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가 처음에 일으켰던 바람은 왜 사라졌을까?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는 구호가 불러온 기대들

'나이와 성별만 다른 바이든'으로 드러난 해리스

'침묵하지 않겠다'더니 가자 학살 무기 지원 계속

2016년 힐러리의 실패한 선거운동 따라가는가?

트럼프 재집권 공포감 부추겨도 안 먹히는 이유

어떤 쪽이든 박빙의 승부 끝에 혼란은 이어질 듯

2024-11-03     전지윤 편집위원

올해는 유독 세계 곳곳에서 선거가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어온 미국 대선이 곧 실시된다. 먼저 미국은 사실상 간선제라고 할 수 있는 이상하고 뒤틀린 선거 제도를 가지고 있다.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와 선거인단 다수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어긋날 수 있다. 인구보다 더 많은 선거인단을 가질 수 있는 남부에 기반한 공화당에 유리하다.

한국에서 영남에 기반한 보수우파가 더 많은 의석을 가질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이미 민주당 또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한 대부분의 주를 제외한 7개 정도의 경합주에서 투표 결과에 따라 대선의 승패가 결정되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조 바이든이 민주당 후보에서 사퇴하고 카멀라 해리스가 후보가 되던 지난 여름만 해도 해리스 승리의 기대가 많았다.

트럼프에 뒤지고 있던 바이든과 달리 각종 여론조사에서 해리스는 트럼프를 크게 앞서기 시작했고, 특히 대표적 부동층인 청년들 속에서 여성이며 소수인종인 해리스의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라는 구호가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리스는 가장 뜨거운 이슈인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문제에서도 "나는 침묵하지 않겠다"라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 대선 두 후보 지지율 역전. 7월의 조 바이든 후보 사퇴 때까지 크게 앞서던 트럼프 지지율은 민주당 후보가 카멀라 해리스로 바뀐 8월 이후 역전됐으나, 10월 중순 이후 트럼프 우세로 재역전됐다. 이코노미스트 10월 21일

해리스가 부통령 후보로 팀 월즈를 지명하면서 기대는 더 높아졌다. 팀 월즈는 민주당에서도 가장 참신하고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손꼽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고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해리스가 처음에 일으킨 바람은 거의 사라졌다. 많은 여론조사에서 해리스는 뒤지고 있고, 대부분 전문가와 확률 사이트들도 트럼프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특히 경합주들에서 해리스는 이기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해리스가 '나이와 성별만 다른 바이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라고 외치던 이들은 트럼프 시대만이 아니라 바이든 시대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해리스는 바이든 시대의 반복이라는 것이 분명해져 왔다.

해리스는 자신이 이민 정책, 총기 소유, 인플레와 경제정책, 기후와 프렉킹(셰일가스 추출), 의료보험 등에서 바이든 시대의 어정쩡한 입장을 이어받겠다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당과 민주당 내부 보수파의 반대에 굴복하면서 '개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던 바이든에게 무조건 충성하면서 오류와 한계를 이어받겠다는 말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이자 현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인 1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의 대회장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감격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2024.8.19. AFP 연합뉴스

팀 월즈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근 바쁜 유세 일정 중에도 총을 들고 꿩 사냥에 나섰다. 해리스-월즈가 집권하면 총기 소유를 금지할 것이라는 공화당의 공격에 대응해, 보수적 유권자들에게 ‘걱정하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요즘 해리스가 대선 캠페인을 하면서 가장 많이 주력하는 것은 ‘딕 체니 전 부통령과 그의 딸인 리즈 체니 공화당 전 하원의원이 나를 지지한다’라는 자랑이다. 리즈 체니는 유세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됐다.

해리스는 이것을 통해서 공화당 이탈자들의 표를 얻으려고 한다. 딕 체니는 공화당 부시 정부에서 실세로 불리며 네오콘과 함께 이라크 침략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대재앙을 주도했던 정치인이다. 그 과정에서 고문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딕 체니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중동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이라크 전쟁의 악몽과 그 희생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해리스가 딕 체니를 앞세우는 것은 심각한 후퇴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해리스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저지르는 대량학살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제노사이드 조'(바이든)와는 다를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해리스는 "내 경력과 인생을 통틀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부동층에서 해리스의 바람을 꺾어버리고, 특히 아랍인 유권자들 속에서 심각한 이탈을 낳으면서 해리스의 대선 캠페인을 망쳐버린 결정적 요인이다. 

 

민주당원이지만 이스라엘의 학살을 돕는 해리스에게는 투표할 수 없다는 팻말 - KBS '세계는 지금'에서

'제노사이드 조가 물러나고 홀로코스트 해리스가 나타났다'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4년 전에 바이든은 아랍계 유권자에게 60%의 지지를 얻었지만, 지금 아랍계 미국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해리스에 대한 지지는 42%에 머물고 있다. 대선의 승패를 가를 경합주에서는 아랍인 유권자들의 표심이 결과를 좌우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더욱 중요하다.

해리스는 가자에서 펼쳐지는 처참한 대량학살을 보면서 1년 내내 눈물짓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테일러 스위프트, 오프라 윈프리, 에미넴, 비욘세 같은 유명 연예인과 대중 가수들의 지지를 앞세워서 바람을 일으키려는 헛된 기대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대선은 콘서트장에서 팬들이 환호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해리스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던 3개월 동안에 트럼프는 착실하게 지지층을 다지고 오히려 조금씩 확장해 갔다. 첫째, 트럼프는 반이민 인종주의와 무슬림 혐오 등을 부추기면서 핵심 지지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이티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라는 괴상망측한 악선동도 그 과정에서 나왔다.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9월 10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ABC가 주최한 대선 토론전에서 맞섰다. 2024.9.10. 로이터 연합뉴스

둘째, 트럼프는 '우리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소득은 줄어들었는데 엘리트들은 관심도 없다'라는 포퓰리즘적 선동으로 저학력 노동자나 변두리의 가난한 이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저학력층, 육체노동자들, 농촌과 소도시에서 해리스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심지어 트럭노조 위원장이 트럼프 유세에서 연설하는 일도 있었다.

셋째, 트럼프는 해리스가 여성 후보라는 점을 이용해 남성들의 뒤틀린 위기의식과 성차별적인 감정을 자극했다. 남성우월적 팟캐스트들에 출연하고 일론 머스크 같은 마초적 인플루언서를 앞세웠다. 흑인과 히스패닉 속에서도 남성 유권자들은 해리스보다 트럼프를 훨씬 더 지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런 갈라치기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트럼프에 맞서기 위해서 해리스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했다. 당시 힐러리는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트럼프의 혐오와 차별을 비판하면서 대립각을 세우는 소위 ‘정체성 정치’에 주력했다. 월스트리트의 대자산가들과 고학력, 고소득의 엘리트들을 대변한다는 이미지에 머물면서 반트럼프 정서와 공포감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트럼프는 반엘리트를 내세우는 포퓰리즘 선동을 통해서 이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고, 결국 힐러리는 패배하고 말았다. 따라서 해리스는 단지 ‘정체성 정치’에만 머물지 말고, 누가 진정으로 억압받는 노동자와 밑바닥 서민들의 편에서 정책을 펼 것인지 강조하는 ‘계급 정치’를 결합하고,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희망까지 덧붙여야만 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미국의 급진좌파 평론가인 조 앨런은 이렇게 지적한다.

“카멀라 해리스의 피곤하고 낡은 각본이 트럼프 부활의 길을 닦고 있다.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역사적 기억은 전쟁과 대량학살인데 바이든-해리스 정권은 전쟁과 대량학살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 반파시즘의 깃발을 흔들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 또한 그녀의 선거운동은 힐러리의 2016년 실패한 선거운동을 섬뜩하게 연상시킨다. 해리스는 주요 이슈에서 바이든과 차별화하거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청년, 민주당 지지층, 부동층뿐 아니라 공화당 지지층도 이스라엘 무지 금수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진보를 위한 데이터'에서 

특히 가자 학살에 대한 해리스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의 중간층과 공화당 지지자에서도 이스라엘 무기 금수를 지지하는 여론이 훨씬 크고 민주당 지지층과 청년층에서는 압도적이다. 심지어 미국 유대인의 절반도 이스라엘 무기 공급을 반대했다.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에서 아직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 중 57%는 해리스가 이스라엘 무기 금수를 공약한다면 투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해리스는 바이든과 분명하게 차별화하거나,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막아서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어리석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해리스와 민주당 주류의 정치적 기반은 미국 사회의 기득권층이고, 막대한 선거 자금도 제공하는 그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기에 해리스가 더 급진적인 정책과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해리스 선본은 선거가 다가올수록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협박하거나, ‘제3 후보인 녹색당 질 스타인에게 투표하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라는 광고를 내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소수인종 남성들은 성차별적 편견 때문에, 아랍인들은 반유대주의 때문에 해리스를 싫어한다’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책임 떠넘기기다. 지금 상황의 모든 책임은 트럼프에 반대해서 해리스에 투표하는 것이 곧 '대량학살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린 민주당에 있다. '1년간 4만 3000명을 죽이는데 230억 달러의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해리스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 질 스타인 후보는 이스라엘 학살 반대를 가장 선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상황은 1968년 미국에서 베트남전을 주도하던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하고, 대신 민주당 후보 험프리가 대선 후보로 나섰던 때와 비슷하다. 당시에 베트남전 반전운동에 앞장서던 많은 이들이 기권하거나 전쟁 반대를 말하는 제3의 후보들을 찍었다. 결과는 공화당 닉슨의 당선이었고, 베트남전은 더욱 끔찍한 확전으로 향했다. 

지금, 해리스에 실망한 많은 이들이 차라리 트럼프가 낫다거나, 트럼프가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반대하는 이들은, 네타냐후가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트럼프의 승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트럼프는 과거 집권하는 동안 네타냐후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고, 재집권하면 네타냐후와 함께 이란 핵시설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재집권은 여성과 성소수자, 소수인종과 이민자들에게 실질적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대대적 공격 속에 힘겨운 방어적인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해리스가 집권하면 노조 조직화, 기후정의 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등이 투쟁과 연대를 건설할 더 유리한 조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는 차이다.

그래서 1970년대 흑인 해방운동의 전설적 지도자였던 안젤라 데이비스는 나중에 아무리 실망을 낳았어도 2008년에 오바마 당선은 의미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성취했는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을 성취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다. … 중요한 것은 해리스를 선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급진적인 사람들이 변화를 위한 압력을 가할 공간을 여는 것이다.

또 다른 급진좌파 활동가이며 이론가인 애슐리 스미스는 해리스에게 투표할 것인지, 제3의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 논쟁하는 것보다 함께 투쟁하고 연대할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개인이 투표소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논쟁해서는 안 된다. … 우리와 의견이 다른 좌파 자매 형제들, 노조, 그리고 운동의 동료들을 비난하거나 배척할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 공통의 투쟁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토론해야 한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대회(DNC) 개막일인 19일 즉각적인 가자 휴전과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행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2024. 08. 19. [EPA=연합뉴스]

결국, 며칠 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양당 구도가 강력하고 결선 투표가 없는 미국의 현실에서, 진보와 개혁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그들이 '임기 내내 큰 변화를 만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1년간 대량학살을 도와 온 바이든-해리스에게는 도저히 투표할 수 없다'라는 판단을 하면 트럼프가 이길 가능성이 크다.

반면, 아무리 그래도 민주주의를 파괴할 극우 파시스트의 재집권만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크다면 해리스가 이길 수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치열한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고, 그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은 양쪽 모두에서 터져 나올 수 있다. 특히 트럼프 진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극우 민병대들을 부추기며 “피바다”를 경고해 왔다. 앞으로도 미국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가 같은 정치적 풍경이 계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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