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앞 시민항쟁의 증인, 성공회 서울대성당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 성지 시청광장에 위치
1926년 축성 뒤 70년 만에 완공된 서울 랜드마크
부속 건물엔 세실 주교 이름 딴 세실레스토랑·극장
4대 교구장 세실 주교 삶은 한국 근현대사 축소판
64년 82세로 선종, 12월 17일이 60주년 기일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에 이어 또다시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으려고 나선 것이다. 지금은 국회가 있는 서울 여의도에서 연일 민중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예전에는 서울 시청 앞이 민주화운동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시민회관에 해당하는 부민관(府民館), 해방 뒤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는 ‘4·19 혁명의 중심지’란 제목 아래 “1960년 3월과 4월에 수만 명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의, 민의의 전당인 이곳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대적인 궐기로 4·19혁명을 일으켰다”고 새긴 표석이 세워져 있다.
6월항쟁 진원지로 민주화 새 역사 연 성공회 서울대성당
이곳에서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성공회 서울대성당)은 6월항쟁의 진원지다. 사제관 앞 기념비에는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고 적혀 있다. 1987년 6월 10일 이곳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열렸고, 이를 시작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그날 바로 옆 성공회 빌딩 지하 세실레스토랑에서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 선언문을 낭독했다. 세실레스토랑은 1980년대 재야인사 시국선언이나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이 단골로 열리던 장소였다. 같은 건물에 세실극장도 있다.
세실레스토랑과 세실극장은 성공회 제4대 한국교구장 앨프리드 세실 쿠퍼(한국식 이름은 구세실) 주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성공회가 부속건물 간판으로 그를 내세웠을 만큼 134년의 성공회 한국 전래사에서 세실의 존재는 우뚝하다. 오는 12월 17일이 60주년 기일이다.
16세기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 1890년 한국 상륙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과 결별하고 국교회를 세운 것에서 출발했다.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발단이 되긴 했으나 교황의 수위권을 거부하고 라틴어 대신 영어로 미사를 올리겠다는 교회 독립선언이었다. 교리나 전래 양식으로 따지면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간쯤 된다. 전 세계 신자는 165개국 1억 명, 국내는 5만여 명을 헤아린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890년이다. 영국 켄터베리대주교로부터 한국교구장에 임명된 군종사제 찰스 존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는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 신부, 엘리바 랜디스 의료선교사 등과 함께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듬해 인천 내동에 첫 성당을 짓고 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성누가병원)도 세웠다.
성공회의 초기 선교는 강화도에 집중됐다. 1893년 2월 고종은 강화도 갑곶에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통제영학당(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설립하고 콜웰 대위를 비롯한 영국 교관들을 초청해 수군 간부들을 양성했다. 코프 교구장은 이곳에서 군종신부로 활동하며 트롤로프 신부와 함께 강화성당을 십자가 형태의 한옥으로 지었다. 코프 주교는 서울 정동에도 한옥 성당을 축성하고 성베드로병원을 설립했다.
대성당 건물 짓고 그 바닥에 묻힌 3대 교구장 트롤로프 주교
1905년 취임한 2대 교구장 아서 베레스퍼드 터너(한국명 단아덕) 주교는 경기도 수원, 충남 천안, 충북 진천 등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YMCA(기독교청년회) 3대 회장을 맡아 서울 종로2가 YMCA회관을 건립했다.
코프 주교와 함께 입국했다가 1902년 영국으로 돌아갔던 트롤로프 신부는 3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1911년 내한했다. 강화 출신 신도 김희준을 첫 한국인 사제로 서임하고 강화에 성미카엘신학원(성공회대 전신)을 세웠다. 지금의 서양식 서울대성당 건물을 지은 것도 트롤로프 주교 때의 일이다.
조선시대 태종 이후와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사대문 안에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트롤로프 주교의 시신은 예외적으로 서울대성당 중앙 바닥에 안치했다. 천주교 명동대성당 지하묘지에도 2대 교구장 라우렌시오 주교와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유해가 있다.
대한성공회 소속 사제로는 처음 교구장에 오른 세실 주교
세실 주교는 1882년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했다. 1907년 사제품을 받고 1908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와 사목 활동을 펼쳤다. 1931년 트롤로프 주교가 세계 성공회 주교들의 모임인 영국 람베스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일본 고베항 인근에서 배가 충돌해 숨지는 사고를 당했다.
켄터베리대주교는 24년째 한국에서 활동하던 세실 신부를 주교로 승품한 뒤 4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대한성공회 소속 사제 가운데서는 처음 교구장에 오른 것이다. 그는 취임 2년 만에 신도 2천 500여 명을 늘려 전체 신도는 7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10년 간 전국에 51곳의 성당을 세워 모두 115개로 늘렸는데, 전임 주교들이 50년간 설립한 성당 수에 가깝다.
그의 의욕적인 선교 사역은 일제와 마찰을 빚으며 벽에 부닥친다. 1939년 켄터베리대주교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판하자 일제는 서울 상공에 반영 시위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1940년 들어서는 대한성공회도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한국명 차애덕) 보좌주교가 투옥됐고, 에드워드 이언 캐럴(성하영) 신부도 구류형을 받았다. 세실 주교도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와 단파 라디오 소지죄로 구류형을 받았다. 결국 세실 주교는 1941년 1월 21일 추방당하고 일본인인 구도 요시오 신부가 교구장서리를 맡았다.
64년 선종 때까지 46년 간 봉직한 영광과 수난의 아이콘
1945년 광복을 맞자 세실 주교는 이듬해 4월 19일 돌아와 교구장에 복귀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1만 명을 헤아리던 신도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전국의 성당도 퇴락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단 재건에 힘쓰던 세실 주교는 4년여 만에 6·25전쟁이 터져 또다시 시련을 겪는다.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용인성당과 수원성당을 순방하고 서울대성당으로 돌아와 교단을 지키다가 1950년 7월 18일 인민군들에 의해 납북됐다. 성당 동쪽 제대 외벽에는 퇴각하던 인민군이 난사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함께 끌려간 헌트 총감사제와 에마 휘티, 마리아 클라라 수녀는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세실 주교는 북한의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53년 4월 8일 포로 송환 결정에 따라 영국으로 귀환했다.
세실 주교는 모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그해 11월 부산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포로 시절 건강이 악화해 교구장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듬해 11월 9일 켄터베리대주교에게 사임을 청원해 12월 31일 받아들여졌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82세의 나이로 1964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46년 간 대한성공회 소속 사제로 봉직하는 동안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선교와 사목 열정을 불태운 그의 발자취는 성공회 한국 전래사의 수난과 영광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영국의 도서관에서 기적처럼 성당 설계도 발견
서울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공회 서울대성당도 식민과 전쟁과 독재를 거치는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성공회는 1890년 12월 21일 영국대사관과 이웃한 지금의 서울대성당 자리의 한옥을 매입해 쓰다가 2년 뒤 새 한옥을 짓고 장림성당(將臨聖堂·The Church of Advent)이라고 명명했다.
1922년에는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26년 1차 공사를 마쳤으나 비용과 물자 부족 때문에 설계대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지금 건물을 하늘에서 보면 세로로 긴 라틴 십자가 모양인데, 당시에는 양 날개와 꼬리 부분이 덜 지어진 채 작은 일자형 건물로 준공한 것이다. 당초 이름은 ‘성모 마리아와 성 니콜라스성당’이었으나 트롤로프 주교는 미완의 건축물임을 아쉬워해 ‘예비 대성당(pro-cathedral)’이라고 불렀다.
설계 당시 트롤로프 주교는 높고 뾰족한 고딕 양식의 건물을 원했다. 그러나 영국 건축가 아서 딕슨은 초대교회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잘 나타내고 바로 옆 덕수궁 전각들의 스카이라인과 어울리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합하다고 설득했다. 저층부 지붕의 기와, 서까래를 연상시키는 천장, 격자 창살 문양,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방색 등에는 한국 전통 요소를 가미했다.
1990년대 들어 대한성공회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성당을 증축하려 하자 문제가 생겼다.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함부로 증개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김원 건축가가 1993년 영국 런던 교외 렉싱턴도서관에서 기적처럼 설계도를 찾아내 당초 딕슨의 구상대로 1996년 완공했다. 원래 설계도대로 증축하는 것은 문화재 복원이자 완성이어서 법 규정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세실극장 건물은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
이전에는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별관이 세종대로와 성당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2015년 5월 철거된 뒤 나지막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들어서 큰길에서 성당 건물이 바로 보인다. 2021년 4월에는 서울시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협조로 세실극장 건물 옥상 ‘세실마루’를 개방했다. 건물 바깥의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데,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코앞에서 볼 수 있고 덕수궁 뜰도 내려다보여 서울 도심 답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세실극장이 들어선 성공회빌딩은 1976년에 준공됐다. 설계는 주한 프랑스대사관, 삼일빌딩, KBS 국제방송센터(IBC), 올림픽공원 평화의문, 설악파크호텔 등을 지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맡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의 불도저식 개발 정책을 비판하다가 1971년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성공회의 의뢰를 받고 우편으로 설계도를 보냈다.
세실극장은 1976년 개관 이래 ‘고도를 기다리며’,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화제작을 무대에 올리며 소극장 중심의 연극 문화를 주도했다. 80년대 후반 연극가의 중심이 대학로로 옮겨가면서 경영난에 빠져 여러 차례 운영자가 바뀐 뒤 지금은 국립정동극장 세실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 건물 지하에 1979년 개업한 세실레스토랑은 2009년 문을 닫았다. 지금은 달개비란 이름의 한식당으로 바뀌었다.
‘사회 민주화’ 시대적 소명 외면하지 않은 성공회 역사
개혁된 가톨릭’, ‘가톨릭 전통의 개신교’를 표방한 성공회는 교회 일치 운동에 앞장서면서 민족 해방과 사회 민주화라는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세실레스토랑은 없어졌어도 세실 주교의 헌신적인 생애와 함께 민주화를 염원하던 목소리는 오래오래 기억돼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정의가 실현되고 광장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