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한민국이 돼야 하는가-윤석열 파면에 부쳐

확장된 민주주의의 미래로 나아가야

배제와 차별 아닌 경청과 통합의 언어 필요

2025-04-05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4일 저녁 서울 시청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파면 축하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민주정부 건설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2025. 4. 4 사진 이 호 작가 

4월 1일의 단상

2025년 4월 1일 오전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기일이 4월 4일 오전 11시로 통지되었다. 이 소식은 SNS를 타고 쏜살처럼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이 결정이 이후 대한민국 수십 년의 미래를 크게 가를 것임을 국민 대부분이 직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용이냐 기각이냐. 어떤 쪽이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흑과 백처럼 너무나 다를 것이다. 어떤 대한민국인가.

돌아보면 12.3 비상계엄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뒤이은 내란 선동과 폭력과 증오의 광기 역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 사회 어디에 이렇듯 어둡고 맹목적이며 폭력적인 힘이 또아리 틀고 있었던 것일까. 그 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떤 선고가 나오든 희비가 격렬하게 교차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한없는 늑장에 짜증도 났지만 한편 동정도 간다. 부담이 과중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헌재 재판관들의 심리적 압박 문제를 훨씬 넘어선 대한민국의 미래 몇십 년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과연 어떤 결정일까. 차분해지고 싶다. 이럴 때의 명상법은 시뮬레이션이다.

먼저 헌재가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본다. 지난 3월 27~28일의 갤럽 여론조사는 탄핵 찬성 60% 탄핵 반대 35%였다. 12.3 직후의 탄핵 찬성 70%, 반대 30%에 다시 근접하고 있다. 지금껏 탄핵 반대 여론은 다수는커녕 그 가까이 간 적도 없다. 헌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기각 결정을 내린다면, 소위 ‘소수의 독재’에 공공연히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소수의 독재(tyranny of minority)’는 최근 하버드대의 정치학자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쓴 책 제목이다(한글 번역,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서 특히 많이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 책은 주로 미국 이야기인데, 한국과 아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소수의 독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번 탄핵 심판 과정에서 흑을 백으로, 때린 놈이 맞은 놈으로, 내란수괴가 내란 피해자로 180도 뒤집혀지는 놀라운 ‘법 기술’ ‘정치 기술’을 질리도록 감상했다. 그 대단한 기술자들은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법조 엘리트, 언론 엘리트, 행정 엘리트, 정치 엘리트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소수의 독재’란 이렇듯 철면피하고 비열한 기술이 항상 완승을 거두는, 극도로 타락한(corrupt) 정치체제를 말한다. 궤변이 그렇게까지 황당할 수 있을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공부 제일 잘 한다는 학생들에게 한국 교육이 가르쳤던 것이 고작 이 수준이었던가.

그리하여 국민과 국회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윤석열이 다시 대통령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 대한 분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어느 만큼일까. 예측하고 계량하기 어렵다. 힘과 돈과 이익에 종속되지 않는, 계산을 넘어선 어떤 근원에서 솟아나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렵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고통스럽고 깊은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이 나라 온 산의 소나무 등걸, 풀뿌리와 같은 힘이다. 어느 보수 인사가 이야기했다지만, 그 분노의 힘은 전광훈 손현보 극우 집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87년 6월과 같은 전국 항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보다 더 크고 두텁고 깊을 것이다. 당시엔 학생들이 이끌었지만, 이젠 원숙한 세대가 분노한다. 그 힘은 가늠하기 어렵다.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서울 중심이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번 항쟁은 더욱 전국적이고 격렬할 것이다.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들어 올렸던 지난 모든 촛불들이 모두 싱크로 하여 짐작하기 어려운 무엇이 솟아오를 것이다.

여기에 윤석열은 어떻게 대응할까? 12.3 계엄만 아니라 임기 전체의 행태를 통해 우리는 윤석열이 전두환보다 더욱 무모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으로 복귀한 그는 어떤 반발이 있더라도 결코 스스로 하야하지 않을 것이다. 87년 6월 전두환처럼 한발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반드시 제2의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이다. 헌재 결정을 거부하는 ‘반국가세력’ ‘반헌법세력’의 내란 사태 때문에 제2의 비상계엄 선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1차 계엄령의 허술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치밀한 작전을 펼칠 것이다. 국회 봉쇄, 정적 체포와 제거를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려고 할 것이다. 불복종을 선언하는 군경이 속출할 것이다. 극우세력이 민간 백골단을 자처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이 격렬한 유혈의 내전 상태로 빠져든다. ‘보수원로’ 조갑제 씨가 우려했다는, ‘시리아(Syria) 10년 내전’에 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주 심각한 파국이 될 것임은 정확히 짚었다. 조옹의 ‘10년 내전’론은 아마 의도적 과장일 것이다. 시리아와 한국은 내외의 상황이 퍽 다르다. 길어도 한두달 안에 판이 갈릴 것이다. 피가 더 많이 흐른 4.19가 될 것이다.

인용 결정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순리(順理)인 만큼 예상이 쉽다. 며칠 일부의 반발이 있겠지만 축하와 안도의 국민적 무드에 묻히고 만다. 박근혜 탄핵 인용 이후 친박 세력의 반발보다 크고 길겠지만 결정 수용의 큰 흐름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재빠르게 대선 국면으로 이동하려 할 것이다. 그토록 요란했던 탄핵 반대 내란 선동 에너지의 8할은 결국 국민의힘을 따라 대선용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 8할이 원래가 그런 성격의 여론이었다. 힘과 돈과 이익에 종속된, 당구공처럼 치는 대로 움직이는, 피동적 숫자, 양(量), 동원 대상일 뿐이다. 일부 골수 냉전 극우행동대의 저항은 조금 더 길게 이어지겠지만 폭력 행동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킬 뿐이다. 대선 일정이 확정되고 정치 일정이 대선에 맞춰짐에 따라 이들 세력의 힘은 현저히 약화된다. 그 역시 대선의 흐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다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남은 과제가 오히려 크다.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문제 풀이의 시작이다. 먼저 지난 몇 달 격렬한 내란 소동이 만들어낸 파시즘적 야만을 반드시 정화시켜야 한다. 엉망이 된 나라를 반드시 다시 나라답게 만들어야 한다. 큰 숙제다. 더하여 그 파시즘적 야만의 뿌리와 성격을 밝혀보아야 한다. 그래야 대선 국면, 그 이후의 정국 전개, 그리고 최소한 10년을 잘 볼 수 있다. 이 나라가 다시 높게 오를 수 있다.

2. 어떤 대한민국인가

4월 4일 11시 22분. 헌재에서 윤석열 파면 선고가 났다. 순리다. 안도한다. 이로써 대한민국을 이끌 주도권이 과거의 힘에서 미래의 힘으로 넘어갔다는 느낌이다. 큰 판이 갈렸다.

지금껏 박정희(공화당), 전두환(민정당)에서부터 그를 이은 한나라당 그리고 현재 국민의힘까지 온 세력의 존재 근거, 집권 근거는 경제와 안보는 그래도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쪽을 ‘보수’고 ‘주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서는 경제도 안보도 도저히 이쪽에 맡길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누가 봐도 명백했다. 중도층의 중심이 크게 이동했다. 주류라고 하면 국민 전체를 이끌고 통합할 수 있는 넓은 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박정희에서부터 박근혜까지 보수세력이라 했을 때 나름대로 국민통합의 메시지와 레퍼토리가 있었다. 윤석열 정권은 그게 없었다. 시종일관 통합이 아닌 독선과 배제로 일관했다.

그 배제의 끝판이 12.3 비상계엄이었다. 원내 근 2/3를 차지하는 야당과 그 지지세력을 싸잡아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요 ‘자유민주주의 체제전복 세력’, ‘종북 반국가세력’이라고 막말로 치고 나왔다(비상계엄 선포문). 야당만 우습게 본 게 아니었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세워준 여당도 평소 아주 우습게 보았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억지스럽게 당대표를 번번히 갈아치우고 당을 개인 입맛대로 군기 잡고 줄 세우려 했다. 검찰에서 그렇게 배웠나? 계엄군의 엉뚱했던 선관위 출동은 그가 선거까지도 제 맘대로 하고 싶어 했음을 보여줬다.

결국 그에게는 정당도 선거도 우스웠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정말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윤석열이었다. 과거 군사통치 시대의 군부 엘리트들의 멘탈이 그랬던 것처럼, 검찰 엘리트 윤석열도 그 멘탈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12.3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스모킹 건’이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스톱시키고 싶었다. 이 게임으로는 안 된다,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난 일종의 항복선언으로 읽었다.

그러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그가 12.3으로 현실화시키려 했던 비상계엄 체제, 군사통치 체제, 언론통제 체제는 그가 또한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언어 자체부터가 이상했지만)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이미지와 아주 꼭 닮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정말 ‘종북(從北)’을 했던 것일까? 임기 초부터 그의 언어가 늘 흥미로웠던 것은, 정적을 매장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그 극렬했던 저주와 낙인찍기 언어들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대부분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려 했던 자기 자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불행했던 것은 윤석열의 특이한 인식 지체 현상이다. 정적을 반체제세력, 빨갱이, 친북, 좌파로 낙인찍어 매장시키는 수법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악취 나는 구시대 수법일 뿐이다. 그때는 냉전의 극성기였다. 그래서 심한 독재를 하더라도 안보와 경제만 잘 지켜준다면, 이를 눈감아주겠다는 국민층이 상당히 존재했다. 독재가 예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북한 독재나 남한 독재나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은 당시 누구나 다 했다. 북한 독재에 안 먹히려면 남한도 독재할 수 있다, 아니 더 심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독버섯처럼 자라던 어두운 시절이다. 그런 부끄러운 시절의 옛날 수법을 2020년대에 들어와서도 꼭 같이 또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놀랍다.

게다가 안보와 경제까지 아주 엉망으로 말아먹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넓고 활발한 시장들을 섯부른 신냉전론의 하인 노릇이나 해보겠다고 닫아버리는 경제란 애초에 경제 논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세계시장에서 스스로 손발을 묶는 우둔함이었을 뿐이다. 안보는 비상계엄의 꺼리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반복했다.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정략과 음모의 수단으로 써먹으려 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했다. 금도를 넘어도 너무나 심하게 넘었다. 그런 반복적인 도발에 넘어가 주지 않은 김정은이 고마울 정도다.

윤석열의 인식세계는 2020년대의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나가기에는 너무나 뒤처진 것이었다. 한국은 북이 독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독재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준을 이미 한참 넘어서 있는 선진 국가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한국민은 최대로 잡아 30%다. 12.3 직후의 계엄 찬성 여론 비율이다. 그 주력은 박정희 세대 노령층이다. 이후 윤석열의 농성전과 극우 유튜브, 전광훈 등의 내란선동으로 윤에 대한 탄핵 반대 여론은 한때 35%~40%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증가는 차기 대선을 생각하는 보수 결집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이 증가 추세는 일시 요란해 보였지만 지속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여러 선거에서 보면 극우의 집표력은 최대 5%를 넘지 못한다. 거기에 올인한 국민의힘이 참 한심하다. 대책이 없는 곳이 되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넘어서려고 하고, 그럴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 비상계엄 극복도 그 증거로 기록되고 있다. 이번 극우 세력의 내란 선동에서 우려되었던 것은 청년 남성층 일부의 파시즘 폭력 동조 현상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세대 극우 기독교 목사들과 극우 유튜버들이 무책임한 내란 선동의 불길로 이들을 부추겼다. 아직 살아있던 권력인 윤석열은 기름을 퍼부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라를 찢어 놓았지만, 그렇듯 찢긴 나라를 다시 하나로 통합할 힘 역시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힘에서 나올 것이다.

한국의 파시즘은 미국 극우 ‘프로보커터’로부터도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 극우 인터넷 갤러리와 유튜버들이 주 수입 통로다. 이 역시 한국의 청년 남성층을 오염시키고 있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거나 해외 거주 중인,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한국에 체류 중인,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경로로 해외 극우 주장에 이끌려 들어간 젊은층들 역시 수입과 확산에 매개체가 된다. 미국 극우 프로보커터들의 반동사상은 ‘어둠의 계몽주의(Dark Enlighenment)’와 ‘신반동주의(Neo-reactionism)’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은 반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강자의 자유’로 왜곡 흡수하고, ‘강자의 자유’를 비판하는 민주주의는 그 전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내치고 밟는다. 민주주의란 비루하고 천한 무능력자 기생충들의 정치체제라 극렬하게 비난한다. 새 세상은 대자본가들이 정부를 인수 매입하여 CEO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신진 CEO에 대한 선망을 신독재 사상으로 옮겨 심으려는 시도다.

이 세력은 트럼프 포퓨리즘과 결합하여 현재의 트럼프 정부 내에 상당한 발판을 구축했다. 이들의 주장은 ‘강자의 자유’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윤석열과 맥이 같다. 다만 윤석열은 속과 겉이 다르게 민주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읊조린 반면, 미국 극우는 안팎이 분명한 반민주주의와 자본독재의 깃발을 올렸다. 윤석열은 째째하게 검사독재 따위를 하려 했지만, 미국 극우는 훨씬 통 크게 명실상부한 자본독재를 주창한다. 신반동주의란 신 자본독재 사상이다.

이번 탄핵 반대와 내란 선동 소동 속에서 그들 언어의 폭력성과 주장의 허위성이 두드러졌다. 익명 속에 숨은 인터넷 언어, 지독한 독설과 욕설, 조롱과 저주, 황당한 논리 비약, 터무니없는 단언. 소위 ‘프로보커터’ 언어의 특징이다. 증오, 배제, 폭력, 거짓 선동과 가짜뉴스의 결합이 현실정치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대응은 세계 전체가 고민 중인 사항이다.

그중 눈에 띄는 해법이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상당히 경험해 본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공론화위원회’라고 했고, 세계에서는 ‘시민의회’라고 한다. 잘 준비된 시민의회에서는 전광훈 식의 거짓 선동과 가짜뉴스가 통할 수 없다. 익명 속에 숨을 수 없다. 입보다 귀가 더 중요해진다. 다른 참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한다. 자신의 발언 역시 다른 참여자가 어떻게 들을지 생각하며 말하게 된다. 막말, 증오, 배제, 차별, 왕따,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이미 이러한 선진적인 시도가 아주 많았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대응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힘들이 두텁게 쌓여, 오늘 윤석열 파면 결정도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길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 길은 민주주의를 지우고 어두운 독재의 과거로 가자고 한다. 배제와 차별과 증오의 언어를 구사한다. 다른 길은 확장된 민주주의의 미래로 가자고 한다. 경청과 대화와 통합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제 대한민국이 어떤 길로 나가야 할까. 너무나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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