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우디 일부일처제 결혼관계는 끝났다”
시진핑의 7~10일 사우디 방문이 의미하는 것
“미국은 이제 더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사우디 최대 교역·투자국 중국으로의 ‘힘의 이동’
전통적인 미국-사우디간의 석유-안보 교환거래의 종말
그 교환거래에 토대를 둔 달러 기축통화체제도 동요 가속
새로운 다자주의 국제관계의 태동으로 이어질까
지난 10월 3연임을 사실상 확정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7~10일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의 지정학적 변동을 상징하는 또 다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사우디와의 에너지, 정보통신 인프라 분야 등에 관한 수십건의 개발렵력계획에 서명한 이번 시진핑의 방문을 두고 미국의 격월간 국제문제 전문잡지 <포린 폴리시>는 “미국과 사우디간의 일부일처제 결혼관계는 이제 끝났다”는 말로 그들간의 관계변화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 잡지는 “오늘날의 냉전 2.0체제에서 사우디는 (미국) 편들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쪽으로 더 밀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온라인판 기사(12월 7일)로 전했다. <폴리티코>는 이번 시진핑의 사우디 방문 때 미국의 달러 기축통화체제를 흔들 중국-러시아의 대안적인 국제거래 통화체제 협상에 모종의 진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중국-사우디간의 경제협력 강화가 아니라 첨단기술과 안보군사 등 전략분야에서의 밀착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12월 7일)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이 수입한 석유의 51%가 아랍산 석유고 그 5분의 4가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바레인,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에서 왔다. 중국 국영 에너지 회사 시노펙은 27년간 액화천년가스를 카타르에서 수입하는 최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이 잡지는 2005년 이후 중국은 아랍국들과 2230억달러에 이르는 투자 및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고 워싱턴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 중의 52%가 GCC 6개국과 체결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관련해 55억달러에 이르는 투자 및 건설계약을 맺었다.
중국의 투자는 대부분 에너지 분야에 집중돼 있다. 중국이 그 지역에서 수입하는 것들도 대부분은 석유화학 제품들이다. 걸프지역 국가들은 석유의존 경제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고 그런 면에서도 중국은 그들의 핵심 파트너다. 지난해 중국은 오만의 호텔 건설과 사우디아라비아 자동차제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러나 미국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걸프 지역 국가들과 중국이 전략분야에서 협력관계를 강화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GCC 국가들은 전기통신, 안보, 국방 분야에서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대기업 화웨이의 고객들이며, 신장 위구르에서 스파이 활동으로 미국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중국 인공지능 업체 센스타임과 같은 업체들도 GCC 지역에서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9월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는 센스타임과 2억 700만달러 규모의 인공지능 연구소를 자국 내에 짓는 합작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은 걸프지역 전장들에 투입되는 무장 드론을 아랍에미리트에 팔고 있다. 지난 3월에 사우디아라비아 기업은 중국의 대형 국영 방산업체와 드론제조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의 첩보기관들은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탄토탄 미사일 제조도 지원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달 바레인에서 열린 연례 안보회의인 ‘마나마 다이얼로그’에서 미국 관리들은 걸프지역과 중국의 협력강화가 미국과의 관계를 제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걸프지역 사이에는 특히 이란을 둘러싼 긴장이 존재한다.
시진핑은 이번 방문 때 지난 7월 대통령 당선 뒤 처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바이든보다 훨씬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당시 석유 가격이 치솟아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던 바이든에겐 사우디의 도움(석유 증산)이 절실했다. 그러나 사우디는 빈손으로 그를 돌려 보냈다.
이와 달리 시진핑은 풍성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할 가능성이 높다. 8일에 시진핑은 사실상의 통치자인 빈살만 왕세자를 비롯한 사우디 지도자들을 만났고, 걸프지역국 지도자들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아랍지역 전역에서 온 인물들을 두루 만났다.
사우디의 관리들은 이것은 미국을 냉대해서가 아니라 중국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바이든 정부는 사우디와의 까다로운 관계 속에 중국을 주요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 바이든에 대한 냉랭했던 대접과 대조적으로 시진핑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사우디를 워싱턴은 더욱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다.
사우디 관리들은 미국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최근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면서도 다른 나라들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너무 키우는 것에는 반대해 왔다.
GCC 국가들은 최대 라이벌인 이란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는데 미국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중국은 지난해 이 지역과 25년간의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를 맺었다. 시진핑은 이란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미국의 제재를 무릅쓰고 이란의 항구에서 수출되는 석유의 대부분은 중국 정유회사들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를 이란 체제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고 있다.
높은 석유가격과 경제성장에 고무된 걸프지역 지도자들은 이를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호기로 여기고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도 그랬듯이,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시각이다.
바이든과 사우디의 관계는 바이든이 대선 캠페인을 벌이던 2019년에 예멘에서 벌어진 ‘어린이 살해’와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와 관련해 사우디를 비난하면서 틀어졌고, 트럼프 정권 때 파기한 이란과의 핵협정을 바이든이 되살리려 하면서 더 소원해졌다.
미국과 사우디의 불편한 관계는 단지 바이든과 빈살만이라는 두 나라 지도자들간의 불화와 악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사우디가 미국에 석유를 제공하고 미국은 대신 사우디에 안보를 보장해 준 지난 수십년간의 양국간 기본적인 거래관계는 최근에 축적돼 온 여러 가지 스트레스 요인들 때문에 흔들려 왔다. <포린 폴리시>에 따르면, 예컨대 2001년 911사태 때 여객기들을 납치해 뉴욕 세계무역빌딩에 충돌시킨 19명의 하이재커들 중 15명이 사우디 국적자들이었으며, 그 범행계획에 대해 사우디 정부가 사전에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계속 떠돌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수니파가 지배했던 이라크에 시아파가 득세하게 만들어 같은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란의 영향력을 키워 줌으로써 사우디를 불안에 빠뜨렸다. ‘아랍의 봄’ 때 미국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민주적 개혁을 부추겼으며, 이는 그 지역 권위주의체제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사우디 왕가의 지배체제에도 잠재적인 위협을 가한 결과가 됐다. 미국의 셰일 오일 개발혁신은 세계 석유시장에서 미국을 사우디의 경쟁자로 만들었다. 오바마 정권은 사우디의 주적인 이란과 핵협정을 체결해 사우디를 불안에 빠뜨렸고, 2019년 사우디의 중요 석유시설 2곳에 대한 이란의 드론 및 크루즈 미사일 공격 때 미국은 사우디 안보와 관련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우디 비판 저널리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를 빈살만 왕세자가 지시했다는 미국쪽의 시각과 그에 대한 응징 발언 등 부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대한 불만도 거기에 포함된다.
사우디는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흔 석유가격을 내리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압박한 석유 증산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지난 10월 오펙 플러스 회의에서 러시아와 200만 배럴 감산에 합의해 미국과 유럽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미국의 불평과 분노에 대해 사우디는 그것이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석유증산이 초래할 사우디의 경제적 손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우디 국익 차원의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제재 동맹’에 인도 등 브릭스(BRICS) 제국들을 비롯한 다수의 비서방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사우디의 이런 대처는 이른바 ‘신냉전’적 편가르기에 맹목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려는 최근의 탈냉전적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중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중국의 사우디 석유 의존도가 커지면서 더욱 굳어지고 있다. 두 나라는 2016년에 “안정적인 장기 에너지 공급”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관계를 맺었다. 그것은 2021년에 양국간 교역규모가 873억달러에 달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반면에 사우디의 대미 석유 판매와 미국제 자동차와 항공기 수입이 대종을 이루는 미국-사우디 교역 규모는 같은 기간에 248억달러에 그쳤다.(<폴리티코>) 2013년 이후 사우디의 최대 교역상대국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으며, 사우디( 및 아랍지역)에 대한 최대 투자국도 중국이다.
중국은 빈살만 왕세자와의 만남을 중국-사우디간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유지돼 온 사우디 석유의 미국 달러 베이스 거래를 중국 위안화 베이스 거래로 일부 대체하려는 양국간의 오랜 협상의 성과가 포함될 수도 있다고 <폴리티코>는 지적했다. 이 부분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지배가 흔들리고 있고 중국-러시아 중심의 새로운 국제거래 통화체제가 태동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관측들과 함께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미국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달러 기축통화체제의 해체라는 지적들이 많아졌다. 이는 1970년대 초에 미국과 사우디간의 석유-안보 교환 거래에 토대를 둔 달러 기축통화체제가 지금 그만큼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란과 숙적관계인 사우디가 중동지역 안보 보증자로서의 미국의 역할을 중국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이 지역에 대한 서방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중국의 이란산 석유 구입은 이란에겐 경제 생명줄과 같은 것이며, 지난해에 두 나라는 상호 교역과 협력을 강화하는 25년간의 장기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란이 걸프지역 국가들을 공격할 경우 중국은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 오직 미국만이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미국의 시리아 주재 대사를 지낸 로버트 포드 미국 중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말했다.(<폴리티코>)
사우디의 핵심적인 안보 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미국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의 미국-사우디간의 ‘일부일처’ 관계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포린 폴리시>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순탄하지 못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우디의 가장 중요한 안보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역할을 베이징이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야드(사우디)와 워싱턴 간의 일부일처제 결혼관계는 아마도 소멸할 것이다. 오늘날의 냉전 2.0체제-미국과 중국-러시아간의 점증하는 긴장과 경쟁관계를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고 싶어하든-는 사우디가 (미국) 편들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베이징과 모스크바 쪽으로 더 다가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워싱턴은 이제 더 이상 (사우디의) 유일한 아내가 아니다.” 알다시피 아랍지역의 무슬림 결혼제도는 4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워싱턴포스트>의 전직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오터웨이는 미국-사우디 관계는 ‘가톨릭 결혼’이 아니었다면서 “사우디는 미국과 이혼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들과도 결혼하겠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로운 다자주의 국제체제가 태동하고 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쪽이 옳고 그르냐는 시비와 상관 없이, 이는 또한 미국과 서방이 지배해온 기존의 국제관계에 도전하고 있는 중국-러시아가 주창하는 ‘진정한 다자주의 국제질서’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