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한겨레'를 되찾길
중견간부의 수상쩍은 거액 거래라는 충격적인 사고에 대해 한겨레가 수습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당 기자의 해고는 물론 대표와 편집국장의 사퇴,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조사위원회 구성까지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한겨레의 대응은 사과와 수습 노력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할 만하다. 특히 자사 기자들이 비슷한 의혹을 받는 것에 대해 별 움직임이 없는 다른 언론사와의 대비에서, 사과와 반성을 찾기 힘든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그래도 한겨레니까’, 라는 응원을 보냄 직하다.
지난해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 ‘과이불개(過而不改)’가 얘기하듯,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려 하지 않는 지금의 세태에서 한겨레는 최소한 반성하고 시정하려는 모습으로써 한겨레다움의 최소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성은 무엇보다 그 같은 반성하려는 의지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런 의지부터가 실종돼버린 현실에서 더욱 그 출발점으로서의 반성 의지는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반성하려는 의지는 잘못을 고치는 출발에 불과하다. 반성은 반성하는 능력, 반성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는 역량을 필요로 한다. 지금의 사태는 한겨레에 제대로 된 반성 능력, 반성 역량이 있느냐,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느냐의 시험대다.
한겨레가 이번 사안을 단지 하나의 사건, 사고로 본다면 그것은 사고의 수습과 처리는 되겠지만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면, 즉 '석OO 기자 사건‘이 아닌 '한겨레 사태’라는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법조기자단의 문제다. 기자단, 기자실의 문제, 특히 출입처와 유착되는 것을 넘어 거의 일체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곳인 법조 기자단의 문제가 드러났다. 특히 그 기자단의 기득권 폐쇄성을 깨야 할 한겨레마저 그 일원이 됐다는 것에서 법조기자단의 문제와 함께 한겨레의 한계를 표출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문제의 본질은 이번 법조기자단 이력의 간부의 일탈과 같은 한겨레의 실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겨레의 성공'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 있다. 한겨레는 지난 30여 년간 꾸준히 성장해왔고 진보 언론으로서 견고한 성을 쌓아 왔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한 과정인 동시에 한겨레라는 진보언론, 진보권력의 성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성장과 안착으로의 과정, 그러나 그 성공은 또한 ‘성공은 위대함의 적’이라는 말처럼 더 큰 성공으로의 길을 막는 독이기도 했다.
어떤 사물이든 나이를 먹으면 쇠해진다. 그것은 삼라만물의 생로의 이치지만 특히 진보는, 자기혁신과 자기갱생 없는 진보는 어떤 기득, 어떤 보수보다 낡은 것이 돼버린다. 그것이 진보의 숙명이며,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함정이다. 그러나 그 무거운 짐과 징벌은 역설적으로 진보가 진보 되게 하는, 진보적 열정의 성분이며 그 기염의 연료이다. 한겨레의 지금의 현실은 해독제가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으면 또 다른 병원균이 될 뿐이라는 것을 뼈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사태는 지난 주에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다. 거액의 돈을 주고받았던 몇 년 전에 '단 한 번' 일어난 게 아니다. 이 사태의 해결과 종료는 그 간부에 대한 해고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징계와 책임, 그 이상의 ‘적정한’ 혁신과 비상대책으로 끝날 수는 없다.
지금의 사태는 한겨레의 한 간부, 어느 한 부분의 탈선과 표류가 아니라 한겨레 자체의 이탈과 표류의 한 표출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 간부의 일탈이 빚어내는 모습들의 ‘밖’에 진정한 한겨레의 현실과 과제가 놓여 있다. 한겨레는 지금 한 번 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두 번 봐야 한다.
한겨레의 갱생, 더 큰 미래로의 길을 여는 것, 그것은 35년 전 한겨레의 탄생을 요청하고 태어나게 했던 우리 사회의 염원과 희구, 그것의 육신이자 응결체였던 한겨레의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한겨레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말하듯 한겨레가 잃어버린 듯한 '한겨레'를 되찾는 것이다. 한겨레의 그 기원과 뿌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결코 과거로의 복고와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로의 길을 여는 것이다.
나아가기 위해 되돌아가고, 얻기 위해 버리는 것이며, 위로 오르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한겨레가 ‘한겨레’를 되찾기 위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갱생이 아닌 ‘연명’일 뿐이며, 미래가 아닌 영원한 제자리에서의 정체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이것이 시민언론 민들레가 '국민주주 언론' 한겨레에 던지는 질타이자 응원이다. 대안 언론, 대항언론이 되려고 하는 민들레에게 한겨레는 한편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동반자이기도 하고, 한편 넘어서야 할 도전이기도 하다. 작은 민들레가 날개로써 선도하려는 큰 몸체이기도 하다. 민들레의 동료이자 동지, 34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또 다른 한겨레'이기도 한 민들레가 한겨레에 주는 애정 어린 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