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22대 국회서 실현되나

192석 거대 야권, 이구동성 다짐…여당도 찬성 표명

'제7공화국' 개헌안 포함, 또는 '원포인트 개헌' 가능

윤석열, 대선 공약이었지만 기념식서 한마디 안 해

이재명 "약속 이행해야…더 이상 5‧18 폄훼 안 돼"

87년 개헌 땐 민정당, 2018년 발의 땐 자한당 반대

이번엔 '헌법의 얼굴'에 숭고한 의미 명확히 담아야

2024-05-18     김호경 에디터
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18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 지도부가 유족 및 피해 당사자에게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전해듣고 있다. 2024.5.18. 연합뉴스

해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곤 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前文) 수록 과제가 22대 국회에서는 실현될지 주목된다.

지난 총선을 통해 개헌선(재적의원 3분의 2인 200석)에 근접한 192석을 확보한 거대 야권에서 4년 중임제 도입, 대통령 거부권 행사 제한 등 '제7공화국' 개헌 추진을 위해 이미 군불을 때고 있는 가운데 특히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다짐하는 상황이다. 여당에서도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거듭 찬성 입장을 표명해 왔기 때문에 '원포인트 개헌' 등을 통한 실현 가능성을 두고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44주년인 18일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대선 공약이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 대표는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 참석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개인들은 돈 10만 원을 빌릴 때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받는데 국민 주권을 위임받는 대신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기죄보다도 더 엄중한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 대통령께서 오늘 기념식에 참석해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나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대선 때 명백하게 공약했고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공약한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천과 행동으로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면서 "반드시 헌법 전문에 수록해 다시는 국민이 준 총칼로 국민을 집단 대량 살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실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 저희가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앞서 이 대표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역사의 법정에 시효란 없고 온전한 진상규명만큼 완전한 치유는 없다. 민주당은 5‧18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데 앞장서고 국가폭력 범죄는 반드시 단죄 받는다는 상식과 원칙을 바로 세우겠다"며 "더 이상의 5‧18 폄훼와 왜곡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또한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 그것이 '산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오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이날 제44주년 기념식에서도 그 같은 요구가 표출됐다. 내빈으로 앉아 있던 광주시의회 5·18 특별위원회 소속 시의원 8명은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사가 시작되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5·18 헌법 전문 수록'이라는 문구가 한 글자씩 적힌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들은 그렇게 기념사 내내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5분 18초간 기념사를 낭독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집권 3년 차에 들어섰음에도 자신의 공약을 이행할 의지가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돼 야권의 비판이 이어졌다.

 

18일 오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제44주년 기념식에서 광주시의회 5·18 특별위원회 소속 시의원들이 '5·18 헌법 수록' 촉구 현수막을 들고 묵언 시위를 하고 있다. 2024.5.18 [독자 제공] 연합뉴스

거슬러 올라가자면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이미 37년 전에 정치권에서 구체적으로 시도된 적이 있다. 1987년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 직후 여야 핵심 인사들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서 헌법 개정안을 협상할 당시 현 민주당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민주당의 개헌 시안에 다음과 같은 헌법 전문 개정안이 포함돼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 위에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제1공화국을 재건하였으며 4·19의거와 5·18광주의거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하여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국민의 권리를 극명히 하였고…."

그러나 8인 정치회담 협상에서 민정당 측은 "역사적 평가나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일부의 주장을 전 국민적 합의가 담긴 전문에 넣는 것은 곤란하다"고 극력 반발해 결국 '5·18광주의거' 삽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개헌 논의가 수시로 불거질 때도 이 부분은 거의 재론되지 않았고 주로 대통령 연임제냐 내각제냐 등 권력구조 개편 이슈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야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을 포함한 정부 개헌안을 2018년 3월 직접 발의했지만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개헌 자체에 반대해 또 다시 물거품이 된 바 있다.

헌법 전문은 국가의 기본 원리와 추구하는 가치, 건국이념 등을 담고 있어 '헌법의 얼굴'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를 통해 그 국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가령 미국 헌법의 전문에는 "우리들 합중국 국민은 보다 완벽한 연맹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평화를 보장하고, 국민복지를 증진하고, (중략)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라고 돼 있다. 프랑스 헌법 전문은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최상위법이자 기본법이며 모든 법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헌법의 전문에 5·18 정신을 명기함으로써 지금도 계속되는 '폭도' '빨갱이' '북한군' 운운의 반역사적 왜곡과 퇴행을 막고 숭고한 민주화 운동으로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국민들 인식 속에 명확하게 자리 잡도록 하자는 게 헌법 전문 수록의 취지다. 불법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와 국가폭력에 맞서 민중이 사회적·정치적 주체로서 저항권을 행사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고 민주적·법치주의적 국가질서를 회복하려 한 '시민혁명'이자 '주권혁명'으로서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헌법적 가치로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개정할 수 있다. 문구 자체가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결단의 문제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과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한 5·18민중항쟁정신(또는 5·18민주화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18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기념식에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가 '5·18 폭정 종식' 문구가 적힌 넥타이를 매고 있다. 2024.5.18 [공동취재] 연합뉴스

이 같은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은 물론 개혁신당도 22대 국회에서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내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도 약속했던 바이고 국민의힘 지도부도 여러 차례 동의했던 만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22대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헌법개정특위 위원장인 윤호중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을 제한하고 대통령도 국회의장처럼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개헌을 제안하면서 5·18 수록도 함께 언급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18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불행하게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87년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판단이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 법률과 판례로 5·18민주화 운동이 불법한 국가권력에 맞서 싸웠다는 정당성이 확인됐다. 법률적 복권이 이뤄진 것"이라며 "이제 헌법 전문에 수록되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저희 조국혁신당이 앞장서겠다"고 천명했다. 조 대표는 전날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을 통해 "2026년 6월 지방선거 전에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대선을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하자"며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동시에 4년 중임제로 바꾸는 '7공화국 7대 개헌안'을 제시하면서 5·18 수록도 포함시켰다.

진보당 윤희숙 상임대표와 전종덕 당선자도 이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그 당위성을 역설했다. 22대 국회에 첫 입성하게 된 전종덕 당선자는 "5·18 영령들과 민족민주열사들 앞에서 결의를 다진다. 5·18민중항쟁 헌법 전문 수록으로 5·18 역사 왜곡과 폄훼에 종지부를 찍겠다"면서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말만 하지 말고 5·18민중항쟁 헌법 전문 수록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이주영·천하람 비례대표 당선자와 함께 지난 15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면서 총 7시간 30분에 걸쳐 전체 995기 묘의 비석을 일일이 닦고 헌화한 뒤 절을 올린 바 있다. 헌화에 쓰인 꽃은 경남 김해에서 재배된 국화 1000송이로 이날 새벽 이 대표가 김해에서 차를 직접 운전해 5·18 묘역까지 운반한 것이다. 이 대표 역시 이 자리에서 "개헌할 때 5·18 정신을 헌법에 담는 부분은 정당 간 반대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원포인트 개헌보다는 포괄적으로 (개헌 논의를 해서) 5·18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18일 광주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손을 맞잡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2024.5.18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문제는 여당인데, 일단 공개적으로는 동참 의사를 누차 공언해왔다. 국민의힘 윤희석 선임대변인은 18일 논평에서 "5·18 정신은 더 이상 특정 정치세력의 상징이 아닌 온전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국민의힘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며 "여야 간 초당적 협의를 기반으로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겠다. 집권 여당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5·18 정신이 온전하게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16일 5·18 관련 단체들과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 같은 입장을 밝혔었다.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획을 그은 5월 정신 그 자체가 헌법 정신이란 점에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매우 마땅하다. 제반 여건이 무르익으면 여야 간 초당적 협의를 토대로 개헌을 통해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고 했고, 추경호 원내대표도 "5·18 민주화운동 관련 취지와 앞으로 당의 방향성에 대한 비대위원장의 말씀에 전적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성일종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국민 사이에 어느 정도 컨센서스가 있고 많이 동의하고 있다"면서 "개헌은 국가 틀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원포인트'로 할 수 있는지는 여야 원내 전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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