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직구보다 더 심각한 헛발질은 모른 척하더니…
“해외 직구 KC 인증” 발표 사흘 만에 철회
국민의힘·언론 한목소리로 “정책 혼선” 질타
주 69시간 근로·R&D 예산·의대 정원 번복
정부 불신 넘어 국가 경쟁력까지 떨어뜨려
“던지고 보는 윤 대통령 스타일과 닮은꼴”
정부가 설익은 ‘해외 직구(직접구매)’ 대책을 발표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 16일 80개 항목에 대해 KC(국가 인증 통합마크) 인증 없는 제품에 해외 직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비현실적’ ‘소비자 선택권 침해’ 등의 이유로 비난 여론이 거세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며 사실상 정책을 거둬들인 것이다.
해외 직구로 유입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안전 관리를 강화하려다가 일어난 사달인데 문제는 윤석열 정부에서 유독 이런 정책 헛발질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초등학교 5살 입학과 주 69시간 근로, 수능 킬러 문항 배제,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의대 정원 2000명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번 건에 대해서는 국민의힘 유력 인사들이 강한 어조로 질책하고 대통령실이 즉각 잘못을 사과했다는 점이 다르다. 대통령실은 20일 “실제 계획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해 혼선 초래해 죄송하다”며 “재발 방지책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도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앞으로 정부 각 부처는 민생 각 정책, 특히 국민 민생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정책 입안 과정에서 당과 충분히 협의해주길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과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등 여당 인사들과 언론들도 정부의 어설픈 행태를 성토했다.
해외 직구 제품에 KC 인증을 의무화 하겠다는 발상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다. 정부는 대책을 내놓으면서 소비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시장에 미칠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정부도 정책 혼선을 사과하며 인정했듯이 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16일 대책을 발표하며 국민의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80개 품목에 대해 KC 인증이 없다면 해당 제품의 해외 직구를 원천 금지하는 조치가 곧 시행될 것처럼 이야기했고, 대다수 언론도 이런 내용으로 보도했다.
정부가 충분한 준비 없이 대책을 발표한 건 잘못이지만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다. 이번 사태로 급증하는 해외 직구로 인한 국내 소비자들의 피해를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정부도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현실적 방안을 찾겠다고 했으니 두고 볼 일이다.
이번 건은 윤석열 정부의 졸속 행정과 설익은 정책으로 인한 혼선과 국민 피해가 비교적 덜한 사안이다. 지난해 윤 대통령이 교육계 카르텔을 운운하며 느닷없이 킬러 문항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수험생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킬러 문항 배제로 수능이 쉬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교육비 급증 등 교육계 문제가 킬러 문항 탓이라는 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발상이다. 킬러 문항 배제가 해법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 한마디에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원장이 사임하고 수험생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는 사태가 벌어졌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전문가 의견과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2000명’이라는 숫자가 나왔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2000명 증원이 사실상 힘들다는 현장 목소리에 2025학년도에 한해 거점 국립대에 배정된 증원분의 50~100% 선에서 증원을 자율 조정하도록 허용했다. 정부 스스로 2000명이 절대적 숫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의대 정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법원이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수험생이 보건복지부·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2025학년도 의대 2000명 증원·배분 결정 처분의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에서 기각·각하 결정을 내렸으나 정부의 주먹구구식 정책에 따른 의료 공백으로 많은 환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 의대 정원 2000명을 밀어붙이지 않고 의료계와 협의를 거쳤다면 극심한 혼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올해 R&D 예산을 삭감한 것도 그렇다. 국민 여론이 악화하자 윤 대통령은 내년에는 최대 폭으로 R&D 예산을 늘리고 예비타당성조사(예타)도 폐지하겠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극과 극을 오락가락하는 정책은 역대 정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과학기술계가 R&D 예산을 유용하는 카르텔이라며 모욕감을 주더니 이제는 예타를 폐지하겠다고 한다”며 “밥 지을 쌀을 다 뺏어놓고 구멍 뚫린 가마솥을 선물해주겠다는 태도”라고 비꼬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초등학교 입학 나이를 만 5살로 낮추는 학제 개편안을 발표해 교육계 반발을 부른 것이나 근로 시간을 주 69시간으로 늘리는 정책으로 노동계와 청년층의 분노 게이지를 높인 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책 헛발질이 반복되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의 빈곤한 국정 철학과 무능이 근본 원인이다. 고정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정책 수요자인 국민 눈높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섣부르게 정책을 추진했다가 결국 혼란만 부추기고 정부 정책의 신뢰도만 떨어트리는 결과만 낳았다”며 “일단 정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추진부터 하는 대통령의 스타일과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