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등 주관적 감정은 법의 영역에서 빼야
박원순, 정철승 성추행 혐의에 부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정철승 변호사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과 관련해 최자영 전 부산외대 교수가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법적 판단 근거의 하나로 삼는 것에 대해 짚어보는 글을 시민언론 민들레에 보내와 싣는다(편집자 주).
정철승 변호사는 고 박원순 의문사 진상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그러던 그가 박원순과 유사한 성추행 혐의에 연루되어 재판받는 중이다. 박원순 사건은 이미 제2, 제3의 박원순을 배태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성추행 사건은 박원순, 정철승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근원은 성추행의 경우 ‘피해자로 자처하는 이’의 확증 없는 주장이 법적 효력을 갖는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범죄는 증거가 있어야 유죄가 되는데, 왜 성추행의 경우 확증이 없어도 문제가 되고 유죄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성인지 감수성’ ‘수치심 유발’ 등,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이 법의 영역으로 들어와 떡하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증이 변변찮은 사건의 경우에도 주관적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범죄가 성립된다. 증거 없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도 감수성(감정)이 범죄 성립 요건이 되기 때문하다.
주관적 감정은 흔적이 없으므로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한다. 그런데, 주관적 감정을 상습적으로 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칼자루를 든 검사나 법관이 마음대로 사건을 주무르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주관적 감정 운운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악용될 소지가 있다.
객관적 증거 없이 성인지 감수성, 성적 수치심 등 주관적 감정은 정적 제거에 악용될 소지 있어
박원순의 경우 피해자로 자처하는 여성에 따르면, 박원순이 야한 사진을 자신에게 보내곤 했다는데, 그게 나중에 보니, 저 옥탑방 어딘가에서 현장 경험할 때 더워서 속내의 차림으로 부채질하는 모습이었다는 말이 회자한다. 이 경우, 사건의 진실 공방 여부는 별도로 하고, 객관적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겠다.
정철승의 경우, 이른바 피해자 여성은 남자가 자기 손을 끌어 잡아당겼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CCTV(폐쇄회로TV)에서 확인된 바, 이어진 대화 과정에서 여성이 스스로 남자 손 위에 자기 손을 갖다 얹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정철승(대한변협 감사)은 고소인 여성이 먼저 자기 손이 고생 많이 한 손이라고 하고, 그래서 엄지와 검지가 같다고 했고, 그래서 정철승이 자기 손은 어떤가 하고 비교해 보려고 여성의 손가락에 접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이 자발적으로 손을 남자 손 위에 갖다 얹기도 했단다. 대화 과정의 손(가락) 접촉 행위 관련하여, 여성은 손가락에 대해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철승이 여성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대게 된 과정이 맥락 없이 허공에 붕 떠버리게 되었다.
이 대화는 둘만의 자리도 아니었고, 또 정철승의 지인인 제3자가 함께 배석한 자리였으며, 좌석은 칸막이도 없이 공개된 공간에 탁자와 의자만 나열된 공간에 있었다고 한다. 또 정철승과 여성은 바로 옆에 나란히 자리한 것도 아니고, 탁자를 중간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정철승은 여성과 생전 초면이었고, 서로 존댓말을 썼다고도 한다.
피해자로 자처하는 이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해서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알도록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좋아하거나, 적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으로 상대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간 상호합의에 의한 것은 일방적 성추행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철승의 경우, 고소인 여성은 거부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피고인(정철승)이 대한변협 감사이고 대학 선배라서 추행 행위에 대해 거부 의사를 표현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정철승은 고소인 여성의 의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행위(손잡고 허리에 손대고)를 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추행인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평소 정치적 성향과 활동 이력을 감안하더라도, 피해자로 자처하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입장에 있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충남지사 안희정은 사건 발생 이후 수년이 경과한 이후, 피해자로 간주되는 여성(이혼한 경력의 계약직 비서)에 대한 “지위를 이용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혐의로 유죄선고 받았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여성이 안희정과 관계할 때, 거부의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안희정은 자신의 행위가 성추행인지, 상대가 원하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둘째, 안희정은 위계에 위한 성폭력으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여성 김 모씨와 안희정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일방적인 협박이라고만 하기 어려운 점이 있겠다. 한쪽은 충남도지사, 상대는 계약직 비서였는데, 다시 가능한 일반론으로서, 하급 지위에 있는 이가 상급 지위의 위력을 자신의 지위 상승에 이용하려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황은 서로 관계할 때,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한 적이 없었던 사실에서 유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 법관의 양심(헌법 103조) 등 주관적 감정 및 의견은 법에서 배제해야
박원순이나 정철승이 연루된 성추행 건은 개인적 사건으로서는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도 반성을 요한다. 첫째, 국가가 개인의 생활 및 감정에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는가, 둘째, 객관적 증거가 없는 주관적 감정, 의견 등이 법의 영역에서 허용될 수 있는가, 셋째, 개인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이 제도적 결함에서 파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등이다.
위 첫째, 정부가 개인의 생활에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의 자유와 긍지가 상대적으로 굳건하게 확립된 서구에서는 개인의 성적 행위는 정부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남성의 성추행은 그 자리에서 거부하면 되는 것이고, 원하지 않는 성폭행은 폭행죄로 다스리면 된다. 별도로 성추행, 성폭행의 범죄를 만들 필요가 없고, 성인지 감수성, 성적 수치감 등 주관적 감정은 법의 영역에서 추방되어야 하겠다.
객관적 준거가 있을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은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적을 제거할 때 이용될 위험성이 있다. 박원순의 사례가 대표적인 것이고, 정철승이 연루된 이번 사건도 그 같은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만남이 끝나고 작별할 때, 정철승이 여성의 손을 잡고, 함께 있던 남성과는 포옹을 했다고 한다. 남성이기 때문에 포옹해도 괜찮고 여성이기 때문에 손도 잡으면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대한변협 인사들과 모처럼 함께 술을 거나하게 든 자리를 파하면서, 앞으로 잘해보자는 친근감의 표시로, 여성의 손을 잡고 또 함께 있는 남성을 포옹했다고 한다. 여성을 포옹하고 남성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이런 행위가 꼭 성욕에 의한 것이라 규정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다.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손도 잡으면 안 된다는 법률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하다.
대화 가운데서 고소인 여성과 피고인 정철승의 손이 서로 왔다 갔다 한 이유에 대해서 고소인이 해명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피고인 정철승의 상황 설명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철승은 여성이 먼저 고생한 경험과 손가락 생김새의 관련성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이어진 일련의 손동작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소인 여성은 무엇보다 생각이 안 나는 이 부분의 기억을 살려서 가부간에 진술할 의무가 있다.
위 둘째, 객관적 증거가 없는 주관적 감정, 의견 등이 법의 영역에서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법의 영역에서는 증거 없는 주관의 영역은 배제되어야 한다. 한국에 통용되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은 미운 상대를 제거하는 데 번번이 이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 주로 여성이 보호 대상이 되는 ‘성인지 감수성’은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깔고 있는 것인데,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여성이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둔갑하여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해자로 변하기도 한다.
개인적 주관을 법의 영역으로 들여놓은 대표적 사례는 이뿐 아니다. 헌법 제103조 재판관의 양심 관련 조항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는 것인데, 한편에 ‘헌법과 법률’, 다른 편에 ‘양심’을 등치하고 있는 것은 독소조항이다. 전자는 객관적, 후자는 주관적인 것이다. 법관의 ‘양심’이란 주관적 의견이나 감정이므로, 헌법과 법률과 같은 영역이 아니다. 양자는 번번이 충돌한다. 독일 헌법(기본법)에서는 양심 조항이 없고, 법관은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만 재판하도록 하고 있다.
위 셋째, 개인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이, 단순히 개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결함에서 파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다. 박원순으로 끝이 아니고, 박원순의 억울한 죽음을 캐려 한 정철승도 같은 덫에 빠졌다. 정철승은 박원순의 경우에만 몰입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박원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성추행이란 범죄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주관적 감성을 범죄 구성요건으로 끌어들인 사실 자체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점에 착안하지 못한 것이 그러하다.
박원순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한 변호사 정철승이 ‘제2의 박원순’이 되어 스스로 박원순과 같은 성추행의 덫에 갇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 같은 바닥에서는 무수한 박원순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막자면, 무엇보다 성인지 감수성 등, 객관성 없는 주관적 감정을 법 영역에서 배제해야 한다.
그 같은 맥락에서, 판사들의 일탈을 무한하게 부추기는 밑도 끝도 없는 ‘양심에 따른’(헌법 재103조) 판결을 배제해야 한다. ‘양심‘이런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 박원순, 제3 박원순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권력구조 및 원리의 개선이 수반되어야 한다. 객관성 없는 주관적 감정은 법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주요 공권력 및 공직자의 임면을 국민 민중이 관장하도록 해야 하겠다. 미국처럼 배심제의 일상적 적용은 그 유력한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