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의 올림픽 보도, 최악 안 되려면

한국,'북한'으로 부른 실수 들어 혹평하는 단순 시각

파리올림픽의 새로운 시도의 이유와 배경 살펴야

올림픽정신 확장과 공허한 현실의 양면 함께 봐야

2024-07-27     이명재 에디터

“최악 개막식' 될 뻔 했는데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의 노래가 살려 줬다.” 한국 시간으로 27일 새벽(현지시간 26일 오후 7시 30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올림픽 개막식에 대해 한국의 어느 신문은 이렇게 혹평했다. <촌극이 따로 없네…어처구니 없는 실수에 혹평 쏟아진 개막식> <‘초대형 실수’ 기본도 못 지킨 개막식> 등 비슷한 보도들이 여럿 나왔다. 이 같은 기사들은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단 입장 시 한국을 '북한'으로 잘못 부른 실수 등을 들어 개막식을 심하게 깎아내린 것이다.

반면 <공식 깨고 '혁명' 쓴 파리올림픽> <프랑스 '올림픽 혁명'>이라는 찬사도 나왔다. 그동안 하나의 대형 경기장에서 모여 진행되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벗어난 시도라든가, 파리 시내 전체를 무대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들이 돋보였다는 평가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을 최악이나 최고로 보는 엇갈린 평가에 대해 어느 쪽이 맞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최악이랄 수도 그렇다고 최고랄 수도 없다. 최악인 면과 함께 최고인 면도 있었다고 라고 봐야 하는 게 마땅할 듯하다. 최고여서 또한 최악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2024.7.27 MBC 유튜브 갈무리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언론의 올림픽 보도가 과연 최고와 최악 중에서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스스로 살펴보는 것이다. 한국언론의 올림픽 보도가 최악에 가깝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보이는 변화와 새로운 시도, 그 변화의 혁신적인 측면과 함께 그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이유를 짚어줘야 한다. 나아가 올림픽은 ‘올림픽 정신’에 맞게 열리고 있는가를, 더욱 근본적으로는 만국과 만인의 평화 제전으로서의 올림픽 정신이라는 이상은 지금의 현실에서 과연 성립할 수는 있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무엇보다 경기장을 벗어나 도시 곳곳의 삶의 현장을 무대로 삼았다. 그럼으로써 올림픽을 경기장에 갇히게 한 것이 아니라 넓혔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연상케 하는 해방과 자유의 표현이었다. “주인공이었어야 할 선수단 입장이 조연으로 떨어지고 선수단은 들러리를 섰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보다는 경기장과 삶의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올림픽적인' 시도였다. 올림픽이 운동 경기의 종합 제전을 넘어서 스포츠와 삶의 종합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하려 한 것이었다. 운동 종목들의 종합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그 나라, 도시, 시민 문화, 사회의 종합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개회식 대미를 장식한 건 자국 아티스트가 아닌 프랑스어권의 캐나다 퀘백 출신 팝스타 셀린 디옹이었고 프랑스 국적이 아닌 아티스트들이 결정적 장면에서 여럿 등장했다. 프랑스 역사와 문화의 ‘보편성’을 자신하는 테마와 스펙터클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에디트 피아프, 장 미셸 자르 등이 풍미했던 프랑스 대중음악이 어쩌다 이렇게 빈약해졌냐"며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반응도 있었다. 이는 ‘여성의 권리와 페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선수들의 성별 비율을 50:50으로 정확히 맞추려 한 이번 올림픽의 한 목표에 담긴 이중성과도 겹친다. 프랑스 문화의 보편성으로만, 반대로 빈약함으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남녀 선수 숫자의 일치는 '포용적 올림픽'이라는 취지를 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여성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심각하게 위선적이다"는 지적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느쪽 말에 동의하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올림픽을 그렇게 양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올림픽 직전 총선에서 극우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뻔 했던 현실과 함께 그같은 위기를 이겨내는 저력을 보였다. 이번 개막식은 그 양면의 단편들을 함께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국제사회의 중대한 현실과 과제의 단면이기도 하다.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조차-혹은 그렇기 때문에-극우 인종주의 신나치 정당이 1위를 차지할 뻔하고 이민자와 무슬림이 주요 표적이 되고 있는 현실은 전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의 한 표본으로서의 프랑스를 주목하게 한다. 프랑스의 영광과 프랑스적인 자유와 풍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자유와 풍요의 한 원천이 무엇인지, 자유와 풍요의 '비결'이 동시에 위기의 원인이라는, 그 현실과 역사에 대한 직시를 전세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가의 대등한 참가가 이뤄지는 올림픽 제1의 정신의 이상이 확장되면서 한편으로는 그와 대비되는 공허한 현실을 함께 보는 것을 요구한다. 각국 선수단의 입장 때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올림픽이 아니라면 그 존재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나라들이 여럿 소개됐다. 100년 전인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44개 국이었던 참가국은 이번엔 206개 국으로 거의 5배나 늘었다. 그렇게 참가국이 급증한 현실의 다른 편에는 올림픽 무대에서 확인되는 나라간의 극심한 격차가 있다. 예컨대 인구가 1억 7400만 명인 방글라데시는 불과 5명인 데 반해 1171만 명의 인구지만 181명인 벨기에 간의 선수단 규모의 차이는 국제사회의 초격차를 현실이자 상징으로서 보여준다.  

파리 올림픽은 올림픽이 탈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올림픽위원회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에 대해 그 국적을 앞세운 출전을 금지시켰다. 반면 수많은 팔레스타인 양민을 학살한 이스라엘은 특별 경호를 받으며 참가하고 출전할 수 있었다. 가장 탈정치적인 무대가 오히려 가장 정치적일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개막식에서는 올림픽기가 거꾸로 게양되기도 했다. 올림픽기는 흰색 바탕에 파랑, 검정, 빨강, 노랑, 초록 고리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위쪽으로 가야 할 파랑, 검정, 빨강 고리가 아래에 있는 모습으로 게양된 것이다. 이를 큰 실수로 지적하는 보도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실수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주최측의 의도가 어땠든 간에 올림픽의 정신은 과연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풍자적인 은유로 비쳤다. 올림픽 보도에 필요한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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