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에의 풍자가 던지는 법과 권력의 결탁

법과 정의의 허상…윤석열 석방은 사법의 만행

사법부 타락으로 법이 권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

시민의 힘으로 엘리트 카르텔·권력 독점 끊어야

2025-03-17     황융하 시민기자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권력과 법이 결탁하여 정의를 왜곡하는 과정은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박근혜의 사면은 정치적 타협 속에서 법치의 원칙이 희석된 사례다. 권력의 연속성을 보장하려는 조치였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사법적 판단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윤석열의 석방은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너무도 파렴치하다. 이는 정치적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부의 직접적인 만행이다. 판사 한 명이 법적 전례를 깨고 권력을 위해 법을 유린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고, 검찰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특정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 의도적으로 왜곡되는 이 장면은 우리가 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신적 존재처럼 여기며 모든 판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심리는 때때로 비상식적으로 표출된다. 평범한 시민으로서는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운 현상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풍자 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그림을 보는 순간, 이 기묘한 권력의 허상을 마주하게 된다. 오노레 도미에가 19세기 사법 체계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작품들은 현재의 우리를 곱씹게 만든다. 그의 법정 풍자화들은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걸 경고했다.

 

오노레 도미에 '대화를 나누는 두 변호사' (1840~45년경, 석판화, 27 x 20.9cm)

사법부, 정의의 탈을 쓴 권력의 도구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 <두 명의 변호사>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제법 노골적이다. 도저히 친근하게 바라볼 수 없다. 법률 전문가의 모습이 진정 이런 정도일지 의심마저 든다. 도미에는 이런 그림으로, 그들이 어떻게 권력의 필요에 따라 법을 조작하고 변형하는지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두 인물의 표정은 위엄을 가장하면서도 탐욕과 오만이 서려 있다. 그림의 제목은 변호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판사의 권위까지 빌려 법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조작하며 카르텔을 강화하는 모습이 담겼다. 법을 다루는 자들이 정의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집행자임을 증명한다. 법은 더 이상 공정한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기득권을 보호하는 방패일 뿐이다.

19세기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면서 법과 정의의 개념이 정권에 따라 흔들리는 시대였다. 사법부는 왕권과 유착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변질되었고, 변호사와 판사들은 법을 다루는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필요에 따라 법을 왜곡하는 조력자였다. 도미에는 이러한 현실을 폭로하는 법정 풍자화를 다수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사법 체제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법과 권력의 결탁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반복됐으며, 최근 벌어진 윤석열 석방 사태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법원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구금 기간을 ‘시간’ 단위로 쪼개 해석했고, 검찰은 이에 항고조차 하지 않았다. 법이 특정 권력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순간이었다. 특정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 의도적으로 왜곡되는 이 장면을 마주하며, 우리는 과연 법치주의가 유효한 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더군다나 법과 권력의 결탁이 가져온 폐해는 사법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입법· 사법·행정부는 각기 독립된 기관이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결탁과 공모를 지속했다. 국회는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입법을 남발하고, 행정부는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이익에 따라 법을 유린한다. 사법부 또한 본래의 기능을 잃고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 이러한 세 기관의 유착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국민을 위한 정책과 법이 아니라 특정 계층과 권력자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5차 범시민 대행진에 참가했던 시민들이 안국역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2025.3.15. 연합뉴스

엘리트주의와 법치의 왜곡, 해결책은 시민의 힘

국가고시를 패스한 이들이 법조계와 행정부를 장악하며 만들어낸 카르텔은 몇몇 인물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계급 의식을 형성하며 법과 권력을 사유화했고, 견제 없는 독점적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해 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명목상 구호에 불과하며, 그들만의 논리와 이해관계 속에서 법치는 왜곡됐다. 권한대행은 국회와 헌재 결정을 거부하는 불법적 행태를 마다하지 않고, 그들의 오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에게 법은 국민을 보호하는 규범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윤석열 석방 과정에서 드러난 법원의 태도는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 과정에서 보였던 사법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법이 특정한 세력을 위해 변형되고 조정되는 과정은 역사를 통해 반복되며, 이는 법치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 도미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19세기 프랑스 법조계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과거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 1세의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다시 나폴레옹 3세가 등장하면서 법과 정의는 권력의 필요에 따라 조정됐다. 사법부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는 현대 한국에서도 반복되는 양상이다. 법과 제도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권력의 이익을 위해 작동할 때, 민주주의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껏 우리의 삶이 도탄에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과 제도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생존 전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5일 광화문에서 진행된 범시민 대행진. 사진=황융하 시민기자

결국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감시와 참여가 관건이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횡포가 버젓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우리는 의지와 다르게 그것을 지켜보거나 묵인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맛보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 것인지?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는 걸 재차 피부로 깨닫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간 공고했던 권력의 카르텔을 혁파하고, 또한 정치적 기만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국민의힘’의 해산과 극우 보수의 절멸이라는 과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탄핵 인용이 임박한 시점에서 시민들의 외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 순간의 결정과 변화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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