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모델하우스 전시관이 아닙니다"

과천관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전

58개 꿈꾸는 집을 모자이크한 거대한 설치작품

2024-08-07     임종업 에디터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인트로.

“관객들이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여긴 모델하우스 전시관이 아닙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7월19~2025년 2월2일) 전시장에서 오간 필자와 전시 관계자의 문답이다.

전시는 집 58채를 소개하는데 국현 건축전시가 늘 그래왔듯이 모형, 도면, 사진이 전부다. 3차원의 건물을 다루면서 2차원 평면자료에다 장난감처럼 축소된 모형이 전부이니 답답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미 지어져 건축주가 살고 있는 집들인데, 굳이 설계단계의 옛 자료를 다시 늘어놓을 게 뭐람. 도면이 구체화한 건물을 들여놓으면 딱인데 그럴 수는 없을 테고, 사이버 상으로라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면 어떻겠냐는, 건축물은 모름지기 이용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는 진리까지 뒷받침된, 나름 건설적인 의견은 한마디로 무찔러졌다.

뭐가 문제인가? 이하의 글은 이 전시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혹은 무식한 관객의 반성문이다.

우선 예습부터 하자. 2022년 기준으로 전체 가구 중 51.9%가 아파트에 산다. 2019년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선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단독주택이 그 다음으로 29.6%를 차지한다. 기타 다세대주택 9.3%, 연립주택 2.1%,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상가, 공장, 여관) 1.5%, 주택 이외의 거처(고시원, 판잣집,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움막) 5.6% 등이다. 소득별 주택유형을 보면 하위가구(가구소득 10분위 중 1~4분위)는 단독주택 46.0%, 아파트 33.2%, 다세대주택 9.1% 순이다. 상위가구(9~10분위)는 아파트 76.8%, 단독 11.9%, 다세대주택 6.7%다.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선언하는 집.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아파트공화국’이다. 집 하면 현실이든 꿈이든 아파트가 떠오르고 소득이 많을수록 아파트에 사는 비중이 높다. 수요가 많은 만큼 아파트는 환금성과 투자가치가 높아 손바꿈이 잦고 투기 대상이 된다. 보통사람들은 돈을 더 얹거나 값이 덜 오른 것을 골라 평수를 넓혀가는 것이 기본이다. 따라서 집은 재산 증식 또는 보존 수단 1순위다. 건축업자한테도 아파트는 돈 놓고 돈 먹기다. 모델하우스를 지어 외제 브랜드명, O세권, 최신식 평형, 럭셔리 인테리어 따위의 특장을 홍보한다. 개개의 특장은 미래의 화폐로 환산된다. 수요자는 자신의 형편과 욕망에 맞춰 공간을 구매한다.

실상이 그럴지언정 꿈인들 없겠는가. 언젠가 내 멋대로,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피붙이, 살붙이와 함께 살고 싶은 꿈. 속물세상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고 싶은.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에서 해답, 또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전시는 선언하는 집, 가족을 재정의하는 집, 관계 맺는 집, 펼쳐진 집, 잠시 머무는 집, 작은집 고친 집 등 6개 파트에 걸쳐 30여 건축가의 집 58채를 소개한다. 출품작들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논의할 수 있는 집들이다. 무엇보다 대부분이 고급주택이 아닌 100평 이하의 집들로 보통사람들이 미래를 꿈꿔 볼 수 있는 대상을 선별했다는 게 전시 기획자의 설명이다.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부분.

우선 단독주택에 착목한 점에 높은 점수를 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독주택은 소득상위 가구보다 하위그룹이 더 많이 산다. 단언하건대 상위그룹에서 단독주택 비중이 비교적 작지만 호화주택은 비중이 작은 상위그룹의 단독에 많이 분포한다. 그러니까 단독주택을 전시대상으로 한 것은 자칫 사치스럽다는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그 기준이 적당한지는 논외로 치고 100평 이하로 제한함으로써 그 유형 중 ‘보통’을 가려내어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제시하는 방법으로서 적실하지 않겠는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실물의 어떠함보다 주로 설계 당시의 자료를 전시한 까닭은?

건축가가 지은 집은 설계도를 바탕으로 하고, 설계도는 건축주와 교감을 통해 파악한 의도를 반영한 구체물이다. 당연히 건축전에는 설계도가 빠질 수 없다. 해당 전시의 전시물은 이밖에 건축가-건축주의 대화, 건축주가 그린 그림, 그리고 건축가가 이를 바탕으로 그린 스케치들, 2차원 도면을 3차원으로 우선 시현해 제시한 모형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아카이브가 아니라 꿈의 조각들인 셈이다. 이쯤에서 나처럼 미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전시가 58개의 꿈을 모자이크한 대형 설치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거기에다 대안적인 삶에 대한 꿈이라니.

그래도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닐까?

전시 관계자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그게 제일 싫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싫다. 무엇보다 가상임에도 그 체험은 각별하여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나중에 그것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본질이 잊혀진다.” 우문현답.

2000년대에 지어진 58개의 집이 말하는 담론은 무엇인가. 기성공간에 자신의 삶을 맞추는 비루한 주거현실에 대한 자각. 나아가 기성제도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노예적인 삶에 대한 자각. 전시는 천편일률 기성 아파트에서 탈출하여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 공간을 찾아가는 선각자들 이야기다. 왜 우리는 집을 주거용으로 한정하는가. 왜 우리는 집장사들이 거실, 침실, 주방 등 용도를 지정한 대로 살아야 하는가. 2인, 4인 등 표준형으로 제시한 가족형으로 살아야 하는가. 동성부부와, 고양이, 개 등 반려동물은 가족으로 포용하면 안 되는가. 이웃사촌과 따로 또 같이 사는 방법은 없는가.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커튼이 주요 전시툴이다.

 공간디자이너는 이러한 전시기획자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 브라질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1914~1992)를 소환한다. 예로 든 작품은 자신과 남편을 위해 지은 집 글래스하우스다. 상파울루 교외의 이 건물은 언덕 위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유리벽 박스를 올린 모양새다. 바닥을 뚫어 네모난 정원을 만들었는데, 정원에는 햇빛이 비치고 나무 한 그루가 건물 가운데를 관통한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관계망이 펼쳐지는 구조다. 건물은 개인의 셸터로 국한된 게 아니라 주변 사람 및 사물과 상호작용하며 우연과 시간과 삶에 열려 있다. 그러니까 글래스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을 가능케 하거나 기존의 경험을 심화시키며 잃어버린 감각을 탐색하고 회복하는 장치다. 

리나 보 바르디한테서 빌려온 컨셉트는 전시기획자가 분류한 6개의 카테고리를 가벽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가벽에는 커튼이 달린 창호를 다는 것으로 구현된다. 가벽은 카테고리를 나누고 커튼은 카테고리 이쪽과 저쪽으로 시선을 넘나들게 한다. 디자이너의 용의주도함은 가벽을 사선으로 세운 데 있다. ‘연결과 전이’로 기능이 요약되는 사선가벽은 때로 평행하고, 때로는 직교하며 처음에서 끝으로 나아가 전시를 관통한다. 평행할 때는 골목이 되고 직교할 때는 방향전환과 함께 이웃한 공간을 엇갈려 예감하게 해준다. 관객은 조도가 조절된 골목에서 모니터를 통해 다가올 카테고리의 내용을 예습하고 해당 공간에 들어가 이를 확인한다. 커튼 너머로 다음 공간을 눈맞춤하고, 같은 꿈을 가진 관객들의 동태를 엿볼 수 있다.

디자이너는 이를 ‘마실감각’라고 표현했다. “이웃집에 쉽게 놀러가는 문화, 누구네 집을 기웃거리며 ‘누구 엄마 있어요?’ 하고 들어가던 골목길 공동체를 구현하고 싶었다.” 실제로 커튼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골목길은 따뜻하고 커튼 너머 테마마을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이녹 아든이 되든 성냥팔이 소녀가 되든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어쨌든 정교하게 꿴 모자이크 설치작을 통과하면 최근 20여년 동안 벌어진 사회변화상이 읽히고 자신의 위치를 매김할 수 있다.

‘관객들이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 취소. 이제 시들해진 꿈을 다시 벼리고 말고는 오로지 내 몫이다.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워크숍 공간.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커튼 월 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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