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 500년 역사, 아시아 재등장으로 역전하나

유럽-아시아 관계 역전, 아시아의 표적이 된 유럽

유럽 전유물 ‘분할 통치’ 기술을 역투사하는 아시아

중국, 인도, 한국 등 AP4와 중동의 강자들 등장

우크라 전쟁은 미국-중국 대리전쟁, 한국전쟁도?

K 방산의 유럽 ‘진출’, 유럽 우경화의 거시적 맥락

‘유럽 우선’에서 ‘아시아 우선’으로 전략 바꾼 미국

2024-07-22     한승동 에디터
7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바르케르트 바자르 컨퍼런스 홀에서 열린 유럽연합 내무장관 비공식 회의 참가자들. 2024.7.22. EPA 연합뉴스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에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남부 케랄라에 도착한 것은, 그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유럽(나중엔 미국)의 아시아 지배 500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식민지배, 제국지배, 지정학적 지배는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 흐름 속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종속 또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다.

유럽과 아시아의 관계 역전

그런데 아시아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과 글로벌 파워의 재배치가 동방(아시아)에 유리한 쪽으로 이뤄지면서 유럽-아시아 관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경제력 변화로 시작된 전환은 이제 지정학, 군사, 기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 유럽의 전략적 개입의 표적이었던 아시아가, 이젠 거꾸로 유럽을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3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과 별도로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국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중국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조력자라고 규정한 지 하루 만에 나토의 아시아로의 확장을 비난했다. 2024.7.3. AP 연합뉴스

아시아 강국들의 군사력 투사 대상이 된 유럽

지난 16일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 정기 간행물 <포린 폴리시>에 실린 ‘아시아 강국들이 자신들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유럽을 겨냥하고 있다’(Asian Powers Set Their Strategic Sights on Europe)는 글의 시작 부분이다.

‘500년 뒤 상황이 역전돼 지리멸렬해진(incoherent) 유럽이 발흥하는 아시아의 지정학적 야심의 표적이 됐다’는 부제를 단 이 글을 쓴 사람은 인도 국가안보자문위원회 위원 출신으로 <포린 폴리시>의 칼럼니스트인 C. 라자 모한이다.

유럽의 상대적 퇴조와 ‘나머지 세계’, 즉 비서방 강자들의 상대적 발흥을 얘기할 때, 그것을 특히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쪽은 아시아다.

모한에 따르면 유럽은 이미 아시아 주요국들이 자국의 군사력을 투사하는 무대가 돼 있다. 예컨대 대규모의 이란, 북한산 드론, 탄약, 무기 부품들이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에 들어가고 있고, 중국은 우크라이나 도시들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러시아를 돕고 있다. 이란의 군사 고문들이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보도(이란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가 나돌고, 베이징은 서방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지만 모스크바 경제를 떠받치고 무기부품을 공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심지어 7월 중순에는 중국군이 벨라루스 서쪽, 폴란드와의 국경에서 몇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에서 러시아 등과 11일간 합동군사훈련(‘이글 어솔트 2024’)을 실시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2017년부터 발트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해 왔으며,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지중해에서 해군합동훈련을 펼쳤다.

이처럼 아시아 나라 중국의 유럽에 대한 군사적 야심은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중국군이 나토(N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맹국(폴란드와 발트3국 등)의 동부 국경 근처에서 군사훈련에 참가한 것은, 유럽의 거점들을 겨냥한 아시아의 전략적 표적들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확장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불과 얼마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태 전개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지난 7월 9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회담한 뒤 모디 총리에게 성 안드레아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의 한 장면. 2024.7.9. AFP 연합뉴스

중국, 인도, 한국 등 AP4, 중동의 강자들의 등장

모한이 말하는 ‘아시아’는 아시아의 주요 강국들이며, 여기에는 중국 외에 인도, 그리고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태평양 파트너 4개국(AP4), 그리고 중동지역 강국들이 포함된다. AP4의 ‘파트너’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집단방위기구 나토의 파트너다. 모한은 특히 중국 인도 AP4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유럽을 자신들의 지정학적 야심을 펼칠 무대로 삼고 있다고 본다. 이는 유럽이 유럽 역내의 전쟁과 분쟁에 대한 통합적 플레이어로서의 대응에 실패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유럽의 전략적 계산의 대상이었던 아시아 강국들이 이제 거꾸로 유럽을 자신들의 전략적 야심을 펼칠 대상으로 삼는 관계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모한이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 포인트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인도 전문가의 생각을 더 따라가 보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8일 중국 베이징 디아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를 맞이하면서 악수를 하고 있다. 2024.7.8.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중국 대리전쟁, 한국전쟁도?

유럽에서 커지고 있는 아시아의 영향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고 저지하는데 실패한 유럽의 리더들이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달려가 푸틴 대통령을 설득해 전쟁을 끝내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시진핑은 올해 초 파리와 베오그라드, 부다페스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전쟁 양쪽 당사자들에 모두 관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스크바를 도와 러시아가 유럽을 이길 경우 아시아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고, 그것은 서방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계산을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역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에 맞서는 중국의 첫 주요 대리전쟁이다.

모한의 주장대로라면, 미국-중국 대리전이 아시아에서 벌어진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이 한국전쟁(6.25)이라 할 수 있다. 그 전쟁은 무승부를 기록한 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며, 제2의 한국전쟁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전문가들 사이에 떠돌고 있다.

중국과는 다른 인도의 유럽 관여

유럽은 인도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평화외교를 펼쳐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인도는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서방 쪽에 줄을 서지 않았고, 인도의 우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유럽을 비난해 왔다. 뉴델리는 러시아의 원유를 대량 구입하고 그것을 유럽에 다시 팔기도 하면서 모스크바에 대한 관여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인도의 유럽에 대한 이해는 중국의 그것과는 다르다. 인도는 유럽을 장래의 경제적, 전략적 협력 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과는 달리) 유럽과 미국의 분리 또는 양자의 약화를 바라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은 인도에게 중국과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존재들이다. 유럽은 최근 인도의 지정학적 계산에서 꾸준히 그 존재감이 커졌다. 인도는 모스크바를 아시아의 지정학적 균형 유지에 중요한 요소로 여겨 왔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7월 초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상호관계를 강화하고, 모스크바가 베이징의 종속적 하위 파트너가 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유럽 전유물이던 ‘분할 통치’ 기술을 역투사하는 아시아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는 유럽의 식민 강국들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통용된 격언이었다. 지금은 아시아 강국들이 역으로 그 기술을 배우고 있다. 중국이 친러시아적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대통령을 활용하거나,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유럽을 중국 내에서의 그들의 상업적 이익을 자극해 미국에 대항하게 만들 수 있다면 중국에겐 이상적인 결과일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대서양 양안의 지정학적 분할을 꾀하고 유럽 정치 스펙트럼상의 좌우 반미주의를 활용하려 할 여지가 충분하다.

 

지난 7월 1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담 중에 열린 '우크라이나 협정' 기념식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맨 오른쪽) 등 나토 가맹국 정상들.2024.7.11. EPA 연합뉴스

나토 정상회의 정례 참석자가 된 한국 등 AP4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은 주요 무기 생산국으로 등장해 나토에 이미 무기를 팔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대항해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수 있다.

일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주요 정치외교적 지원자로 등장했으며, 전쟁 뒤의 우크라이나 재건이 시작되면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지난 7월에 열린 워싱턴 G7 정상회의도 유럽 방위가 아시아 태평양 강국들에게 얼마나 큰 관심사가 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바이든 정부는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 4개국-호주, 일본, 뉴질랜드, 한국-이 유럽 안보논의에 참여하도록 설득해 왔다. AP4 정상들은 나토 정상회의의 정례적인 참석자들이 됐다. 유럽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의 안보를 지켜내는데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바이든의 주장은 그 반대, 즉 아시아가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의 안보를 지켜내는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1, 2차 세계대전 양상 바꾼 수백만 인도병사들 파병

모한에 따르면, 아시아의 유럽 개입이 모두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시아인들은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의 분쟁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컨대 영국 통치하의 인도는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거의 1백만, 2차 세계대전 때도 연합국에 거의 2백만의 군인들을 파병했다. 그들이 그렇게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럽의 지도는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모한은 지적했다.

모한은 이제 아시아는 그런 과거와 달리 더는 유럽 전쟁의 수동적 종속변수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아시아 강국들은 그들 자신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직접적인 참여자가 될 것이다. 줄어드는 인구와 축소되는 군대, 약화되는 의지력에 대처하려는 유럽의 몸부림은 유럽 안보에 대한 아시아 강국들의 개입 가능성을 점점 더 키우게 될 것이다. 유럽 안팎에서 아시아 강국들의 지정학적 야망은 우크라이나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국제 방산전시회 '인도양 방위 안보 2024'(Indian Ocean Defence & Security 2024)에 참가해 기술력을 선보인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차세대 호위함 '충남함' 시운전 모습. 2024.7.23. 연합뉴스

한국 방산의 유럽 ‘진출’, 유럽 우경화의 거시적 맥락

최근 급속히 부각되고 있는 ‘방산 강국’ 한국의 등장도 이런 모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겠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떠나,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우크라이나 등 중동부 유럽으로의 한국 방산산업의 급속한 활동영역 확장을 그런 거시적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파의 급속한 대두로 특징지어지는 유럽의 최근 정치 사회적 격동도 500년이나 지속돼 온 유럽 등 서방의 일방적 우위가 끝나가면서, 서방이 거의 독점해 왔던 글로벌 잉여와 분배 시스템이 더는 지속될 수 없게 된 데에 따른 현상, 즉 서방의 상대적 궁핍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나르 뮈르달의 ‘아시아의 드라마’ 진단 넘어선 아시아

이란과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남부 코카서스, 동지중해, 남아프라카에서 점점 더 역할을 키워가고 있다. 중국과 페르시아만의 자본은 러시아 용병들과 함께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예전 아프리카 식민지 거점들에서 그들 나라를 몰아내고 있다. 동지중해에서 남지중해에 이르는 불안정 지역 안보에 유럽은 무기력하며, 조만간 외부세력이 이들 유럽의 관문을 통제하게 될 것이다.

유럽은 아시아를 저평가해 온 오랜 전통이 있다. 1966년에 스웨덴 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아시아의 드라마: 국가빈곤 탐구>(Asian Drama: An Inquiry Into the Poverty of Nations)에서 복합적 구조 결함이 있는 아시아는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20년도 지나지 않아 아시아의 경제적 발흥은 가장 중요한 글로벌 트렌드(세계적 흐름)들 가운데 하나가 됐다.

경제적으로 유럽은 이제 아시아의 성장이 더는 단순한 물건을 만드는 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아시아는 반도체와 전기자동차 생산을 선도하고 있다. 유럽은 여전히 틈새 역량을 지니고 있고 서비스 부문 강자로 남아 있지만, 혁신에서 뒤처지고 특정 첨단기술 상품 생산 분야에서 아시아에 뒤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콜롬비아 전함들(ARC Narino, ARC Victoria)이 지난 6월 29일 태평양 콜롬비아 근해에서 실시된 합동해군훈련에서 미군 유도 미사일 구축함 USS 샘슨, USS 포터, 핵 추진 항공모함 USS 조지 워싱턴 옆을 지나가고 있다. 2024.6.29. AFP 연합뉴스

‘유럽 우선’에서 ‘아시아 우선’으로 전략 바꾼 미국

아시아 강국들이 유럽에 눈을 돌리면서 유럽인들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의 원천이 된 것은 그들이 더는 미국의 전략적 관심사들의 중심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1세기 이상 유럽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한 중요한 외부 무대였다.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은 유럽에서의 이익을 아시아에서의 그것보다 우선시했다. 오늘날 미국의 군사적 전략적 관심은 점차 아시아 나라 중국과의 경쟁에 집중되고 있다. 미국이 완전히 유럽을 버릴 것 같지는 않으나(도널드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유럽은 아시아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럽에게 기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럽은 아시아 강국들과 상호이익이 되는 새로운 작업방식을 찾아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아시아는 하나로 통합돼 있지 않다. 분할과 노골적인 대립으로 가득차 있다. 예컨대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베트남과 중국, 캄보디아와 베트남, 그리고 인도와 중국 사이처럼. 유럽은 그런 사실부터 인식하고, 오랜 기간 방치해 온 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한 관심과 미국에 의존해 온 안보와 전략적 사고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아시아 강국들의 등장과 커진 영향력에 합당한 존중을 표하면서 그들을 지정학적으로 대등한 존재로 대함으로써 아시아와의 언대를 업그레이드하고 글로벌 장기판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한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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