 : 한국 주요 산업 영향과 대응 전략’을 주제로 웨비나(웹 세미나)를 개최했다. 여기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글로벌 컨설팅 그룹인 딜로이트의 아이라 케일리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날 발표자로 나와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가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위협하고 한국 산업 전반에 구조적 충격을 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앞으로도 관세를 갑자기 부과하고 번복하는 등 예측이 불가능한데다 각국이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계속할 것”이라며 “이는 세계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현지 자동차 공장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친환경 제철소를 짓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2028년까지 투자하기로 한 금액은 210억 달러에 달한다. 한화로 3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미국 조지아주 신공장인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준공했다. 현재 생산능력은 연간 30만 대인데 추가 투자를 통해 50만대로 늘리기로 했다. 현대차 앨라배마주 공장과 기아 조지아주 공장에서 생산되는 자동차를 모두 합하면 미국 현지에서만 120만 대를 생산하게 된다. 반면 국내 생산량은 정체되거나 줄어들 게 분명하다.
철강 산업 위기에 ‘앙숙’ 포스코-현대제철 손잡아
현대차그룹 철강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루이지애나주에 58억 달러(약 8조5000억 원)를 투입해 신규 전기로 제철소를 짓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수입 철강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을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투자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포스코도 합류했다. 현대차그룹과 포스코는 철강과 이차전지 분야에서 상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21일 체결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현대제철이 짓는 루이지애나주 전기로 제철소에 지분 투자하기로 했다.
국내 철강업계 1, 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대미 투자 협력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현대차그룹이 철강 산업에 진출하기 전만 해도 현대차와 기아의 자동차 강판 등은 주로 포스코가 공급했다. 현대차그룹은 포스코의 주요 고객사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현대제철이 출범하며 포스코는 타격을 입었다. 포스코는 현대차그룹의 철강 산업 진출을 막기 위해 여론전을 펼치기도 했다. 두 기업은 국내 철강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회사가 협력하기로 한 이유는 트럼프 발 관세전쟁에 따른 위기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 철강 산업은 벼랑에 몰려있다. 국내 건설 경기 부진으로 수요가 급감한 데다 중국산 제품이 밀려 들어오며 가격도 하락 추세다. 철강은 탄소가 배출이 많은 업종이라 환경 규제도 심하다.
실적 전망도 어둡다. 연합인포맥스가 증권사들의 최근 1개월간 시장 기대치를 종합한 결과 포스코 1분기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다소 늘겠지만 매출은 14조 3000억 원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현대제철 역시 작년 1분기에는 영업이익 558억 원 흑자를 기록했으나 올해 1분기는 300억 원대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매출도 5조 5000억 원으로 7~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핵심 생산시설 국내 이탈 어떻게든 막아야
자동차와 배터리 등 다른 업종도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철강과 비슷한 어려움과 딜레마에 빠져 있다. 국내 제조보다 미국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있는 현지 공장의 생산을 늘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과 LG, SK 등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트럼프 관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 대미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내 제조업 공동화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기업들의 각자도생은 국내 제조업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대미 투자가 발표된 직후인 지난달 26일 분석 기사를 통해 한국 산업의 공동화 위험을 경고했다. 미국의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대미 투자는 국내 산업 전체로 보면 양날의 칼이다. 미국 시장을 사수하려면 대미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지만 이에 따른 국내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는 의미다.
제조업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버팀목이었다. 한국이 수출 강국이 된 것은 제조업에 강했던 덕이 크다. 이런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무역수지가 악화하고 양질의 일자리도 감소할 것이다. 부품과 소재, 장비 등 공급망 전체가 흔들린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최첨단 기술을 적용하는 핵심 공장과 연구개발(R&D)과 연계되는 생산시설은 반드시 국내에 두도록 하는 유인 정책이 필요하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이를 위해 기업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