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으로 쪼개 차별 만들어내는 한국의 공교육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높이는 교육은 불가능할까?
12.3 비상계엄 직후 서울대 총학생회가 총학 명의의 대통령 퇴진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 비상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광장에 입장하는 3천여 명의 신원을 확인하느라 늦은 오후 3시간이나 회의가 지체되었다고 한다. 재학생의 10% 이상이 참석해 결의안에 동의해야 한다는 학생회 규칙이 있다지만, 설령 그 가운데 재학생 아닌 사람이 섞여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테고, 결의안의 의미가 희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세(勢)를 불리고 참여자들을 늘려야 할 정치집회에 ‘입장객’을 가려서 받는” 학생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던 한 교수는 마침내 신원조회가 끝나고 2707명으로 총회를 열어 결의안을 채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칙과 질서를 지키는 학생들의 태도에 감동한 듯하다.(박원호, 포스트 계엄 세대의 탄생, 《동아일보》, 2025.1.6.)
대학이라는 부족사회
대충 인원을 세고 광장의 열기에 기대어 속전속결로 의사진행을 하던 구세대에 비해 밤늦은 시간임에도 정확한 인원을 확인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회의를 진행한 신세대가 민주주의 훈련이 잘 된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사안을 바라볼 수도 있다. 행사 때 신원조회를 하는 것이 요즘 대학가에서 당연한 절차가 되다시피 해 축제 때도 신원조회를 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것과 연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학가 주민들도 축제에 함께할 수 없게 되면서 대부분의 대학들이 ‘그들만의 대학’이 되고 있다. 소음으로 주민들이 입는 피해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이 대학에는 세금을 비롯한 많은 공공재원이 들어감에도 학생들은 대학이 공공자산이라는 인식이 별로 없다. 교수들도 학생자치의 문제로 치부하는 듯하다. 과연 그래도 되는 일일까.
2천년대 들어 ‘과잠’이라 불리는 유니폼(학교와 학과명 등이 새겨진 점퍼)이 대학가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과잠을 맞춰 입는 문화는 90년대 중반 고려대에서 시작되어 서울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들로 번졌다고 한다) 학교 이름을 커다랗게 박은 점퍼를 학교 밖에서도 입고 다니는 것을 초기에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지만(2010년 무렵까지만 해도 서울대생들은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을 의식해 학교 이름이나 마크를 넣지 않고 학과명만 넣은 과잠을 주로 입었다)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런 인식은 줄어들었다. 요즘 과잠은 대학생용 교복 성격도 있어 실용성 때문에 입는 학생들도 적지 않으므로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른바 명문대 신입생들의 경우 자신이 그 학교의 부족원임을 확인받고 과시하고 싶은 심리도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최근 서울대가 ‘서울대 가족’을 인증하는 차량용 스티커를 제작해 나눠준 것도 이런 흐름과 통한다.(미국의 이름 있는 대학들도 티셔츠 같은 학부모 굿즈를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이는 대학 재정 사업의 일환이지 차량용 스티커 같은 걸 대학이 제작해 나눠주지는 않는다)
대학생 과잠에 출신 고교 이름까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는 과잠의 유행을 대학서열화 현상으로 설명하는데, 더 넓은 시각으로 보자면 사회계층화 또는 부족사회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과잠 소매에 학교 로고나 심볼을 새기는 것은 조폭들이 팔뚝에 문신을 새기는 심리와 통하는 면이 있다. 눈에 띄는 디자인 때문에 과잠은 멀리서도 같은 부족원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해병대 출신들이 입고 다니는 전우회 티셔츠처럼 내부 결속을 도모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최근 과잠에 출신 고등학교 이름을 넣는 것은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SKY 대학을 중심으로 특목고와 자사고, 서울의 명문고 출신들이 주로 그렇게 하는데, 과거에 경기고-서울대 학벌처럼 부족 안에 또 다른 이너 서클을 만드는 행위다. 다른 대학 동아리와 달리 이들 서클은 이름조차 없지만 학벌로 연결된 끈끈한 유대감으로 서로 취업 정보를 공유하고 친목을 다진다. 이처럼 자신들이 특정 부족원임을 강조하는 것은 더 큰 사회인 대학 그리고 시민사회와 심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대학은 일찍부터 엘리트 부족사회였지만 오늘날에는 대학들 사이뿐만 아니라 같은 대학에서도 본교와 분교 간에 위계가 존재하며, 본교 안에서도 출신에 따라 촘촘하게 신분이 나뉜다. 정시로 들어온 이들 중에는 지역균형 전형이나 기회균등 전형으로 들어온 학우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부르며 마치 학교 물을 흐리는 벌레처럼 매도한다. “야비하게 입학하는 벌레들” 같은 혐오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성적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여기는 이들은 성적순이 아닌 다른 편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무임승차자처럼 바라본다.
쪼개고 쪼개어 차별을 만들어내는 닫힌 사회
EBS 다큐멘터리 <공부의 배신>은 특목고, 자사고 출신이 SKY 대학 신입생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같은 대학 학생이지만 출신 고등학교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평가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로스쿨과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이들도 대부분 이들 고등학교 출신들이다. 방송 후 인터뷰 편집이 왜곡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학 사회가 내부적으로도 계층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닫힌 사회는 내부를 쪼개어 차별을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는 점점 닫힌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계층화되어가는 대학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요즘 초등 학부모들 중에는 이웃의 다른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반을 따로 편성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아이들 사이에서 공공주택에 사는 아이들을 ‘휴거지’라 불리면서 많은 공공 아파트 단지들이 휴먼시아라는 이름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브랜드를 자랑하는 아파트 단지들은 이제는 외부인 출입을 막는 문을 곳곳에 만든 담장을 설치하고 있다. 자기들이 돈을 내고 분양받은 공간이므로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이전에 공유 공간이었던 골목길을 단지로 사유화하는 불공정한 행위임에도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 없다. ‘공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왜곡된 ‘공정’ 담론
요즈음 젊은이들은 ‘공정’에 유난히 예민하다.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조별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원성이 높은 것도 무임승차자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역할 분담을 하다 보면 잠수를 타거나 대충 자료조사만 해서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조원이 한두 명씩 있기 마련인데, 평가는 조별로 이루어지므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조별과제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대학생 설문조사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란 답변이 압도적인 것을 보면 무임승차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각종 대학 행사 때 신원조회를 하는 것도 무임승차를 막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객관식) 시험이야말로 공정하다고 믿지만, 객관식 시험은 족집게 강사의 강의를 들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다. 조국 사태 당시 정부가 내놓은 ‘정시 확대’라는 퇴행적인 정책은 국정 운영 철학의 빈곤과 우리 사회 공정 담론이 왜곡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시 확대는 학생들의 역량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고교 교육이 객관식 문제 풀이에 올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상위권 학생들의 지적 역량도 거기에 맞춰지므로 길게 보면 기득권층에도 자충수에 가까운 정책이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줄 세우자’는 능력주의 사고는 부모찬스 없이 오로지 본인의 시험 성적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부모찬스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수능에서 대치동 아이들과 구로동 아이들이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력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악·스포츠 20%, 학교 성적은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과 환경이 노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노력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 부모찬스는 고사하고 부모를 돌봐야 하는 처지의 아이들이 공부에 몰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능과 환경 다른 아이들, 상대평가로 공정 경쟁 가능한가
지난날 ‘하면 된다’를 외치던 기성세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되면 한다’고 말하는 것도 ‘노력의 배신’을 경험한 때문일 것이다. 십대 시절을 학교와 학원 의자에 앉아서 보내야만 했고, 의자뺏기 게임 같은 입시 경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10명 중 7~8명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걸 경험한 이들이다. 그렇게 힘들게 대학을 나와도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 앞에서 뒤돌아서야 한다. 몇십 년째 아이들이 선행학습 하느라 학원 뺑뺑이를 돌며 밤잠을 설치는데도 고교 내신제는 꿋꿋하게 상대평가를 고수하고 있다. 타고난 재능도 가정환경도 다 다른 아이들을 같은 링 위에 올려 세우고서 서로 치고받게 만든다.
모름지기 사회제도는 사람들이 타고나는 조건이 다르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상정하고 설계되어야 한다. 적어도 플라이급 선수와 헤비급 선수를 맞붙게 하지 않는 권투 경기의 룰 정도는 갖춰야 한다. 교육제도가 그 정도의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것은 왜일까. 늘 이기기만 한 자들이 규칙을 만들기 때문일까. 노력 따위는 상위 20% 정도만 죽어라 하게 하고 나머지는 설렁설렁 해도 제 밥벌이 하면서 살 수 있어야 좋은 사회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미래를 그리기란 어렵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우경화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조국 사태 당시 부모 찬스와 공정에 대한 논의가 폭발하면서 SKY 대학 학생들의 시위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그들은 조국 딸이 특혜를 누리고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학에 들어왔다고 분노했지만, 자신들 또한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부모찬스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거나 애써 외면한다. 그들의 부모보다 더 잘난 부모를 둔 조민이 조금이라도 부모 덕을 본 것을 고깝게 여긴 것이다.
상속의 시대에 교육이 고민해야 할 사회 시스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모찬스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찾기란 힘들다. 건물주들은 자녀에게 부동산을 물려주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녀들에게 입사 특혜를 주고자 한다. 국회의원은 지역구를, 목사들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연예인들의 자녀는 부모 찬스로 쉽게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민다. 격변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될수록 자수성가는 힘들어지고 점점 계층사회가 되어간다.
명문대 학생들이 자신들 또한 특권 계층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메타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대학생들 의식이 이 정도라는 사실이 놀랍지만, 학원을 전전하며 시험공부만 해온 그들의 성장과정을 돌이켜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가에 사회과학 세미나 바람이 불었지만 요즘 대학가에서 열리는 세미나는 대부분 취업이나 자기계발과 관련된 것들이다. 물론 예전에도 고시공부만 한 이들은 세상일에 눈과 귀를 닫고 살았을 것이다. 사회문제를 고민하며 세상의 변화를 위해 자기를 던져본 사람과 자신의 출세를 위한 공부만 했던 사람의 차이가 최근 탄핵 정국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육은 개인보다 사회를 위한 것이다. 공공 재원을 들여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하는 까닭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정체되고 점점 퇴보할 것이다. 선진국을 보고 베끼면 되던 시절에는 아이들을 줄 세우는 평가만으로도 필요한 인재를 충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국공립대를 통폐합해 대학 서열을 해체하는 고강도 개혁을 단행하고, 서울대는 국립대학으로서 연구 기능을 강화해 대학원 과정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직 늦지 않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 모두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